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결국 벨로스터 궁주가 명을 거두는 일은 없었다.
기어이 데본 숙부가 끌려 나갔다.
나는 벨로스터 궁주를 노려보았다.
“소녀야, 너는 눈빛마저 무례하구나.”
그 말에 아빠의 아카데미 동기 중 한 사람인 레오 탈로프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데본 숙부를 쫓아 회장을 달려 나갔다.
굳은 얼굴로 벨로스터 궁주를 쳐다보던 아빠도 이내 회장을 나섰다.
나는 벨로스터 궁주에게 말했다.
“부친과 그 지기들의 오해를 사과드립니다.”
벨로스터 궁주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난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오해였지요?”
“그래.”
“예, 벨트리 님께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지기에게 결코 이런 짓을 하실 리 없을 텐데요.”
“…….”
벨로스터 궁주는 나를 말없이 쳐다봤고, 나는 “그럼 이만.” 말하곤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등 뒤로 달리아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주님, 저희는 이제 그만 자리에 앉아요. 네?”
“그래.”
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회장을 나선 난 즉시 데본 숙부를 쫓아갔다.
‘외궁엔 옥사가 없으니 내궁일 거야.’
아니나 다를까, 내궁 옥사 앞엔 레오 탈로프가 경비병들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말 몇 마디 나눈다지 않아!”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섭정 황자께서 아시면 공께서도 곤욕을 치르실 겁니다.”
“이 자가……!”
레오 탈로프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내가 끼어들었다.
귀걸이의 한쪽을 떼서 경비병에게 건넨 것이다.
순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귀걸이를 받아든 경비병이 커흠! 헛기침했다.
“시간을 오래 드릴 순 없습니다.”
경비병 둘이 히죽히죽 웃으며 물러났다.
데본 숙부가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 어찌 황군에게 뇌물을……!”
“그게 중요한가요?”
“섭정 황자의 손에 의해 곧 피바람이 불 것이다. 조그만 틈이라도 주면 곧장 파고들 텐데, 어찌 이런 상황에서 뇌물을……!”
“아시는 분이 그러셨어요!”
“…….”
“아시는 분들께서 벨로스터 궁주에게 틈을 보이셨느냔 말이에요!”
내가 버럭 소리치자 데본 숙부와 레오 탈로프, 그리고 아빠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벨트리 님이 그리웠다고 해도 라온트라 궁주의 신분으로 온 사람에게 왜……!”
사실은 알고 있다.
이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소리쳤는지.
‘나라도 죽었다고 생각한 한지혁이 동제국 황자로 돌아오면 그렇게 했겠지.’
한지혁이 무례를 핑계로 옥사에 가둘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야.
아빠와 숙부들에게 벨트리는 나한테 한지혁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알렉시스 같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
알지만, 상황이 답답해서 자꾸만 화가 났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살바토레는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
“황제의 눈으로 불리던 데본 숙부를 없애려 들 거란 말이에요! 그래야 황제가 깨어나도 수족이 다 잘려 나가서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채로 말했다.
“황태후 폐하께 가야…… 아냐, 그 분은 알렉시스를 지키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럼, 그러면…….”
“에릴로트.”
“할아버지에게…… 으, 그것도 곤란해. 이런 상황에서 아스트라가 나서면 살바토레를 적대한다고 공표하는 것이나 마찬—”
“에릴로트!”
아빠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흠칫, 아빠를 쳐다보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라. 상황은 우리가 수습할 것이다.”
“하지만…….”
“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아니에요.”
“하면 어찌 이리 불안해하지?”
“…….”
“왜 그리 흥분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
“…….”
“너도 벨트리를 만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냐.”
“…….”
아빠는 벨로스터 궁주를 ‘벨트리’라고 불렀다.
그녀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빠의 말을 정정해주지 못했다.
나 또한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그녀야.’
그녀가 벨트리야.
……내 어머니인 거야.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벨트리 님이 어째서 우리를 적대하시는 거죠?”
“모르겠구나.”
데본 숙부와 레오 탈로프도 말이 없었다.
아빠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무언가 이유는 있겠지. 처음부터 속내를 숨기고 있었든,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든…… 달리아처럼 혼이 바뀌었든.”
“……!”
“다만 확실한 건, 그녀는 결코 우리의 협력자가 아니란 것이다.”
“…….”
“돌아가라, 에릴로트. 우린 그렇지 않아도 괴로울 네게 더 큰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네…….”
가슴이 갑갑했다.
* * *
만찬이 끝난 후.
태양회는 함께 귀빈실로 이동했다.
“술이나 한 잔 더 할까. 소란스러워서 술맛도 제대로 못 느꼈다고.”
크리스토퍼의 말에 다른 왕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살바토레 녀석, 기세등등한 꼴이 역겨워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아딘 왕자가 칫, 혀를 차며 말하자 체자레가 대답했다.
"좋은 술을 가지고 왔어~.”
“기왕 마실 거면 에릴로트도 부를까!”
아비노 왕손이 쾌활하게 묻자, 다른 왕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메르세데스, 네 녀석의 방에서 마시는 게—”
“난 됐어.”
메르세데스 황자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있던 아딘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놈이 술 마실 정신이나 있겠냐.”
그때였다.
“메르세데스.”
등 뒤로 벨로스터 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로스터 궁주의 뒤에선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양회의 사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가 매서운 표정으로 벨로스터 궁주를 바라보았다.
“서제국 관료의 무례를 지적하던 것이 우습군요. 우리 라온트라엔 황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예 따윈 없을 텐데요, 궁주.”
벨로스터 궁주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메르세데스.”
“그 이상의 무례를 허락하지 않을—!”
“본국에서의 소식이란다. 네 모후께서 의식을 회복하셨다는 이야기다.”
메르세데스가 흠칫하자, 벨로스터 궁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참으로 다행이지. 하지만 더는 아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음식을 함부로 드시는 일’이 없어야 할 터.”
“잘도…….”
메르세데스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모후의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이 네 년인 걸 모를 성싶으냐.”
쿡쿡 웃은 벨로스터 궁주가 메르세데스의 뺨을 다정한 척 쓰다듬었다.
그녀는 힐끗, 태양회의 왕족들을 쳐다보곤 목소리를 죽였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지.”
“뭐?”
“미친 노예 계집이 또다시 돌아버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니.”
“너……!”
메르세데스에게 바짝 다가간 궁주가 속삭였다.
“그러니 아가야, 너는 내 부탁을 필히 들어주어야 할 것이야.”
그렇게 속삭인 궁주가 메르세데스를 스쳐 지나갔다.
태양회의 왕족들이 궁주를 힐끔거리며 메르세데스에게 다가갔다.
“뭐야?”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 있냐, 응?”
메르세데스는 태양회 왕족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곤 이를 악문 채로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졌다.
달리아는 걸으면서도 자꾸만 태양회의 사내들이 있던 자리를 힐끗거렸다.
“저기, 궁주님. 저 분들이 태양회지요? 이 대륙에서 영향력이 높은 나라의 왕자님들로 구성된…… 그치요?”
“그래.”
“와아! 저 태양회를 알아요. 소설에서 읽었거든요. 실제로 보니까 엄청 신기해요.”
“그래, 네 세계에서 우리 세계의 일을 소설로 보았다고 했지.”
“네!”
“일의 정확도는 얼마나 되는 것이냐.”
“정확도요? 으음, 대체로 맞는 것 같은데…….”
벨로스터 궁주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스트라가 무너지는 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이냐?”
“그럴걸요? 그런데 그게 왜요?”
문을 닫고 들어온 달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궁주를 쳐다보았다.
궁주는 테이블 앞에 서서 무언가를 가만히 매만지고 있었다.
“……하루빨리 무너져야 할 것인데.”
달리아는 움찔, 어깨를 끌어모았다.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벨로스터 궁주의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더 빠르고, 처절하게.”
그녀가 무언가를 꽉 그러쥐었다.
* * *
일주일 후.
아빠는 데본 숙부를 구해내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진행 소식을 확인하고 온 한지혁이 “크!” 탄성을 흘리며 떠들었다.
“하여간 네 잔머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네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거지!”
“요점만 말해. 요점만.”
“데본 로체 후작의 일을 ‘서제국과 동제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만들었다, 이거지!”
“칼소이에 제국이 자존심 때문에라도 로체 후작을 어쩔 수 없도록 말이지…….”
“그래. 여기서 궁주가 원하는 대로 로체 후작을 처리해봐라. 칼소이에 제국이 라온트라에 고개를 숙이는 거라고 난리일 것 아냐!”
다행이다.
‘시간을 벌었어.’
이제 살바토레는 귀족들 눈치 때문에 쉽게 데본 숙부를 처리할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어디가?”
“알렉시스를 만나러. 데본 숙부 일에 도움을 받고, 숙부 측 귀족들을 알렉시스 휘하에 넣을 거야.”
“윈윈이로구만. 마차 준비할까?”
“아니, 남들 눈에 안 띄게 움직여야 해.”
내가 대놓고 알렉시스를 만나면 호사가들이 신이 나서 떠들 거다.
역시 에릴로트는 살바토레가 아니라 알렉시스를 선택할 거라고.
살바토레의 자존심이 무참히 뭉개지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한지혁이 외투를 걸치고 있는 내게 말했다.
“그럼 이동의 가호석을 가져올게.”
“국빈들이 와있어서 이동의 가호석은 사용 금지잖아.”
“아, 살수가 숨어들 수 있다고. 그럼 어쩌게?”
“걸어서 다녀와야지.”
“호위는 필요 없지?”
“응, 몬스터들을 데려갈 거야.”
나는 발밑의 그림자를 툭 쳤다.
옴브레가 뿅 튀어나와 입을 쩍 벌렸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변해있던 크림슨 구울, 아웬이 옴브레의 입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주변 경계를 확실히 해줘.”
“그러지.”
아웬이 대답하며 옴브레의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나는 곧장 저택의 뒷문을 통해 나섰다.
‘느티나무 숲으로 가야 해.’
알렉시스는 매주 주말 전 3시 무렵 느티나무 숲에 들른다.
그리고 난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시간을 노려 느티나무 숲으로 가기로 했다.
느티나무 숲은 종종걸음으로 한 시간쯤 걸린다.
‘아이고, 죽겠네.’
나는 손등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10분쯤인가.”
회중시계를 확인하니, 딱 맞춰서 알렉시스가 오겠다.
[좀 더 빨리 걷지 그래?]
아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대로 가도 늦지 않을 텐데?’
[살수들이 널 추적 중이기 때문이다.]
……뭐?
나는 흠칫, 굳어졌다.
“그글 으 으즈 믈해. (그걸 왜 이제 말해.)”
행여나 살수들에게 들릴까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아웬이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저번 주부터 계속 쫓아왔지만, 공격하진 않았지. 기척을 보면 교육받은 살수인데도 말이야.]
‘그건 왜 또 이제 말해!’
[안 물어보지 않았나? 경계하라고 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이게 진짜!’
나는 내 그림자를 노려봤다.
‘너, 책을 사달라던 걸 무시했다고 그러는 거지?’
[고작 세 권도 사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주인인 줄은 몰랐지.]
‘웬만한 것이어야 사주지! 크로노트 회의 정보가 적힌 책은 금서거든?’
[어쨌든 달리지 그래. 오늘은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거든.]
이게 진짜.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었을 때의 아웬은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린다.
난 허겁지겁 달리면서 생각했다.
‘이제부터 줄어드는 건 금지야!’
[어째서? 이쪽이 마력 소모가 훨씬 덜 드니 효율적인데.]
‘네가 다 읽은 책을 불태워줄까. 공간을 효율적으로 써야지. 응?’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는 아웬과 투닥거리면서 재빨리 달렸다.
그런데.
“징검다리가 끊겼잖아…….”
느티나무 숲으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끊겨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저들 짓이다.’
살수들이 날 몰아가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처리할까?]
‘그래. 지금…… 헉!’
옴브레가 그림자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때, 나는 얼른 소리쳤다.
“하지 마!”
[뭐야, 왜!]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서 신석이 느껴진다.
신석의 이명은 ‘대 마물용 결계’.
나는 얼른 발로 낙엽이 떨어진 곳을 헤집었다.
“신석 투성이…….”
이 정도 깔아놨으면, 아웬은 현신하자마자 당할 것이다.
‘대체 얼마나 깔아둔 거야.’
신석은 기절할 만큼 고가의 광물이다.
그런 걸 이렇게까지나 깔아놨다는 건 웬만한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얼른 통신석을 들었다.
‘알렉시스에게 연락해서 여기로 와달라고 해야—’
쉭!
화살이 날아와 통신석을 맞추었다.
그 바람에 통신석을 떨어뜨린 난 흠칫,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수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경계가 대단해서 드디어 뵙는군요.”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입과 머리를 왜 가렸어요? 그만큼 눈의 색이 특이하면 몰라볼 수가 없잖아요. ……클립토 경!”
기사 클립토.
궁주와 메르세데스의 호위로 온 라온트라의 기사였다.
클립토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하 웃고 후드를 끌어내린 그가 말했다.
“저희의 정체를 아셨으면 부디 얌전히 따라와 주실까요.”
“개소리하고 있네.”
나는 헹, 콧방귀를 뀌었다.
미안하지만, 난 첫 번째 삶의 경험으로 안전 민감증을 가진 사람이다.
‘몬스터들을 얘들만 데려왔겠냐?’
나는 옷깃 안에서 백경목 피리를 꺼냈다.
“죽기 싫으면 꺼—”
그때였다.
히이이이잉—!
말이 높게 울었다.
클립토의 부대가 흠칫, 뒤를 돌아보고 사색이 되었다.
“라온트라의 마차입니다.”
라온트라의 마차?
모국의 마차를 보고 왜 놀라지?
‘아, 그렇구나.’
궁주와 메르세데스 중 한쪽이 내 납치를 사주한 거야.
다른 쪽에게 걸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누구지?
‘누가 내 납치를 사주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