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하도 요란하게 싸우는 터라 주변에 사람들이 몰렸다.
가뜩이나 성은 무월기 제의 준비로 관료부터 일찍 도착한 국빈까지 가득한 상황.
와글와글 모인 사람들이 기함했다.
달리아가 당황해서 말했다.
“사, 살바토레 황자님, 그, 그만 하세요……!”
“알렉시스……황자님! 저쪽에서 그만두면 이쪽도 그만둬요!”
그러나 알렉시스와 살바토레의 싸움은 끝이 날 줄을 몰랐다.
……황제궁의 시종장이 올 때까지.
인파를 헤집고 시종장이 도착해서도 알렉시스와 살바토레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시종장이 크흠! 헛기침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알렉시스와 살바토레가 몸을 일으켰다.
살바토레는 손수건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 옆에서 달리아가 호들갑을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알렉시스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내가 얼른 먼지를 털어주었다.
시종장이 두 황자를 쳐다봤다.
“황제궁으로 두 분 황자님을 모시라는 명입니다.”
“…….”
“…….”
올 게 왔구만.
황제의 귀까지 소문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두 황자가 시종장을 따라 걸었다.
나와 달리아는 그런 황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란을 지켜본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당최 무슨 일이람…….”
“그러니까 두 분께서 아스트라 영애를 두고 싸우신 거지?”
“잠깐, 아스트라 영애가 어느 쪽이지?”
“어느 쪽이라니요? 당연히 한 분밖에 없지요.”
“아아, 달리아 아스트라 님이시로구만.”
“예?”
“그야 황비님께서 살바토레 황자님의 짝으로 달리아 님을 염두에 두고 계시고, 그 달리아 님께선 몽마의 안개에 갇혔을 때 알렉시스 황자님을 보셨다고 하니…….”
“쉿! 아니에요!”
“아니라고?”
“두 분은 서군 원화…… 아니지, 에릴로트 님을 사이에 두고 다투셨답니다.”
“그, 그래? 이거 참…….”
사람들이 달리아를 힐끗거리며 떠들었다.
달리아가 몽마의 안개 속에서 알렉시스를 본 게 일파만파 퍼진 모양이었다.
‘황비가 살바토레의 짝으로 달리아를 염두에 두었단 것도 다들 아는 듯하고.’
나만 무월기 제의 준비로 정신이 없던 터라 소식을 놓친 듯했다.
달리아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치맛자락을 비틀어 쥔 그 애가 나를 쏘아보았다.
“왜. 뭐.”
“두 황자님께서 이런 싸움을 하시게 만들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처신을 제대로 했으면……!”
나는 하하, 웃었다.
달리아가 울컥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웃기단 거야?”
“네가 처신을 운운하는 게 기가 막혀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도 잘했다고 생각해? 가문의 망신이야!”
“온 세상에 알렉시스 황자님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 너보단 나은 듯한데.”
“뭐, 뭐라고?!”
달리아는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갈 길을 갔다.
달리아는 황급히 나를 쫓아왔다.
“얘기 좀 해.”
“할 말 없어.”
“내가 있다잖아.”
“난 없으니까 시간 내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유혜민!”
“…….”
막 사람 없는 복도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달리아는 팔짱을 끼며 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잘도 날 속였더구나.”
“…….”
“언제부터 에릴로트 아스트라 행세를 했어? 아, 2년 전에 언니가 죽었을 때 그 몸에 들어간 건가?”
“…….”
“내가 유세은인 건 언제부터 알았어? 그때, 놀라지 않았잖아. 알고 있던 거지?”
바짝 다가온 달리아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그렇게 죽어버린 탓에 아빠와 엄마가, 할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한지 아냔 말이야.”
“…….”
“그런 짓을 하고도 여전히 뻔뻔하게 내 앞에서 고개를 들고, 온갖 방해를—!”
“내가 어떻게 죽었는데?”
“네가 보험을 모두 해지한 바람에……!”
“나는 너희 집 노예였는데, 노예는 목숨도 재산인 건데 돈 한 푼 안 남기고 죽어버린 게 분했어?”
달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그 시각, 황제궁.
황제는 도착한 두 아들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주먹질을 했는지 한 놈은 코피가 터진 듯했고, 한 놈은 주먹이 터졌다.
옷에 잔뜩 묻은 먼지하며, 헝클어진 머리하며…….
황태후는 황자들을 힐끗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오셀리아 황비는 불안한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말을 꺼낸 순간, 벼락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제 정신인 것이냐—!!”
시종은 물론, 황비와 황태후까지 고개를 수그렸다.
“황자라는 놈들이 그따위 짓을 벌여!”
오셀리아 황비가 흠칫, 살바토레에게 말했다.
“살바토레, 어서 벌을 청해라.”
황태후도 알렉시스에게 눈짓했다.
살바토레와 알렉시스가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반성합니다.”
황제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을.”
살바토레 황자가 말했다.
“황자로서 본이 되지 못하고 천박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국무로 노고가 깊으신 부황께 또 다른 근심이 되었으니 벌을 청합니다.”
“알렉시스는 무엇을 반성하느냐.”
알렉시스가 무감한 얼굴로 땅을 바라보았다.
“남몰래 패지 못하고, 대놓고 팬 것을 반성합니다.”
“……!”
“……!”
황제와 황비가 미간을 좁혔다.
살바토레는 헛웃음을 흘리며 알렉시스를 쳐다보았다.
황태후마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감히 짐의 앞에서 지껄이기에 적합한 말이라 여기느냐.”
“아닙니다.”
“한데!”
“거짓을 고해야 합니까.”
“……뭐라?”
“저는 살바토레와의 싸움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데 폐하의 앞에서만 그럴듯한 말을 한다면, 그건 기만이 아니겠습니까?”
“…….”
“저는 황실을 모릅니다. 폐하를 부친으로 대하여야 할지, 일국의 황제로 대하여야 할지조차 혼란스럽습니다.”
“…….”
“폐하를 단지 황제로 여겨야 한다면 신하 된 도리로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벌을 청할 것이고, 부친으로 여겨야 한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
“제가 무엇을 반성해야 합니까.”
황제는 알렉시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종들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또 한 번 노성이 터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가 황제의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오냐, 가르쳐주마.”
“예.”
“첫째, 너는 짐의 아들인 까닭에 더없이 고귀한 권리를 부여받았으나, 의무 또한 함께 짊어지게 되었느니라.”
“예.”
“백성의 본이 되어야 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하지.”
“그렇습니다.”
“형제간의 사소한 다툼조차 정쟁에 이용될 것이고, 무조건 너를 믿는 아버지가 없을 것이며, 너희의 모든 행동은 평가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예.”
“해서 짐은—.”
오셀리아 황비와 살바토레 황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제는 매우 다정한 표정이었다.
살바토레에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얼굴.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다정한 표정…….
살바토레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오셀리아 황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황태후가 목소리를 바짝 낮추어 속삭였다.
“표정을 풀게. 남들 보는 앞에서 그리 살의를 드러내서야 되겠나.”
“폐하께서 너무 하십니다. 살바토레에겐 엄하디엄하셨던 분이 어찌 알렉시스에겐…….”
“황궁에서 자라지 못한 황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자네가 자초한 상황일 텐데.”
알렉시스를 빼돌린 네가.
황태후의 말뜻을 알아들은 오셀리아 황비가 이를 악물었다.
황제가 이렇게나 혈육에게 시간을 오래 내어준 건 처음이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땐 해 질 무렵이었다.
알렉시스가 고개를 수그렸다.
“가르침을 혼에 새기고 명심하겠습니다.”
황제는 쿡쿡 웃었다.
“하면 이제 짐이 묻겠다. 솔직한 것은 성향이냐. 짐을 닮지는 않았구나.”
“…….”
“네 모후를 닮은 것이냐?”
“……에릴로트의 조언이었습니다.”
“뭐라?”
알렉시스는 황자가 된 날, 에릴로트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표정이 왜 그래. ……두려워?”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이제야 황자가 된 내가 태어나 줄곧 황자로 산 살바토레를 어떻게 대적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내가 모르는 것들이 화살이 되어 날 공격하게 될 테니까.”
“있지, 알렉시스. 모르겠으면 물어봐.”
에릴로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한 표정이었다.
“내 단점을 스스로 드러내라고?”
“그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일 수도 있어. 네 아버지는 평생을 황자로 살다 황제가 된 사람이야.”
“…….”
“가족조차 경쟁자였기에 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어.”
“…….”
“내 할아버지가, 또 아빠와 오라버니들이 남몰래 바랐던 것처럼.”
그 애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안해질 적엔 언제나 해답을 제시해주고, 흔들릴 때면 이정표가 되어준다.
자신의 손을 잡은 에릴로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 저는 모르겠어요. 부족하지만 가르쳐주시면 열심히 배울 거예요.”
“…….”
“노력하는 아들을 싫어하는 아버지는 없어.”
황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그랬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아,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짐은 일정이 있으니 이만 나가 보아라. 모후께선 남아주십시오.”
“예.”
황비와 살바토레, 알렉시스가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황비가 알렉시스를 쏘아보았다.
“아스트라의 물이 단단히 들었더구나. 세 치 혀 놀리는 법은 네 전 혼약자와 아주 비슷해.”
“칭찬으로 듣죠.”
“네 이놈……!”
분위기가 경직되었을 무렵이었다.
“황가에 광영이 있기를.”
그리미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엔 데이몬드가 함께였다.
데이몬드를 쏘아본 황비는 그리미에에게 생긋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공을 부르셨군요. 일전에 나눈 ‘그 일’ 건입니까?”
“글쎄요. 폐하의 의중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는지라.”
“여전히 진중하십니다. 살바토레,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뭐하니.”
황비는 벌써 그리미에와 사돈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살바토레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크루마투스 사태로 영영 폐하의 눈 밖에 났나 하였더니, 그는 아닌 모양이군요.”
“살바토레!”
황비가 당황해서 소리쳤지만, 살바토레는 그리미에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번엔 무엇으로 폐하를 붙잡아두셨습니까.”
“하하,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살바토레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됐든 좋습니다. 되도록 확실한 것을 폐하와의 거래 테이블에 올려두셨길 빌죠. ……일단은 한 배를 탔으니.”
살바토레는 그대로 그리미에와 데이몬드를 지나쳐 걸었다.
복도 끝을 향해 걷던 살바토레가 힐끗, 데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아스트라 적오기의 계승자께서도 알고 계십시오. 제 배엔 아직 공의 자리가 남았습니다.”
“저는 타인의 배에 탑승하지 않습니다. 제 배를 몰 뿐.”
“딸이나 부친이나 어렵긴 매한가지군요.”
살바토레가 차가운 눈으로 데이몬드를 바라보고 사라졌다.
데이몬드는 황제의 방에 들어갔고, 알렉시스는 황자궁을 향해 떠났다.
복도에 남은 황비가 아득, 이를 갈며 그리미에에게 말했다.
“공의 딸과 우리 황자의 혼사, 진행되겠습니까?”
“아스트라 가신들의 과반수가 동의했습니다.”
“공작은요?”
그리미에는 곤란한 듯 웃었다.
“공작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스스로 가문을 손아귀에 넣으셔야 할 겁니다.”
“사랑하는 딸의 혼사를 위해 애써 보겠습니다.”
황비가 우훗, 웃었다.
황비가 떠난 후 그리미에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 * *
달리아는 내 어깨를 퍽, 떠밀었다.
“네 잘못을 정말로 모르겠어?”
“그래.”
“네가 죽고 우리 가족은 지옥 속에서 사는 것 같았어.”
“…….”
“아빠와 엄마는 보험사에 소송을 걸었단 말이야. 네 사망 보험금 때문에!”
“그래서?”
“두 분은 일도 못하고 재판에만 매달렸어. 평범한 사람이 대기업과 소송하는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야 하는지 몰라?”
“알아야 해?”
“할머니는 집까지 팔았지만, 패소했다고. 결국 우린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이 되어서……!”
“그러니까 그게 왜 내 탓인데.”
달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보험 누가 들었어? 엄마잖아!”
“보험금을 낸 건 나지.”
“덕분에 네가 아플 땐 보험금을 잘도 타먹었으면서……!”
“내가 보험금을 냈으니까, 보험금을 받는 게 뭐가 잘못이지?”
“너, 정말 끝까지……!”
나도 달리아의 어깨를 퍽! 떠밀었다.
밀려난 달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너, 이게 무슨…….”
“왜? 또 네 아버지에게 이르려고? 아니면 할머니? 엄마?”
“너……!”
“어떡하지? 여긴 도와줄 네 아버지와 할머니가 없네.”
“야!”
달리아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유혜민일 땐 세은이 이렇게 나올 때면 항상 바짝 오그라들었다.
“왜? 겁먹지 않으니까 이상해?”
“네가 어떻게 나한테…….”
“난 항상 그 말이 이상했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라고? 왜? 난 그러면 안 돼?”
“…….”
“자매끼리 싸울 수 있잖아. 안 그래?”
“그건……!”
“네가 억지를 부리면 화를 낼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무슨 억지를 부렸다는 거야!”
“그런데 항상 난 너에게 죄인이어야 했어. 마치 노예처럼. 그게 가족이야?”
“…….”
“죽어가는 내게 잘해준 게 사망보험금 때문이었다는 사람들이 가족이냐고.”
“그 말 하나로 서운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날 괴롭히는 거냐고!”
“내가 널 괴롭혀?”
“속이고, 괴롭혔어.”
“속인 건 너지. 메시아는 나잖아—!”
내가 고함을 내지르자, 달리아가 뻣뻣하게 굳었다.
주변을 둘러본 그 애가 내 팔을 거칠게 잡고 기둥 뒤로 끌어당겼다.
“헛소리 하지마. 메시아는……!”
“그럼 지금 같이 수호자들에게 가자.”
달리아가 흠칫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