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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322화 (323/390)

322화.

그럴 가능성이 높다.

‘헤라 레비쟈도 장막이었어.’

수호자들과 함께 찾아왔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레비쟈 님이 어째서 마시타브바들과…….”

“저 또한 수호자입니다.”

“뭐라고요?”

“당신께 이렇게 정체를 밝히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장막은 생각보다 더 제국 곳곳에 퍼져 있었다.

‘알아봐야겠어.’

메시아인 게 밝혀진다면 달리아의 말처럼 난 전 세계 모든 권력자의 적이 된다.

“저어, 아가씨…….”

베티가 눈을 끔뻑이며 날 쳐다봤다.

“응?”

“꽃…… 다시 드릴까요?”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꽃다발을 쳐다봤다.

“아니.”

통제를 위해선 장막을 속속들이 알 필요가 있지만, 여전히 꼴도 보기 싫었다.

* * *

제국이 들썩였다.

황제의 혼절.

성녀의 등장.

섭정의 결정.

하나 같이 엄청난 변화를 만들 일이었다.

칼소이에 제국을 넘어 대륙, 아니, 세계 전체에 영향이 갈 사건들.

그래서인지 제국을 찾는 국빈들이 많았다.

“알리기오사의 왕세손께서 드십니다!”

“슈엘리즈 왕국, 체자레 왕자님의 행렬입니다.”

“라온트라의 메르세데스 황자님, 벨로스터 궁주님 드십니다.”

“저먼 왕국, 크리스토퍼 왕세손의 마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주 엄청나게.

나는 내궁의 커다란 창 앞에 서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태양회의 황·왕자님들께선 전부 오신 듯 한데요.”

테이블에서 서류를 들추던 세바스티아 언니가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매년 태양회에 가는 것도 X같은데, 황궁에서까지 보다니 더욱 X같구나.”

중앙군 상장군이 크허험! 헛기침했다.

“원화, 부디 품위를 갖추십시오. 국빈의 앞에서 실수라도 했다간 목이 날아갈 것입니다.”

“제발 좀 날아갔으면 좋겠어, 니미럴.”

“원화…….”

“몇 번째 복귀인지 알아? 이제 제발 나도 좀 쉬자고!”

세바스티아 언니는 급하게 다시 중앙 원화로 복귀했다.

황제가 쓰러졌는데 아직 중앙 원화가 결정 나지 않았던 상황.

가뜩이나 급해 죽겠는데, 아래에서 승진시킬 원화는 없었다.

결국 대장군이 직접 찾아가 세바스티아 언니를 복귀시켰단다.

내가 키득키득 웃자, 언니가 음울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이게 웃겨? 아니, 이건 슬픈 일이란다. 시집갈 시간이 안 난다고.”

“가고 싶으세요?”

언니는 불꽃 같은 비혼주의가 아니었나?

세바스티아 언니가 만년필을 탁, 놓으며 말했다.

“이게 다 X같은 가문의 관례 때문이지.”

“비페리 가문의 X같은 관례요?”

“크흐흐흠! 커흠! X같다는 말은 좀…….”

중앙군 상장군이 헛기침을 하다가 성대가 갈릴 것 같거나 말거나, 언니는 말을 이었다.

“미혼은 대회의에 들어갈 수 없는 관례가 있어. 아주 X같지.”

“그러네요. X같이 그지없는 관례예요.”

“커허허험! 커헉! 크헉, 콜록, 콜록!”

“대회의에 들어가야 후계자 결정이 되든가 말든가 하지. 빌어먹을.”

세바스티아 언니는 칫, 혀를 차다가 중앙군 상장군을 쳐다봤다.

“이봐.”

“예, 원화…….”

상장군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세바스티아 언니를 쳐다봤다.

“다음 주에 뭐해?”

“뭐, 국빈 호위를 하겠지요. 어찌 물으십니까.”

“시간 나면 혼인 신고 좀 하자고.”

“예?!”

상장군은 눈알이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잘못 들은 것처럼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곧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무, 무, 무, 무슨, 대, 대체, 뭐, 뭐라고 하신……!”

“이름만 좀 빌려줘 봐.”

“놀리지 마십시오—!”

그가 버럭 소리치고, 새빨개진 얼굴로 방을 나섰다.

세바스티아 언니는 픽, 실소를 흘렸다.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아쉬운 대로 저걸 매력이라고 생각해봐?”

난 쿡쿡 웃었다.

“그만 좀 놀리세요.”

“아쉬운 건 정말이야.”

언니가 으쓱했다. 그러더니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걸쳤다.

“넌?”

“저요?”

“슬슬 결혼할 시기잖아? 네 사촌들도 슬슬 결혼하고 있고.”

“뭐…….”

“살바토레가 제안했을 때 덥석 물지 그래?”

“…….”

언니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봬도 빠지는 게 없잖아. 외모도 훌륭하고, 능력이 없지도 않고. 이대로 황제 폐하께서 눈뜨지 못하신다면 황제가 될 거야.”

“그럴까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국빈들이 몸소 오셔서 제국의 미래를 확인하시려는 걸 테고?”

그랬다.

국빈들이 제국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살바토레였다.

황제가 될 그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세바스티아 언니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의자매로서 조언 하나 하자면…… 알렉시스 황자님은 포기해.”

“네?”

“섭정이 결정된 시점에서 살바토레가 이긴 거야. 이대로 알렉시스 황자님을 고집한다면 너도, 아스트라도 위험해질걸.”

“뭐, 무슨, 아니, 여기서 왜 알렉시스가…… 나와요!”

버럭 소리치다가 음 이탈이 나버렸다.

얼굴이 뜨거워서 홱, 고개를 돌리니 세바스티아 언니가 킬킬 웃었다.

“귀엽기는 내 상장군보다 네가 더 귀엽구만.”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 모르겠지만, 저는……!”

“네 말투가 그렇게까지 이상해진 것 보면 오해가 아닌 것 같은걸.”

할 말이 없어져서 난 마른침만 삼켰다.

키득키득 웃던 세바스티아 언니가 곧 표정을 바꿨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알렉시스 황자님과 네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

“널 사이에 두고 살바토레와 주먹다짐까지 하셨다는 얘기는 저 산골짝 나무꾼도 알 거다.”

“…….”

“그러니까 포기해. 살바토레가 아니라면, 차라리 다른 남자를 선택해야 해.”

“살바토레가 알렉시스 황자님을 견제하기 위해 저를 공격할 테니까요?”

“그래.”

“황제 폐하께서 깨어나신다면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어요.”

세바스티아 언니가 하하 웃었다.

“왜 순진한 소리를 하고 그래?”

“…….”

“알잖아. 살바토레가 섭정이 된 순간, 황제 폐하께선 끝난 거야.”

“…….”

“내가 살바토레라도 황제 폐하를 살려두지 않을걸.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랬다.

황제는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아니, 이제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살바토레는 결코 황제가 깨어나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

세바스티아 언니가 다시 턱을 괴며 말했다.

“알렉시스 황자님이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이지. 라온트라의 황족이 결혼해주는 것.”

“네?”

내가 눈을 깜빡이자, 세바스티아 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몰랐어?”

“뭐가요?”

“네 사촌, 그러니까 달리아 말이야.”

“네.”

“모친이 라온트라의 황족이라던데?”

“……네?!”

“그래서 황비님이 살바토레와의 결혼을 그렇게나 추진하셨던 거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마리, 마사 자매의 모친은 평민이다.

그러니까 그리미에가 사들여서 남몰래 실험을 한 게 아닌가.

‘라온트라의 황족이었으면 그런 끔찍한 실험을 할 수 있었겠냐고!’

나는 굳은 얼굴로 세바스티아 언니를 쳐다봤다.

“그 얘기, 확실해요?”

“황비님을 호위하는 백기사에게 들은 거야. 중앙군 출신이거든.”

나는 기함했다.

“언니, 전 가봐야겠어요.”

“밖에 나가면 국빈들에게 붙잡힐 것 같다며? 그래서 내 집무실에 숨어있던 거 아니었어?”

“가볼 일이 생겼어요.”

“뭐, 그래.”

나는 인사한 후, 세바스티아의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나서자 황궁에 데려온 한지혁과 콘라드가 따라붙었다.

나는 그들을 이끌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미켈란의 연인이었던 선황비의 묘가 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멈춰선 난 콘라드와 한지혁을 돌아보았다.

“달리아가 동제국 황족의 딸이란 소리가 무슨 말이야.”

“……예?”

“그게 무슨…….”

콘라드와 한지혁이 당황했다.

“어째서 내게 소식이 들어오지 않은 건지 묻는 것이다. 콘라드 마르시알, 한 지헤크!”

벼락같은 노성을 내지르자, 두 사람이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즉시 확인하겠습니다.”

달리아의 일을 떠드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최상층의 권력가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최상층의 권력가엔 데이몬드 관할령도 속해 있다.

아빠는 아스트라 적오기의 계승자니까.

‘그런데도 소식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 하나지.’

난 그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우리 정보 체계에 문제가 생긴 거야. 어디서 잘못됐는지, 소식을 막은 놈이 누군지 당장 알아내라.”

“예.”

“예.”

두 사람이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 * *

달리아의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다.

이제 내가 성녀라거나, 살바토레의 섭정보다도 그 얘기가 최대의 화제였다.

사람이 둘만 모여도 난리였으니까.

“대체 모친이 어떻게 황족이란 거예요? 라온트라의 황족 여성은 없잖아요.”

“하나 있긴 하잖아요. 벨로스터 궁주 말이에요.

……이렇게.

알렉시스.

달리아.

벨로스터 궁주.

이 셋의 이야기가 안 들리는 날이 없었다.

벨로스터 궁주는 천민 하녀의 딸이다.

동제국 라온트라는 아직까지도 노예 제도가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부모의 한쪽이라도 천민이면, 자식의 신분도 천민이 된다.

벨로스터 궁주는 황제가 아버지라도 천민에게서 태어났으니, 엄밀히 따지면 천민이었다.

그런 이유로 ‘황녀’가 되지 못하기에, 부친인 황제가 궁을 내려 ‘궁주’의 칭호를 준 것이다.

시녀들마저 목소리를 바짝 낮춘 채 수군거렸다.

“벨로스터 궁주는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했잖아요?”

“하지만 황제가 아끼는 자식인 건 맞지. 달리아가 궁주의 딸이라면 라온트라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 제국에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속닥거리던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알렉시스와 내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아, 성녀님…… 신분 때문에 알렉시스 황자님을 잡을 수 없으신 거구나…….”

“신의 선택을 받았지만, 반쪽 평민이니…….”

“역시 인세에선 신분인 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무감한 표정으로 걸었다.

콘라드가 매섭게 궁인들을 쏘아보았다.

그제야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콘라드의 말에 나는 흘낏 그를 쳐다보았다.

“뭐가?”

“그게…….”

“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거?”

“…….”

“됐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첫 번째 삶에서 하도 동정을 사고 다닌 터라, 별 감흥도 없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이런 일은 동정에서 비난이 되는데.’

알렉시스가 달리아를 받아주지 않으면, 화살은 내게 쏠릴 것이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그렇지, 알렉시스가 죽을 수도 있는데 놔주지 않는 거냐고.

‘악역이 생기면, 상대는 선한 역이 되지.’

달리아가 ‘알렉시스를 사랑하기에 그가 사촌 언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도 결혼해주려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될 거다.

이제 비련의 여주인공이 달리아가 되는 것이다.

‘겨우 여론을 내 편으로 만들어놨는데 곤란해.’

나는 콘라드에게 속삭였다.

“그보다 정보 체계의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놨어?”

“예. ……장막이었습니다.”

“장막?”

걸음을 멈추니, 콘라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조 조장들 몇의 가족이나 연인을 인질로 잡았던 모양입니다.”

그때였다.

“에릴로트 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순간 절대 듣기 싫은 목소리가.

‘제르모 공작이로군.’

그 옆엔 헤라가 있었다.

둘 다 수호자들이었다.

……내 정보 체계를 엉망으로 만든 주범들.

난 싸늘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헤라가 급히 말했다.

“소식 들었습니다. 정보 조직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말입니다.”

“역시 정보는 빠르고 염치는 없네.”

“…….”

“내 정보조직을 망가뜨린 놈들이 당당하기도 해.”

“무월기의 제 이후로 즉시 인질을 풀어주었습니다. 한데 조장들이 겁을 먹은 터라…….”

“그렇겠지. 인질을 잡혀서 감히 주인에게 가야 할 정보를 차단했는데. 변절한 것이니, 두려울 수밖에.”

“…….”

나는 희게 질린 얼굴의 제르모 공작과 헤라를 노려보았다.

“나라도 조장들처럼 생각할 거야. ‘어차피 걸리면 죽는 거 또 변절하자’라고.”

“……저희가 손을 뗀 후에 그리미에가 다시 차단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나는 잔뜩 짜증 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그리고 콘라드를 쳐다보았다.

“조장들부터 갈아치워.”

“예.”

“다시 체계를 잡아두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콘라드가 움찔, 불안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당연히 줄 거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닷새보다 더?”

“……닷새는 심하지요. 공작님도 저를 이렇게 굴리시진 않았습니다.”

콘라드가 침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에헤헤 웃으며 콘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항상 고맙게 생각해.”

“……예.”

“진짜야. 난 콘라드 없이 못 산다니까?”

“압니다…….”

화기애애 떠나는 내 그림자로 수호자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 * *

어둠 속에서 마시타브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라가 에릴로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왜 저 분의 앞에 나서진 않고 숨어있는 것이냐.”

“……날 보면 싫어하실 테니까.”

마시타브바 동생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헤라가 픽 웃으며 실소를 흘렸다.

“그렇기야 하지.”

수호자 모두가 에릴로트의 곁에서 하하, 다정하게 웃고 있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헤라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자리에 우리가 있었어야 했어.”

“…….”

“…….”

“…….”

마시타브바들과 제르모 공작의 시선이 짙어졌다.

질투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녀를 보좌하고, 그녀의 앞을 막는 덤불을 치우는 건 자신들의 역할이었다.

제르모 공작이 말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무엇이 말입니까.”

마시타브바의 형이 묻자, 제르모 공작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릴로트 님의 모친, 우리가 찾는다.”

완벽하게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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