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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296화 (297/390)

296화.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황비궁의 시녀들이 다가왔다.

“모시겠습니다.”

“예.”

나는 에스더를 힐끗 쳐다보고서 황비의 정원으로 향했다.

* * *

정원에서도 황비는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 찻잔을 노려보고 있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황비를 불렀다.

“황비님.”

“……아, 그래.”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황비가 나를 쳐다봤다.

“초청에 감사드립니다.”

황궁으로 오라 한 이유를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올해 제(祭)가 있지 않니.”

무월기의 제.

무월기는 쉽게 말하면 월식처럼 달이 안 보이는 날인데, 그날 제를 지낸다.

이 세계 사람들은 무월기를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황비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제를 주관하는 건 황실 여성의 역할이지.”

“예.”

“한데…….”

황비가 소매를 걷어서 내게 팔목을 내밀었다.

‘부스럼이 생겼잖아?’

황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후 폐하와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단다.”

“…….”

“황궁은 로테흐 강물을 끌어 쓰잖니? 강 상류에서 몬스터가 물을 오염시킨 모양이더구나.”

“…….”

“몸에 이상이 있으면 제는 주관할 수 없지. 해서 말인데, 영애가 나를 좀 도와주려무나.”

황태후, 황후, 황비…… 다음으로 황태자비.

그러니까 황비는 내게 황태자비, 즉, 살바토레 황자의 비가 될 생각이 없느냐고 또 한 번 묻는 것이다.

황비가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너무 깊이 생각할 것은 없단다. 제를 주관하며 느껴 보렴.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번 제를 주관하면 계속 살바토레의 비가 되라고 질척거릴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 하기는 너무 아까워.’

제를 주관하면 황궁 금서관에 들어갈 수 있다.

나라가 통제하는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겐 <열람>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알고 싶은 모든 걸 알 수 있게 되는 힘은 아니었다.

검색창이 아니니까.

난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고대의 일, 크로노트회 등등.

‘하지만 그 정보가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데 리스크를 감수하는 건…….’

고민하고 있자, 황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굉장한 제안을 마다할 만큼 영애도 내가 우스운가.”

“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입 가벼운 자들은 떠들더구나. 나는 지는 해라고 말이지.”

“호사가의 헛소리는 귀에 담지 마셔요.”

“내 신세가 우습기야 하겠지.”

황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친정은 힘을 잃었고, 모후께 황후의 인장을 빼앗겼으며…… 황제 폐하는 이민족 노예를 곁에 두었으니.”

“시녀 에스더 말씀이십니까?”

“그래. 더러운 이민족 계집.”

“…….”

황비는 흥, 실소했다.

“이민족 노예 계집에게 황제궁 시녀 자리를 주고 밤낮으로 곁을 지키게 하신다.”

“…….”

“황자가 그 계집에 관해 물으니 노발대발하시더구나.”

“노발대발하셨다고요…….”

“제 여인에게 눈독 들이지 말라는 것이겠지. 살바토레는 그 계집 때문에 폐하의 잔에 머리가 깨지는 수모를 겪었어.”

황비가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고 파르르 떨었다.

왜 그렇게 에스더를 질색하나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찌 계집 때문에 아들에게…….”

‘그런 게 아니야.’

황제가 잔을 내던져 가며 분노한 것은 여인 때문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착착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황제가 분노한 이유는 아마도 살바토레가 주변을 캐고 다녔기 때문일 터다.

‘살바토레는 황제의 몸 상태가 이상한 걸 눈치챈 거야.’

주변을 캐고, 캐다가 증거를 잡았겠지.

그러니 황제에게 당당히 에스더를 곁에 두는 이유를 물을 수 있었던 거다.

‘황제의 건강이 위험하니 황태자를 정해 두라고.’

즉, 협박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을 터.

해서 황제가 그토록 분노한 것이다.

황비는 가늘게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좌우지간에 좋은 제안일 터이니, 고심해 보도록 하렴.”

“예, 황비님. 빠른 시일 내에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황비의 시녀가 희멀건 얼굴로 테이블에 다가왔다.

그리고 황비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황비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녀가 매서운 눈으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이야.”

“까닭은 듣지 못했습니다…….”

시녀가 안절부절못하자, 황비가 탕!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 나라의 황비인 내가 혼절한 사건이다. 한데 어찌 제대로 된 조사 없이 그리미에 아스트라의 딸을 풀어 주셨단 말이냐—!”

달리아가 풀려나?

굳어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황비궁의 시녀들은 주인이 분노하자, 황급히 허리를 수그렸다.

황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다.”

“에스더가 달리아 양을 데리고 알현실로 향했습니다…….”

“뵈어야겠다고 하잖아!”

시녀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비님,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시 보자꾸나.”

“예.”

인사하고서 정원을 나섰다.

정원 안에서 나를 보좌하던 한지혁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달리아가 왜 풀려나?”

“황제의 병.”

“뭐.”

“황제에게 병이 생긴 거야. 그리미에가 황제와 거래하며 내건 것은 황제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는 것이겠지.”

달리아가 조사받기 시작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리미에가 읍소한 것이다.

‘달리아가 있어야 치료할 수 있다고 했을 터.’

한지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병이기에…….”

“이타푸르.”

“그게 뭔데.”

“너는 모를 거야. 첫 발병자가 황제일 테니까. 그보다 움직여야겠어.”

“이타푸르를 치료하려고?”

“아니, 시중에 있는 모든 크루마투스를 사들여.”

“아아, 그게 치료제인가 보지?”

“아냐!”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지혁을 쳐다봤다.

“크루마투스가 전염의 발단이야. 이타푸르균을 변형시켜서 전염성 병으로 만든단 말이야.”

“뭐, 뭣?!”

“이 대륙의 6할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을 거야.”

왜 이타푸르병의 진원지가 황궁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했는지 알겠다.

‘그 병을 전염성 병으로 만든 게 황제였으니까—!’

나는 한지혁의 팔을 잡았다.

“빨리 움직여야 해. 이미 황태후와 황비가 감염되었어.”

“가, 감염이라고?”

피부에 부스럼이 나면 이타푸르의 시작이었다.

* * *

달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알현실을 둘러보았다.

“와아…….”

과연 판타지 세계의 황궁.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화려하기로 따지면 아스트라의 성들도 엄청나지만, 내 취향은 황궁이야!’

흰색 바탕에 그윽하게 물결치는 아름다운 대리석 바닥과 벽.

벽 모서리마다 백금의 줄로 포인트를 주었고, 장식대마다 아름다운 화병에 꽃이 가득하다.

기괴한 조각들만 가득했던 공작성과 달리, 엄청나게 큰 액자 속엔 보석으로 장식한 그림이 있었다.

“너무너무 예뻐요, 폐하…….”

“달리아.”

그리미에가 딸을 자중시키려는 듯 부르자, 황제가 “아닐세.”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기억을 잃었다고?”

“아, 네! 저기, 그러니까 사……고로?”

달리아가 맞느냐는 듯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그리미에가 달리아를 대신해 대답했다.

“몬스터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한데 그렇다면 내 병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

“병이요……? 폐하, 어디 아프세요?”

달리아가 몹시 걱정된다는 듯 눈썹을 착 늘어뜨렸다.

“그래.”

황제가 에스더에게 눈짓했다.

에스더가 조심스럽게 황제의 셔츠를 벗겼다.

황제의 피부를 본 달리아가 흠칫했다.

“헉, 피부가……!”

온통 엉망이었다.

징그러운 발진들과 부스럼이 가득했고, 곳곳에 곰팡이 같은 기묘한 것이 피어 있었다.

황제는 다시 셔츠를 입으며 말했다.

“발병한 건 3년 전인 듯싶다.”

“‘싶다’고요?”

“그래.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병이기에.”

“아…….”

“3년 전부터 피로가 극심했지.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더니, 다음 해엔 폐병과 내장이 찢기는 듯한 복통이 생겼다. 그리고 올해부턴 피부에 이런 것이 생기더니,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몸을 저미는 것 같아.”

“…….”

“석 달 전부터는 종종 의식을 잃고, 며칠씩 깨어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그렇군요…….”

“제국의 의사는 물론, 의료 대국이라는 펜시엄의 의사도, 세상의 모든 약초를 다룬다는 마브로 부족의 에스더도, 신관과 마법사조차 까닭을 몰라.”

“으음, 엄청 힘드셨겠어요…….”

“이만큼이나마 살 수 있었던 건 네 아비가 가져온 크루마투스라는 약초 덕이다.”

“…….”

“특별한 조건에서만 피는 아주 희귀한 약초인데, 에스더가 짐의 지하 온실에서 남몰래 기르는 중이지.”

“그렇구나. 시녀님, 멋지세요!”

에스더가 어색하게 웃었고, 황제는 이마를 짚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황제라고 어떻게든 호응을 하는 모양인데, 마치 어린애들 사이에서나 하는 맞장구 같았다.

“상황 파악조차 안 되는데, 이 아이가 진정 짐의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이냐?”

“이 아이, 치유의 가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건 신관들도 꽤 가지고 있는 가호이지 않으냐. 상처 따위나 치료할 뿐인 가호일 터인데.”

“수호성과의 동화율이 매우 높습니다.”

“어찌 금기를 입에 담느냐—!”

전 세계의 황족, 왕족들은 힘을 모아 고대의 일을 백지로 만들었다.

백성이 계층 지배에 반발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황족, 왕족, 귀족은 가호를 쓸 수 있는 자.

신께서 가호를 나누시어, 백성을 다스리게 하시었다.]

—라는 말을 머릿속에 심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해서 수호성은 이제는 극소수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그리미에는 차분히 대답했다.

“수호성 동화율 96프로.”

“……!”

“3단계 가호 소지자의 동화율이 10프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수치지요. 감히 말씀드리건대, 세계를 뒤져도 이 아이보다 동화율이 높은 자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가호가 초월 단계에 들어선 데이몬드조차 말이지요.”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가호가 초월 단계에 들어섰단 말인가.”

초월 단계.

고대인과 같은 수준의 가호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데 그러한 데이몬드 아스트라보다도 높은 동화율이라.”

“달리아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기억을 잃은 터라 제대로 가호를 사용할 수 없기도 합니다.”

“해서.”

“하지만 곁에 두시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크게 완화시킬 것입니다.”

“……완치는 얼마나 걸리겠느냐.”

“한 달 내로 몸을 완전히 회복시켜 가호를 제대로 사용하도록 교육할 것입니다.”

잠깐 고심하던 황제가 에스더를 불렀다.

“달리아 양에게 그 펜던트를 내주어라. 짐의 직속 시녀로 삼아 보좌하게 할 것이다.”

“예, 폐하.”

달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리미에를 쳐다보았다.

“그 펜던트가 뭐예요, 아빠?”

“쌍용의 문장이라고 하지. 총애의 증거란다. 쌍용의 문장을 차고 있는 한, 황제 폐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너를 고개 숙이게 할 수 없단다.”

“와, 멋지다……!”

달리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엄청 특별하네, 나.’

꼭 주인공 같다.

그치, 빙의의 참맛은 이거지!

달리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자락을 넓게 펼치고, 무릎을 까딱 굽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폐하!”

황제가 픽 실소를 흘렸다.

“자신만만하게 인사한 것 치곤 아직 크게 미숙하구나.”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잘 안 돼요. 그래도 노력해서 에릴로트처럼 열심히 할 거예요!”

황제는 쿡쿡 웃으며 에스더를 쳐다봤다.

“다른 젊은 애들에겐 없는 귀여움이긴 하군.”

“실로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에스더가 후후 웃으며 동조하자, 그리미에도 다정한 표정으로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달리아는 발그레한 얼굴로 생각했다.

‘나, 이 나라가 진짜 좋아.’

다들 귀여워해 주고, 특별하게 여겨 주고.

게다가 멋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딱 하나만 빼고.’

에릴로트의 얼굴을 떠올린 달리아의 얼굴이 뚱해졌다.

* * *

이튿날.

나는 황궁에 다시 들었다.

오늘은 황태후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난 한지혁과 복도를 걸으며 속삭였다.

“크루마투스는?”

“제국에선 다루는 상단이 다섯 군데 정도. 다루는 상단의 수도 적고, 크루마투스 자체가 희귀해서 뿌리 뽑는 데엔 얼마 안 걸릴 거다.”

“다행이네.”

“황태후 폐하의 용태는 어떠시지? 들은 게 있어?”

“모르겠어. 그런데 3주 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하니, 아마 황비보다는 심각할 듯—”

그때였다.

“워, 원화?”

“설마 원화십니까?!”

등 뒤에서 뭔가 탁,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서군 출신 기사들이 보였다.

한 사람, 그러니까 서군의 횡령범이었던 고르고는 책까지 떨어뜨렸다.

“어? 조윅, 카진, 쿠, 리암에 고르고까지 있네.”

“저희는 안 보이십니까…….”

불리지 않은 기사들이 우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보여, 보여.”

나는 하하 웃었다.

그들이 나를 빙 둘러쌌다.

원화군일 때보다 키가 더 커서 마치 벽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다들 황군이 됐구나? 경비대 갑주가 잘 어울리는…… 와, 조윅과 카진은 백기사야?!”

백기사.

즉, 황제 직속 호위 부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자들만 뽑아 가는 곳이다.

리암은 툴툴거렸다.

“저도 다음 선발에서는 백마대에 갈 겁니다.”

“그래, 응원할게. 그런데 고르고는…… 뭐야?”

“저는 행정관 시험을 봤죠. 딱 붙었고요!”

“요새는 횡령 안 하지?”

“아, 안 합니다…….”

“그래. 그런데 왜 서군이 다 모여 있어?”

리암이 씩, 웃었다.

“점심을 같이 먹었죠. 원래 같은 출신끼리 끌어 주고 밀어주고 하는…… 와.”

떠들던 리암이 말을 멈추고 내 뒤를 쳐다봤다.

“쌍용의 문장이잖아. 선황 대 이후로 처음이지 않나.”

“싸, 쌍용의 문장?”

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내 뒤의 사람에게 집중했다.

복도도 크게 술렁였다.

‘쌍용의 문장? 황제가 그런 걸 준 사람이 있다고?’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황제궁의 시녀복을 입은 달리아가 자랑스레 쌍용의 문장을 목에 걸고 있었다.

“아, 에릴로트 안녕……이 아니고.”

달리아가 뾰로통 입술을 내밀었다.

“잘 됐다. 안 그래도 만나고 싶었어.”

“……날?”

“그래, 사과할 기회를 주려고 말이야. 너, 되게 나빴어. 알지?”

이 3세는 악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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