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308화 (309/390)

308화.

* * *

알렉시스는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회장 앞에 다다른 후에야 그는 손을 놔주었다.

나는 큼, 헛기침했다.

자꾸만 목구멍이 간지러워서.

그런 날 보고 알렉시스는 픽 웃었다.

난 뾰로통한 얼굴로 물었다.

“왜 웃어. 내가 웃겨?”

“너 가끔 네 할아버지와 되게 닮았어. 알아?”

“……내가?”

“민망하면 투덜거리는 것도 그렇고.”

“…….”

“헛기침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까 할아버지는 날 보면 헛기침을 많이 하곤 했다.

할아버지도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알렉시스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덮었다.

“……머리 망가지거든.”

“봐, 네 할아버지와 넌 닮았잖아.”

“…….”

“먼저 들어간다.”

“……그러든가.”

그렇게 말하다가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또 할아버지처럼 대꾸했네.’

알렉시스는 쿡쿡 웃고 먼저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가 헝클어뜨린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온기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은데도, 어쩐지 볼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넌 왜 그렇게 날 싫어해?”

달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감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그 애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널?”

물으니 달리아가 눈에 바짝 힘을 주고 날 노려봤다.

마사는 보이지 않았다.

향로는 내 손에 없었으므로.

파티장의 하녀에게 향로를 내 마차에 보관해 두라고 했다.

달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난 너와 친해지고 싶었어. 그런데 넌 자꾸 날 힘들게 하잖아.”

달리아가 유세은이란 것을 알고 나니 민낯이 보인다.

유세은은 늘 저렇게 모든 일에 남 탓을 하곤 했다.

그땐 정말로 내 탓이라고 생각했지.

“깨, 깨졌어. 어떻게 하지……. 할머니가 아끼는 그릇인데…… 이모할머니가 해외에서 사다 주셨다고…….”

“이, 일단 빨리 치우자. 위험하니—”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왜 식탁에 놔둔 거야?!”

“어? 그야 할머니가 댁으로 가져가실 테니까 챙겨 둔 건데…….”

“이렇게 함부로 두니까 깨뜨리지! 내가 학원에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서 몸 가누기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

“…….”

“와앙! 난 몰라……! 너무해!”

어릴 때도 그랬고,

“그런데 언니는 왜 집을 도와주지 않아? 과외비로 수억 번다며.”

“학생 과외로 수억 버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래도 꽤 번다고 하던걸? 그런데 부모님이 이렇게 힘든데 왜 도와주지 않지? 언니는 진짜 차가운 사람이구나.”

“집이 힘든 건 네가 그놈의 피아노를 포기 못 해서 그렇지. 네가 레슨만 포기해도 훨씬 나을걸.”

“왜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아빠, 엄마 꿈을 이뤄 주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거야! 나는 두 분의 꿈이니까!”

—다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은은 삼수를 하고서야 겨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삼수할 때까지 한 달에 수백 하는 레슨을 포기하지 못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며 번 내 알바비는 고스란히 세은의 레슨비로 들어갔다.

하다 하다 학비도 못 낼 지경에 이른 후 지불을 포기하니, 나를 힐난했다.

그땐 정말 내가 못됐나 싶었다.

정말로 이기적인가, 나 때문에 부모님이 힘든가…….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말은 바로 하자. 내가 널 힘들게 한 게 아니라, 네가 널 힘들게 한 거야.”

“그건 네가 날 견제해서—”

“할아버지에게 무례하게 군 것을 사촌으로서 제지한 게 문제야?”

“둘이 있을 때 조용히 알려 줄 수도 있었잖아.”

“조용히 알려 주려 했지만 ‘이게 왜?’ 하며 더 까분 건 너였잖아?”

“…….”

“또 우리 남매가 어렵게 손에 넣으려 했던 연명장을 네가 훔쳐 가려던 걸 제지한 게 왜?”

“후, 훔치려고 한 게 아니라……!”

“연명장이 있다는 것을 엿듣고, 우리가 먼저 손에 넣기 전에 움직인 게 훔치려고 한 거야.”

“…….”

“크루마투스로 백성들을 병들게 할 때도 막아 준 건 나지.”

“미리 말해 줬다면—!”

“얘기하자고 불러냈는데 난리를 친 건 누구지?”

“…….”

달리아는 대꾸할 말이 없어서 분한지 “이익……!” 하며 날 노려봤다.

“네가 가문에 끼칠 뻔한 손해를 미연에 제지한 게 방해라면 할 말이 없어.”

“왜 말을 그렇게 해?”

“그러니까 말이야. 왜 넌 너 좋을 대로 해석해서 말을 그렇게 할까.”

“…….”

“제발 생각이란 걸 해. 머리 두고 뭐 해?”

나는 경비병에게 눈짓했다.

문을 열라는 신호였다.

경비병들이 막 문을 열기 전에 달리아가 거칠게 날 돌려세웠다.

“너 진짜 너무하잖아!”

“뭐가? 네가 대꾸할 수 없게 한 게?”

“그런 식으로 차갑게 말할 건 없는데도 넌……!”

그즈음 문이 열렸다.

달리아가 소란을 피우니, 문가에 있던 사람들이 우릴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가며 그 애를 힐끗 쳐다보았다.

“달리아, 너처럼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꼬투리를 잡아 억지를 부리는 사람을 할아버지께선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뭐?”

“패배자.”

달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순수하게만 보였던 표정이 사라지고, 싸늘한 알맹이가 보이는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바로 하고 미소 지었다.

파티 홀 중앙에서 나를 바라보는 여성을 향해.

“콘스탄틴 대녀님을 뵙습니다.”

달리아도 입술을 꾹 깨물고선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대녀님을 뵈어요.”

허공에서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맹렬히 부딪쳤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유세은에게 당하지 않기로.

* * *

부채로 입가를 가린 대녀가 달리아와 에릴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희가 그…….”

에릴로트를 싸늘하게 쏘아보고 있던 달리아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네! 제가 달리아예요, 대녀님!”

‘역시 나를 알아보시는구나.’

헤라의 말이 맞았다.

대녀도 자신을 알 거라는 그 말.

[하기야, 황제에게 쌍용의 문장을 받았던 나인데. 다들 알 거야.]

마사가 에헤헤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달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달리아는 어깨가 부푸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대회에 나가면 아무도 날 몰랐는데.’

다들 언제나 순위권에 입상하는 모 교수의 제자, 모 피아니스트의 딸에나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에릴로트는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대녀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달리아가 뚱한 표정으로 에릴로트를 쳐다보았다.

‘뭐야, 저는 매번 예의 운운했으면서.’

대녀 같은 높은 사람이 말하면 대꾸를 해야지.

“에릴로트, 뭐 해? 답을 드려야지.”

하지만 에릴로트는 조용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응?’

주변 사람들이 쿡쿡 웃고 있었다.

대녀마저도 웃으며 부채를 접었다.

“그래, 너는 누구지?”

“에릴로트 아스트라입니다. 위대한 크로노스 아스트라를 조부로 두고, 적오기의 계승자로 낙점된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딸입니다.”

“……!!”

달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뭐야? 뭐? 왜 그러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달리아는 우왕좌왕하고 있었지만, 에릴로트는 차분했다.

저 말은 달리아와 에릴로트를 알아보는 말이 아니었다.

‘너희가 그 더러운 피구나.’

—라는 뜻으로.

반쪽은 평민인 것들이라는 무례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릴로트는 깎아내리는 말이라는 걸 알고 침묵했다.

자신은 더러운 피가 아님을 온화하게 지적하기 위해.

대녀가 부채를 나붓나붓 부치며 말했다.

“네 할애비가 천박한 피를 가진 손주를 가문에 걸맞게 만들기 위해 더러운 뒷공작을 한 건 아닌 모양이야.”

“…….”

“네 온갖 공로는 네 할애비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있었거든.”

달리아는 깜짝 놀랐다.

‘뭐지? 대녀도 에릴로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에릴로트 아스트라의 앞에서 이렇게 무례한 사람은 없었다.

에릴로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할아버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행하였을 뿐입니다.”

“그래? 네 할애비가 너를 어찌 가르쳤더냐.”

대녀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등 뒤에 다른 소녀들을 가리켰다.

“나 또한 내 보석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야겠다.”

마사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비쥬다. 헤라 님께서 말씀하신 비쥬들이야!]

‘응, 그런 것 같네.’

대녀는 뛰어난 여성들을 아주 좋아해서, 아낌없이 지원했다.

대녀의 지원을 받으며, 한 달에 한 번 사저 후원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소녀들.

그들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소녀들로 이루어진 ‘비쥬’였다.

[와, 멋져. 원화 출신으로 이루어진 소녀들의 집단……!]

‘원화 출신만은 아니랬어. 빼어난 소녀라면 누구나 비쥬가 될 수 있다고 했잖아?’

달리아가 뚱한 얼굴로 생각했다.

[응, 응! 빼어난 소녀라면 다들 원화를 거쳐 가니까 대부분이 원화랬지.]

공작부인, 후작, 거상…… 심지어는 황비 중에도 비쥬 출신이 많다.

당대의 황비였던 오셀리아 황비와 병석에 누운 황후 역시 비쥬였다.

황족 부인 중엔 비쥬가 아니었던 자가 없을 정도였다.

마사는 화가 났던 것마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날 부른 걸 보면 역시 비쥬로 들이려는 걸까.’

주변이 모두 수군거렸는 걸.

귀족, 하녀, 심지어는 길거리에 호사가들도 그렇게 떠들었다.

대녀는 기품을 몹시 중시한다.

때문에 결코 ‘더러운 피’를 비쥬로 들이지 않는다.

“우리 아가씨께서 비쥬가 되시는 거겠지?”

“비쥬에 아스트라 공작가의 영양…… 적어도 황자비 자리는 약속받은 거나 다름없지.”

“뭐, 황태자비까진 어림없겠지만. 황태자비는 황후가 될 테니까.”

“그야 모르는 일 아니야? 에릴로트 아가씨의 친모는 확실히 이민족 노예였지만, 우리 아가씨의 친모께선 한미할 뿐 귀족이었다던 걸.”

“그런 소문이 있어? 어머, 얘. 차는 내가 내갈게. 미래의 황후 폐하께 잘 보여야 하니까.”

하녀들도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었다.

대녀가 에릴로트에게 물었다.

“자, 알려다오. 네 할애비의 가르침을.”

“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습니다. ……품위는 성품에서 나온다고 말이에요.”

“……!”

“……!!”

파티장이 크게 술렁였다.

저건 대녀를 비꼬는 말이었다.

품위를 중시한다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천박하기 그지없구나.

—그런 뜻이었다.

대녀의 표정이 굳자, 에릴로트는 미소 지었다.

“또, 할아버지께서는 다른 말씀도 하셨지요.”

“…….”

“상대는 너의 거울이다. 네가 상대를 하찮게 여긴다면, 상대 또한 너를 하찮게 여길 것이다.”

“……해서.”

“한데 의문입니다.”

“…….”

“저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 적이 없는데, 대녀님께선 어찌 저를 하찮게 여기십니까.”

“하.”

“저는 대녀님을 우습게 여긴 적이 없는데, 대녀님께선 어찌 우스운 말씀을 입에 담으십니까!”

마사는 눈을 홉떴다.

[대녀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이 태도는 뭐야?]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나 보지.’

[큰일을 하기 위해선 자존심을 꺾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인데. 이제 보니까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야.]

‘난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데…….

“하하하!”

대녀가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허리를 접으며 아주 유쾌한 얼굴로 웃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릴 생각조차 없이.

“즐겁구나. 아주 즐거워……!”

파티장의 모두가 대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달리아 또한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뭐, 뭐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비쥬 중 한 명인 지젤 유스로티아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아이, 보통이 아니라고 말이에요.”

“네 말이 실로 옳구나. 귀여운 나의 진주야.”

지젤이 대녀의 앞으로 나와 에릴로트에게 말했다.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말려무나. 대녀님께선 호승심 있는 아이를 좋아하시지.”

“익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용기를 귀히 여기신단다. 네 멋진 모습이 보고 싶어 부러 너희를 자극하신 것이다.”

“감히 대녀님의 뜻을 짐작하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잘했구나. 영리한 아이를 특히 아끼시거든.”

에릴로트가 생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젤이 쿡쿡 웃었다.

“같은 서군 출신의 원화로서 후배가 자랑스럽다.”

“내신 길을 따랐을 뿐이랍니다, 선배님.”

“어머나.”

지젤이 까르르 웃자, 다른 비쥬들도 몰려들었다.

“반가워. 몇 년 전 백합 정원 파티에서 보았지? 남군 원화 출신인 아살린이란다.”

“북군 원화 출신인 카티야 몬테규야. 너와 같은 기수의 북군 원화였던 벤야의 언니지.”

대녀가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나의 보석들이지. 자, 인사들 나누렴.”

파티장이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에릴로트를 중심으로.

달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달리아가 씩씩거리며 파티장을 나섰다.

[어디가! 왜 자꾸 멋대로 하는 거야! 비쥬들과 이야기를 나눠야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데 어떡해!”

사람이 없는 정원에 이르러 달리아는 소리쳤다.

“대학에서도 느꼈지만 학연, 지연이란 거 최악이야!”

같은 선생님에게 레슨 받은 애들끼리 뭉치고, 같은 지역 애들끼리 뭉쳤는데 여기도…….

마침 통신석이 울었다.

‘헤라잖아.’

달리아는 통신을 연결했다.

“으응, 헤라아…… 흑…….”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뭡니까!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메시아, 어째서 그리 슬픈 목소리이십니까.]

장막이었다.

‘여기서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이들뿐이야.’

달리아가 훌쩍훌쩍 울며 말했다.

“아무도 날 상대해주지 않아. 나, 난 사교계의 언어 같은 건 잘 모르니까 대화에 껴주지도 않고…… 온통 에릴로트만 끼고서…….”

[찢어죽일 것들이 감히 우리의 메시아에게…….]

특히 자신을 아끼는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짓씹듯 말했다.

그때, 헤라가 말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

[대녀의 측근으로부터 얻은 정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메시아.]

* * *

나는 씩 웃었다.

역시 다급해지면 남에게 매달릴 줄 알았다, 유세은.

‘넌 그런 애니까.’

그 정보, 내가 잘 써주지.

이 3세는 악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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