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달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야.’
마시타브바 동생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
다급한 마음에 손을 뻗었으나, 감히 상대를 잡지 못하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마치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처럼.
에릴로트는 무감한 표정이었다.
“장막은 예의 따윈 모르는 집단인가 보지. 방문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을 텐데.”
“메시……!”
당황한 마시타브바 동생이 소리치려 하자, 형 쪽이 가로막았다.
“밖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다.”
“…….”
마시타브바 동생은 굳은 얼굴로 에릴로트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입으로 직접 듣고자 합니다. 우리의 그분이 맞으십니까…….”
에릴로트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에릴로트 님!”
수호자들은 초조한 표정이었다.
파빌이 나섰다.
“부디 말씀해주십시오. 우리는 오래도록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대에도 그 분을……!”
“아니라고 하면 또 공격할 건가?”
“……!”
“내가 키운 군사들의 목숨을 빼앗고, 내 영역을 흙발로 짓밟겠어?”
수호자 중 가장 호쾌한 성격의 우르굴라마저 당황했다.
“그건 당신이 메시— 아니, ‘그 분’의 적인 줄로만 알고……!”
“해서 날 공격했지. 내 것을 빼앗고, 내 가족이 곤경에 빠질 일을 꾸몄잖아.”
“…….”
“…….”
수호자들의 표정이 흐려졌다.
헤라가 말했다.
“그리미에의 짓이었습니다. 그가 당신이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빼앗아 달리아에게 주었지요.”
마시타브바의 형도 동조했다.
“그는 ‘그 분’의 영혼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혼의 조각?”
“예, 어린 수호자들조차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지요. 달리아가 이 세상에 나타났을 적에 느꼈던 빛조차 ‘그 분’의 것이었습니다.”
“…….”
“오래도록 ‘그 분’을 기다렸던 우리 수호자가 어찌 달리아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수호자들이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예, 그러니까……!”
그들이 웅성거리자, 에릴로트는 하하 낮게 웃었다.
“그래서.”
“에릴로트 님, 저희는…….”
파빌이 다급히 입을 열자, 에릴로트가 수호자들을 빤히 보며 말했다.
“너희 사정이 그러했으니, 너희가 한 모든 일을 이해해야 한다는 건가?”
“…….”
“기르타브는 내가 고작 열 살 먹은 어린애였을 때 날 죽이려고 했어.”
기르타브가 엄청나게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그, 그, 그건 며, 명을, 명을 받아서……!”
“마시타브바들도 나와 내 군사들을 죽이려 했고.”
“…….”
“…….”
“그 외에도 수없이 나와 내 사람들을 노렸잖아.”
수호자들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픽 웃은 에릴로트가 수호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
“뭐든 하문하십시오.”
“내가 막 태어났을 때 말이야. 가호가 금제되었어. 덕분에 가문에서 완전히 외면받고 하루하루 살얼음판에서 살아야 했거든.”
“…….”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런 금술은 존재하지 않더라고. 이제 와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가호가 아니었을까 싶어.”
“…….”
“너희 중에 그런 가호를 쓸 수 있는 자가 있나?”
수호자들의 시선이 일시에 한 사람에게 몰렸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미중년이 흠칫, 고개를 수그렸다.
구안나.
최초의 구안나를 수호성으로 두고, 그의 가호인 <저주>를 사용하는 수호자였다.
“소, 송구, 송구합…….”
그가 새파래진 얼굴로 에릴로트의 시선을 피했다.
“최악이네.”
수호자들을 매섭게 노려본 에릴로트가 등을 돌렸다.
더는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마시타브바 동생이 다급히 에릴로트를 붙잡았다.
“사랑이었습니다.”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절박하게 매달렸다.
“모든 수호자는 영혼에 그분을 새기고 태어납니다.”
“이거 안 놔?”
“어릴 적엔 어머니와 같이 사랑하고, 자라선 첫사랑이 되며, 나이가 든 후엔 자식처럼 그 분을 사랑합니다.”
“허…….”
“세상의 모든 것인 그 분께서 바라신다면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이뤄드리는 것이 수호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달리아가 그분이라 믿었기에 아무리 지독한 명이라도 따를 수밖엔……!”
에릴로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희디희어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에 달빛이 닿아 부서졌다.
붉은 눈동자가 요요히 휘어진다.
젊은 수호자들이 혼을 빼앗긴 양 에릴로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랑이란 것 참 가볍구나.”
“무슨…….”
“‘그 분’인 줄 알고서 달리아를 그토록 사랑하다가, 이제 내가 ‘그 분’인 것 같으니 사랑하겠다?”
“저는…… 저희는…….”
“난 그렇게 가벼운 사랑은 필요 없어.”
수호자들은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그만해!”
달리아가 빽 소리치고 달려왔다.
마치 수호자들을 보호하듯 양팔을 펼치고, 에릴로트의 사이를 파고든 그녀가 울먹거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이건 또 뭐야.”
“왜 그렇게 못된 말로 상처를 줘? 실수였다잖아! 이렇게나 미안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따위로 말해! 넌 이해라는 감정이 없는 거야?!”
“번번이 살해하려던 게 어떻게 실수야!”
“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네가 알아?!”
에릴로트가 고함을 내질렀다.
차분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비통과 설움으로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태어나 줄곧 단 하루도 맘 편히 산 적이 없어—!”
“…….”
“그렇게 어린애가! 걷는 것도 겨우 하던 어린애가 늘 버려질까봐 벌벌 떨어야 했어!”
“…….”
“아무도 날 인정하지 않았고, 언제나 외면과 조롱을 받아야 했다고!”
“…….”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쳐서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이번엔 내가 애써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고, 몇 번이나 날 죽이려고 했단 말이야!”
“…….”
“어떻게 용서해!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하느냐고—!!”
수호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차마 에릴로트를 쳐다도 보지 못했다.
달리아는 울컥 인상을 쓰며, 에릴로트를 쏘아보았다.
“네 옹졸함을 잘 알겠어. 그래도 말조심 좀 해줄래? 내 수호자들을 더 상처 주지 마.”
“뭐라고?”
“네가 이렇게 상처 줄 거라면 내가 지키겠어! 이 사람들의 메시아는 나야! 그러니까 가버려!”
에릴로트가 지친 얼굴로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한숨을 흘린 에릴로트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좋아, 잘됐네.”
그렇게 말한 에릴로트가 다시 뒤를 돌았다.
그녀는 경비병에게 단단히 일렀다.
“저들이 찾아와도 더 이상 내게 알리지 마라. 행여나 문을 넘으려 든다면 친위대와 직속군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예, 아가씨.”
“예, 아가씨!”
경비병들이 단단히 문을 걸어 잠갔다.
수호자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에릴로트 님!”
“에릴로트 님, 제발 대화할 기회를 주십시오!”
“에릴로트 님—!”
그러나 문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달리아는 울먹울먹 마시타브바의 동생을 끌어안았다.
“이제 됐어. 제발 그만해…….”
그의 등에 얼굴은 묻은 달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너희의 메시아가 되어줄게…… 나는 너희를 이렇게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해…….”
마사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잘했어, 달리아!]
이렇게나 다정하게 보듬어준다면, 수호자들도 마음을 돌릴 것이다.
못되게 구는 메시아보다 다정한 메시아 쪽이 좋은 게 당연하니까.
달리아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혜민이 성질을 못 버리고 난리를 쳐서 다행이야.’
이제 수호자들도 자신과 에릴로트가 비교되겠지.
그런데 왜 말이 없을까.
‘하기는. 메시아의 힘이 아쉽기도 할 거야.’
“저기…… 아빠가 그러셨는데 내가 2차, 3차 개화를 하면 진짜 메시아만큼 강해질 거라고…… 컥!”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달리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언제부터 네가 가짜란 걸 알고 있었지?”
“마, 마시타, 브…… 끄윽……!”
“처음부터 우리를 속인 건가?”
“나, 난……!”
“에릴로트 님이 그 분이란 걸 알고 줄곧 죽일 기회를 엿봤던 거냐?”
“마시…… 마시타…… 커헉!”
“묻잖아—!!”
그때였다.
쉭!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화살이 마시타브바 동생의 손목을 스치고 철문에 박혔다.
“달리아 님을 지켜라!”
달리아를 쫓아온 아일라와 그리미에의 수하들이었다.
수하들이 재규어처럼 두 팔과 다리로 달려 마시타브바 동생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
마시타브바 동생이 달리아를 놓치자, 아일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호를 발동했다.
그리미에가 준 새로운 가호인 <염동력>.
달리아는 그대로 허공을 부유해서 아일라 쪽으로 끌려왔다.
“달리아 님!”
“헉…… 허억……!”
달리아는 목을 잡고 신음했다.
그러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시타브바의 동생을 쳐다보았다.
“어째서…… 왜 내게 이런 짓을…….”
“넌 ‘그 분’이 아니야—!”
마시타브바 동생은 그리미에의 수하들에게 붙들려서도 고함을 내질렀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속여왔던 너희 부녀를! 우리의 손으로 그 분을 해하라 명했던 네 아비를……!”
마시타브바 형제의 온몸에서 거친 기운이 일렁였다.
파빌이 재빨리 우르굴라와 헤라에게 소리쳤다.
“막아! 그 분의 저택 앞에서 소란을 벌일 순 없다!”
찾아올 수 있던 건, 사람들의 관심이 황궁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미에의 공격으로 쓰러진 황제가 눈을 뜨지 못했다.
가뜩이나 연약해진 몸으로 공격을 받은 데다, 오염된 마력이 온몸에 번졌을 터.
무월기 중계로 인해 황제가 쓰러진 장면이 온 대륙에 퍼졌다.
나라의 우두머리가 없는 지금이 공격의 적기.
타국의 공격이나, 황위 다툼에 대비해 웬만한 귀족들은 모두 중앙탑에 모여있다.
‘하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관심은 다시 에릴로트 님께 쏠릴 것이다.’
신을 현현시킨 성녀.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이 대상이 될 터.
저택 밖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면, 욕심 많은 귀족 놈들이 얘기를 어디까지 비약할지 모른다.
‘지키기 위해 황궁에 구금해야 한다’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황제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섭정하게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살바토레는 더더욱…….’
파빌이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은 물러난다.”
“하지만……!”
“어서 움직여!”
수호자들이 모이자, <이동>의 가호를 가진 수호자 아브신이 모두를 이동시켰다.
그제야 달리아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럴 리 없는데……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마사도 당황해서 동동거렸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도 에릴로트의 편을 드는 거야? 응? 대체 왜!]
‘에릴로트가 무슨 짓을 한 걸 거야.’
[응?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메시아니까 특별한 힘이 있나 보지?]
달리아의 두 뺨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아스트라 백작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 수치, 결코 잊지 않을 거야……!’
생각하면서.
* * *
무월기의 제가 지나고 닷새.
저택 밖이 북적였다.
하이디와 베티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를 뵙게 해달라고 아우성이에요.”
“그저께부턴 황제 폐하를 치료해달라는 자들까지 찾아왔답니다.”
정말로 밖은 북새통이었다.
“성녀님!”
“우리의 성녀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성녀님, 얼굴을 비춰주십시오! 신성한 모습을 드러내 축복해주십시오!”
제국 전역에서 찾아온 백성들로 난리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저, 아가씨, 고날롱 부인께서 제발 좀 만나달라며 뒷문으로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슈엘리즈 왕국에서 초청을 청하는 편지가……!”
“아, 아가씨, 황소입니다. 팔라사의 왕비께서 황소 떼를 보내셔서……!”
나는 책을 탁, 덮으며 일어났다.
고용인들은 슬픈 얼굴로 날 쳐다봤다.
“온갖 나라와 가문에서 선물이 도착한 터라 이제 걷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창고에 선물이 다 들어가지도 않아서 방이며 복도에도 선물 상자 천지였다.
상자마다 삐져나올 정도로 보석이며, 장신구, 특산물이 가득했다.
‘세일론은 왜 현신까지 해서!’
돌아오는 거로 충분했는데.
“안 받아. 전부 정중히 돌려보내.”
양피지를 정신없이 옮기던 베티가 흠칫했다.
“거절의 편지를 더 써야 하나요……?”
그러곤 안쓰러운 얼굴로 책상에 앉아 며칠째 밤새 거절의 편지를 쓰고 있는 잔느를 쳐다봤다.
잔느는 두 뺨이 쏙 들어가서 시름시름 웃었다.
“베티, 양피지를 190장 정도 더 가져다주겠어요?”
“……잔느, 많이 힘들어?”
“힘들긴요. 하하하하.”
“콘라드와 미켈란을 불러올까?”
“두 분도 사흘째 편지를 쓰고 계십니다…….”
잔느가 만년필 끝으로 방 밖을 가리켰다.
복도로 나가보니 문이 열려 있는 방으로 양피지를 든 하인들이 쫑쫑쫑쫑 들어가고 있었다.
“뭐? 인원이 추가돼? 얼마나…… 뭐?! 앞으로 90장?!”
“잠깐, 안약만 넣겠네.”
콘라드는 경악했고, 미켈란은 시름시름 말하고 있었다.
‘타 대륙에서도 보내오는 통에…….’
선물을 돌려보내는 것이라 최대한 정중하게 편지를 써야 한다.
인사말부터 시작해서, 귀댁을 익히 들었고, 조상이 어떤 일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어 매우 관심이 많았으며, 이런 선물을 보내주다니 매우 감사, 선물이 이러하다고 들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받을 수 없게 되어서 유감이고, 하지만 너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데…… 등등.
위의 얘기를 구구절절 쓰려면 적어도 서너 장은 편지를 써야 했다.
‘행정관들의 도움도 받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으악!”
내 방으로 들어오던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나 돌려보냈는데 선물이 더 늘었잖아?”
“오빠도 편지를 같이 써주겠어……?”
내가 양피지와 만년필을 들며 울적하게 말하자, 뒤따라 들어오던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쿡쿡 웃었다.
“발자크는 글 쓰는 데엔 젬병이니 내가 도울까.”
“나도 도울게, 에릴로트.”
“고마워…… 그보다 무슨 일이야?”
발자크가 발끝으로 선물 상자를 밀며 말했다.
“황궁에서 호출이다.”
“……호출?”
“황제가 여전히 눈을 못 떠서 섭정이 결정되었거든.”
“그런데 왜 나를 호출해?”
세 오라버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뭐지?’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