295화.
달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황비에게 뛰어갔다.
“황비님? 화, 황비님, 괜찮으세요?”
그녀가 막 황비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황비님!”
비명을 들은 황비궁의 병사들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그들 모두가 황비에게 손을 대기 직전인 달리아를 목격했다.
병사들이 검이며, 창을 달리아의 목에 들이밀었다.
“무, 무슨…….”
달리아가 잔뜩 굳어져선, 당황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쳐다봤다.
‘뭐긴 뭐야. 황족 위해죄로 긴급 추포된 거지.’
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 * *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달리아는 즉시 투옥되었고, 나와 한지혁 또한 조사 대상으로서 옥사에 갇혔다.
깨어난 황비와 시녀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아스트라 백작 영애가 가져온 향로로 향을 맡던 중이었네. 향초(香草)도 아스트라 백작 영애가 가져왔지. 그런데 달리아 양을 보자마자…….”
“그렇다니까요! 황비님이 쓰러지시더라고요. 저희도 황비님을 부축하러 달려가던 중에 정신을 잃었고요.”
처음엔 내가 가져온 향로에 주목했다.
하지만 향로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성물인데.’
도리어 신체 능력을 강화해주는 성물이란 것이 황궁 마법사들에 의해 밝혀졌다.
“향초(香草)에도 문제는 없습니다.”
“하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입니까. 난데없이 혼절이라니요.”
“역시 달리아 아스트라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황비님의 가호로 인해 황비궁은 결계 제외 대상이 아니오. 달리아 아스트라가 가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겠소?”
“무슨 가호기에.”
“대체 어떤 가호란 말이오.”
이미 내 가호는 밝혀져 있었고, 한지혁은 완벽한 평민.
그에게 가호가 없음은 원화였던 시절에 확인되었다.
사람들은 평민이, 그것도 대천문이 닫힌 나이 서른 가까운 자가 가호가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대로 의심의 화살은 달리아에게 쏠렸다.
마지막엔 내가 의심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황궁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거든.
“글쎄요. 저도 달리아가 들어온 이후에 황비님과 시녀들께서 쓰러지신 걸 본 것밖에는…… 아, 그러고 보니까…… 앗, 아니에요.”
“황비님께서 혼절하셨소. 가감 없이 말하지 않는다면 영애 또한 황족 시해 미수로 엮이게 될 것이오.”
“저…… 사실은 달리아가 중앙문이 아니라 북서문으로 황비궁에 왔어요. 그때 황비님께 기분이 단단히 상했던 터라…….”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제 오해일 거예요. 이 말은 없던 것으로 해주세요.”
하지만 조사관들이 없던 말로 해줬겠는가?
달리아의 심문은 점점 강도가 거세졌다.
“저, 저는 몰라요. 정말이에요!”
“거짓말은 그만둬라. 죄가 점점 깊어질 뿐이다.”
“하, 하지만……!”
“너는 그리미에 아스트라의 딸. 귀족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필시 가호가 있을 터. 무슨 가호를 가진 게냐.”
“그건……. 저는 기억을 잃었어요! 가호가 뭔지 몰라요!”
“네 과거를 짚어봐야겠다.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일했느냐.”
“몰라요. 진짜예요…… 아아앙, 아빠……!”
전 백성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달리아를 심문하면 할수록 수상한 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부친을 찾기 직전에 기억을 잃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겠어?”
“출신과 가호를 숨기고 있어.”
“황군이 아무리 뒤져도 과거를 찾을 수 없어.”
“그리미에 아스트라까지 딸의 출신을 밝히지 않아.”
“이건 이상해.”
“수상해—!”
폭풍우가 불었다.
……달리아의 배 쪽으로.
며칠 후, 아스트라 백작저.
“아가씨—!”
“아—가—씨—!!”
내가 없는 새에 황도에 올라온 하이디와 베티가 달려왔다.
하이디가 울먹울먹한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세상에, 야윈 것 좀 봐.”
“난 조금도 야위지 않았어.”
도리어 쪘으면 쪘겠지.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 갇혀서 뒹굴거리기만 했더니 몸이 무겁다.
반대쪽에선 베티가 매달렸다.
“황궁 놈들이 식사도 안 주던가요? 네?!”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넣어줬어.”
정말이다.
나는 무늬만 조사 대상이지, 조사 초반부터 의심 대상은 달리아였기 때문에 아주 안락하게 지내다가 왔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두 사람은 울먹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나는 둘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그보다 이그리츠 군은?”
묻던 찰나, 누군가 중정으로 나왔다.
“루카! 몸은 괜찮아?”
“예, 이세즈가 축복의 땅의 뿌리를 열어준 덕에 씻은 듯 나았습니다.”
“하지만 전부 낫진 않은 모양인데?”
나는 루카의 붕대를 가리켰다.
루카는 붕대로 목에 감아 부러진 팔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건 패션 같은 거랄까요.”
“너스레는. 그 축복의 땅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썼으니까 이미 뿌리의 힘이 거의 다했어. 독은 가셨을지 몰라도 다 나은 건 아니니까 조심해?”
“예.”
황도에 있던 축복의 땅.
진짜 요긴하게 써먹었지.
그거로 잔느의 언니인 록산느의 병을 치료했고, 아빠가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오면 또 치료했고…….
‘아마, 카인로드 숙부가 마독을 치료하지 않는 것도 축복의 땅을 믿고 있어서겠지.’
축복의 땅이 있으니 마독은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거다.
그리고 그 성격을 생각하면…….
‘기회다 싶어서 마독을 연구하려고 일부러 치료를 일찍 하지 않은 거고.’
하여간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지혁이 내게 속삭였다.
“축복의 땅은 하나 더 있잖아. 황자의 땅.”
“완벽하게 내 것이 된 건 아니잖아. 그때는 급해서 무단으로 들어가 뿌리를 연 거고.”
“언제 받아낼 거야? 황자의 요구를 들어줬으니 이제 거래할 수 있잖아. 황도로 돌아와서 거래하기도 편할 테고.”
“모친이 쓰러졌어. 이런 상황에서 거래하자고 나서면 미친 애가 아닐까?”
“그렇긴 해…….”
그때였다.
속닥속닥하던 중,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릴로트.”
“와, 오늘 멋지세요. 어디 가세요?”
“중앙탑에. 네 조부가 황도로 올라왔다.”
“달리아 일 때문인 거죠?”
“그래. 너는 오늘 일정이 있나?”
“환복하고 다시 황궁에 들어가야 해요. 황비님께서 부르셔서.”
“저녁은 함께하자.”
“네.”
나는 아빠를 포옹해서 배웅한 뒤, 방으로 올라갔다.
‘여기가 제1백작저구나…….’
내가 없는 동안 짐이 모두 옮겨져 있었다.
물론 선황의 보물은 아직 제2백작저에 있지만.
본래 여기는 아스트라 공작의 황도 저택.
할아버지는 대부분 장원에서 생활해서 아빠와 나, 오라버니들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확실히 아스트라 공작의 저택이었던 만큼 엄청나게 큰 곳이었다.
고용인들이 아빠와 내 취향대로 인테리어 공사를 해놔서 그리미에가 살 때보다 훨씬 근사해졌고.
‘드디어 제1백작저를 차지했어.’
감동이 밀려왔다.
이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빙그레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집사가 다가왔다.
“아가씨, 황궁에서 마차를 보냈습니다.”
“그래, 금방 내려갈게.”
이 집을 결코 빼앗기지 않겠다.
물론 내 삶도 더는 그리미에 일파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저택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결심했다.
* * *
그 시각 황궁.
쨍—!
물잔이 벽에 처박히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요를 갈랐다.
얼굴이 거무죽죽하고, 눈 밑이 새카만 황제가 겨우 심호흡을 하며 소리쳤다.
“네 딸…… 대체 무슨 가호를…… 가진 게냐—!”
그리미에가 허리를 굽혔다.
“황비님의 혼절 사건의 범인은 결코 제 딸이 아닙니다, 폐하.”
“황궁의 경비가 손가락질당하고 있어. 이 내가 황비조차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라…… 으윽……!”
황제가 머리를 감싸며 황좌에 주저앉았다.
시녀가 다급히 황제를 부축했다.
“안테(수석 황궁의) 님을 호출하겠습니다.”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폐하…….”
“물러나라지 않았어!”
“…….”
시녀가 염려 어린 얼굴로 물러났다.
3년 전, 황제에겐 이름 모를 병이 발병했다.
황태자조차 정해두지 않은 마당에 황제의 상태가 바깥에 드러난다면, 제국은 크게 술렁일 터.
무엇보다 정적들이 기회를 잡고 차기 황위를 구상하려 들 수 있었다.
해서, 황제의 병에 관해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폐하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신다.’
얼굴이 햇볕에 몇 날 며칠을 그슬린 듯 새카매졌다.
온몸에 힘이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복통을 호소했다.
이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서 말에는 쇳소리가 섞여 나온다.
황제가 금좌의 팔걸이를 잡은 채로 그리미에를 노려보았다.
“내 황궁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당장 네 딸을 풀어달라?”
“달리아는 폐하께서 원하는 바를 이루시려거든 꼭 필요한 아이입니다.”
“조사를 받아. 모든 조사가 끝난 후 풀어주지.”
“그 일을 위해선 그 아이가 필요합니다. 거래를 지속하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감히 짐을 협박하는 게냐!”
“협박이 아닙니다. 제국의 내일을 위한 청이지요.”
“이……!!”
황제가 금좌의 손잡이를 꽉 그러쥔 채 소리쳤다.
그리미에가 재빨리 무릎을 굽혔다.
“이 그리미에, 제국의 내일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란 맹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
“맹세합니다. 그 아이라면 황제 폐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잡았다.
“진정 지킬 수 있겠는가?”
“50년 후의 미래에서도 폐하께선 이 나라를 지켜가고 계실 겁니다.”
황제가 칫, 혀를 찼다.
그리곤 시녀에게 말했다.
“에스더.”
“예, 폐하.”
“달리아 아스트라를 심문 중인 백기사에게 짐의 말을 전해라.”
시녀, 에스더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 * *
황비궁으로 가던 나는 낯선 인물을 마주했다.
‘뭐지?’
황제궁 소속을 증명하는 펜던트를 차고, 시녀복 차림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인물인데?
‘황제궁 소속의 시녀인데 타국인이잖아.’
구릿빛 피부와 청안, 새카만 머리칼…… 심지어는 손등에 커다란 흉터까지 있었다.
“시녀님.”
부르자,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서군 원화를 뵙습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예요. 이제 원화가 아니지요.”
“서군 원화직은 원화께서 내려오신 후 계속 공석이랍니다. 최고의 원화를 기리기 위해서지요. 그런 분을 원화라 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인상이 되게 좋네.’
척 보기에도 아주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풍기는 기운마저 다정하고 상쾌하다.
“처음 보는 분이신데, 괜찮으시다면 이름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내가 정중하게 묻자 그녀가 깜짝 놀랐다.
“그런……. 이름쯤이야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지요. 에스더입니다. 저어, 성(Family name)은 따로 없습니다.”
‘성이 없다면 이민족 출신이 확실하다.’
하녀와 시녀는 다르다.
하녀는 평범한 고용인.
시녀는 귀족 출신으로 주인의 보좌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시녀복인데 이 나라 사람들이 한미하다고 여기는 이민족이라…….’
나는 생긋 미소 지었다.
“예, 기억하겠습니다.”
에스더 또한 부드럽게 마주 웃고 허리를 굽혔다.
그때였다.
“네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황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에스더는 서둘러 황비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 와주었구나. 아스트라 백작 영애.”
나를 보는 눈은 부드러웠다.
그런데 에스더를 보는 표정은…….
‘뭐야, 황비가 이런 표정인 건 처음 보는데.’
황비가 날카롭게 물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황비궁에서 달리아 양을 심문 중인 백기사에게 폐하의 명을 하달코자 합니다…….”
“감히 황명 하달을 이민족 노예 계집이 전해?”
“…….”
“무슨 명이기에.”
“송구합니다, 황비님. 황명은 외부에 유출할 수 없는 것이 국법—”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에스터의 고개가 돌아갔다.
황비가 매서운 눈초리로 에스더를 바라봤다.
“감히 제국의 황비 앞에서 이민족 노예가 제국법을 운운하는 게냐.”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송구합니다. 하지만 폐하의 명이…….”
짝!
황비는 또 한 번 에스더의 뺨을 때렸다.
“네깟 년이 감히 폐하를 운운해.”
아하.
감이 온다.
‘애첩이구나.’
황비는 황제의 외아들인 살바토레 황자의 모후.
에스더가 황제의 애첩이 되어 황자를 낳아 제 아들의 자리를 위협할까 바짝 털을 곤두세운 것이다.
나는 얼른 황비 앞에 나섰다.
“황비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뭣 모르는 자들이 제국의 기강을 염려하시는 황비님의 속내를 곡해할까 두렵습니다.”
“…….”
황비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리곤 휙, 몸을 돌렸다.
“아스트라 백작 영애를 정원으로 데려와라.”
“예.”
황비가 떠난 후에야 에스더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내게 감사하다는 듯 인사한 뒤, 다시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에스더와 스칠 때 나는 묘한 향을 맡았다.
“……약초 향.”
나는 이 향을 내는 약초를 잘 알고 있다.
그야 잊을 수 없었으니까.
저건 첫 번째 삶에서 품귀해진 특별한 약초였으니까!
‘사람들이 전염병의 치료제라 믿어서.’
그래, 맞아.
이건 전염병의 치료제로 여겨였던 크루마투스의 향이다.
알고 보니 치료가 아닌, 통증에만 효과를 보이는 약초였지만.
‘전염병은 황도에서 시작했었지.’
그래, 황도였어. 황도였는데…… 떠올리니 이상했다.
이 대륙 인구의 6할을 줄인 엄청난 전염병.
전파가 빨랐던 건 황궁이 제대로 진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황제는 뭘 했지?’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머릿속을 스쳤다.
특별한 약초를 다루는 이민족이 있지.
그리고 저 시녀는 이민족 출신.
황제는 황비가 불안해할 만큼 시녀를 곁에 두고 있다.
전염병은 황도에서 시작.
‘……황궁이 전염병의 시초였다면?’
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