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그냥 냅다 받을까.’
하지만 저놈들이 이번 일로 들러붙을 수도 있다.
사용법을 가르쳐드리겠다느니.
더 좋은 물건이 있다느니.
‘아, 그건 절대로 싫은데.’
내가 고민하는 사이, 수호자들은 더 간절해졌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예. 저희가 범한 과거의 대죄를 용서해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메시아, 부디…….”
그래도 내가 대답이 없으니, 수호자들의 표정이 점점 더 흐려졌다.
제르모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필요하실 때 언제라도 말씀해주십ㅡ”
나는 제르모 공작의 손에 들린 펜던트를 홱, 낚아챘다.
수호자들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수호자들을 쳐다봤다.
“내가 진짜 싫은데, 어? 진짜 받기 싫은데 또 펜던트를 핑계로 올까 봐 그래!”
“…….”
“…….”
“또 오기만 해봐!”
나는 콧방귀를 뀌고 얼른 사라졌다.
그렇게 코너를 샥 돌아간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슬쩍 수호자 쪽을 쳐다보니, 다들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나는 어휴, 한숨을 내쉬고 손안에 펜던트를 쳐다봤다.
살펴보니 쥐고만 있는 것으론 수호성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향로처럼 향을 피워야 보이나? 하지만 이건 향을 피울 수 있는 데가…… 아, 이런 바보.’
성물은 대부분 신성력으로 움직이잖아.
마침 내겐 좋은 게 있다.
‘신석!’
신성력이 담긴 광물 말이다.
클립토의 부대에서 납치당할 뻔했을 때 발견한 것이다.
내가 몬스터를 부리지 못하도록 미리 뿌려둔 거겠지.
엄청나게 고가인 광물이라, 혹시 쓸 때가 있을까 싶어서 가져왔다.
‘좋아, 그럼 시험해볼까.’
펜던트를 이리저리 매만져보니, 로켓형이라 벌어지는 곳이 있었다.
힘을 주자 뽀각, 소리와 함께 틈이 벌어졌다.
작은 신석을 넣으니 목걸이에서 기묘한 소음이 들려왔다.
구우우우우…….
‘뭐야, 가동된 건가?’
고민하던 때였다.
“영애.”
“아……. 안녕하세요.”
황태후 궁의 시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고 말했다.
“황태후 폐하께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티타임을 함께하자는 말씀 전하셨습니다.”
“물론 좋은…… 데…….”
“영애?”
시녀의 뒤로 어떤 남자가 확, 얼굴을 들이밀었다.
[늙은이의 명이나 전할 게 아니라 병원에 가야지! 젠장할, 이러다 이 녀석이 죽으면 난 또 몇백 년을 어둠에 갇혀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슬쩍 시녀를 쳐다봤다.
“혹시 건강이 안 좋으신가요?”
“네? 아, 최근에 과로한 탓인지 자주 어지럽긴 하지요. 어머? 혹시 성녀님껜 그런 것도 보이나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하면 황태후 폐하께 가실까요?”
“네.”
나는 시녀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역시 저 남자는 수호성이야.’
역시 신성력으로 성물을 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신석을 넣어주니까 수호성이 보이는 걸 보면.
‘대박.’
수호자들을 떠올리면 매우 창피하긴 하지만, 어쨌든 엄청난 걸 얻었다.
난 히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 * *
황태후 궁.
정원에 들어가려던 때였다.
“황비!”
황태후의 노성이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황태후는 상대에게 이런 식으로 언성을 높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원의 문이 열려 있어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황비는 싱긋, 미소 지은 채로 황태후를 마주 보고 있었다.
“모후, 어찌 그리 노하셨는지요. 당연한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까?”
“협의 없이 황후의 인장을 가져가겠다는 말의 어디가 당연한가.”
“황후 폐하께서 와병 중이실 땐, 황비인 제가 직무를 대리하는 것이 법도입니다.”
“민심을 땅에 떨어뜨린 자네가 황후의 직무를 대리할 순 없네.”
그제야 황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모후의 형평성 없는 결단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네 측근들이나 떠드는 말이겠지."
황태후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크루마투스 사태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는 자네가 내정을 돌본다면 백성들이 크게 반발할 걸세.”
“크루마투스의 주범은 사실……!”
“자네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크루마투스 사태의 주범은 자네라고 말이야.”
“그건…….”
“알렉시스와 안나마리아에게 한 짓을 덮기 위해!”
“…….”
황태후가 싸늘한 눈으로 말했다.
“그런 자네에게 황후의 인장을 내줄 순 없어.”
황태후의 단호한 태도에 황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내 미소 짓곤 다시 입을 열었다.
“모후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섭정 황자의 결정이니 따르십시오.”
“이 자가……!”
황비가 소리쳤다.
“가져와라!”
기어코 황비궁의 시녀들이 인장이 담긴 상자를 들었다.
후후 웃은 황비는 분노로 치를 떠는 황태후에게 말했다.
“부디 상황을 잘 헤아리십시오. 황제궁에 이어 황태후궁마저 주인을 잃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오셀리아—!!”
황태후가 희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때, 내가 정원으로 들어갔다.
“황가에 광영을. 황태후 폐하와 황비님을 뵙습니다.”
황태후와 황비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를 본 황비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여전히 황태후 궁을 제집인 양 드나드는구나.”
“황태후 폐하와 담소를 나누는 것이 제 기쁨입니다, 황비님.”
“네 가문에서 그 기쁨을 멀리 하라 이르진 않더냐?”
가문에서 ‘살바토레가 섭정이 되었으니, 황비의 손을 잡으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뜻이었다.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런 말씀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선 저와 황태후 폐하께서 좋은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거든요.”
“네 아비의 판단력이 늘어야 할 터인데. 명색이 적오기의 계승자인 만큼 말이다.”
“전혀 염려하지 마셔요!”
쾌활한 말투에 황비가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복장이 터질 것 같지?
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선 제 좋은 조언자시거든요. 훌륭한 판단력에 매번 기대고 있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
“이번 일도 아버님께 여쭤볼까 싶어요.”
“무슨…….”
“크루마투스 사태로 대륙 전역에 피해를 끼친 황비님께서 황후의 직무를 대리하는 것이 옳은지 말이에요.”
“……!”
“국빈들께서 묵고 계시니 의견을 여쭈어도 좋겠고요.”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황비를 향해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 왜 내게 화를 내는 거야?’의 표정을 지어줬다.
내가 달리아에게 당해봐서 아는데, 이게 진짜 속이 뒤집어지거든.
“단지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그런 일들을 한 황비님께서 황후 폐하의 인장을 가져가시는 게 말이에요…….”
“너—!”
“앗, 혹시 기분이 상하셨어요? 어쩌지…….”
황태후가 날 보며 쿡쿡 웃었다.
반면 황비는 치맛자락을 꽉 쥔 채, 날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황비궁의 시녀들이 살살 눈치를 보았다.
인장이 든 상자를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황비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궁으로 돌아간다!”
“예, 옛, 황비님!”
황비는 시녀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인장을 놔둔 채로.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황태후를 쳐다봤다.
“살바토레 황자님과 상의도 없이 인장을 가지러 온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두고 갈 리 없지요.”
“그래. 네가 아스트라를 언급하며 협박하니 두려워진 것이겠지.”
“소중한 아드님께 혼이 날까 봐 말이죠?”
나와 황태후는 서로를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앉으려무나.”
“예. 한데, 폐하.”
“그래.”
“결국은 황후의 인장을 빼앗기실 거예요.”
“……그렇겠지. 살바토레는 친모에게 권력을 실어주려고 할 테니까. 날 견제하기 위해서.”
“세력을 모아야 해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미에 아스트라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살바토레 측 귀족들이 똘똘 뭉쳐 있—.”
그때였다.
쿵!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시녀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황태후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메어리가 쓰러졌습니다.”
“이런, 서둘러 황궁의를 불러라.”
나는 황태후의 뒤에서 시녀를 쳐다봤다.
‘저 쓰러진 시녀는…….’
날 이곳에 데려온 시녀였다.
수호성이 건강을 걱정하며 투덜거리던 그 시녀.
[빌어먹을!]
쓰러진 시녀의 수호성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이상했다.
‘저 선은 뭐지?’
시녀와 수호성 사이에 희미한 빛의 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이 드문드문 끊어져 간다.
[이봐, 정신 차려!]
황태후와 다른 시녀들이 정신없이 쓰러진 시녀를 살폈다.
“어째서 몸 상태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냐!”
“집안에 문제가 생겨 돈이 급했던 모양입니다. 퇴궁 후에도 이런저런 일을 해야 했던 모양이라…….”
“몸이 약한 아이가 어찌……. 하면 내게라도 말을 했어야지!”
황태후궁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아가야.”
“예, 폐하.”
“미안하지만 오늘은 돌아가 주련. 따로 연락하마.”
“예. 괘념치 마십시오.”
방을 나서는 내내 저 선이 신경 쓰였다.
* * *
난 밤이 깊어서도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다행히 눈을 떴다.
훌륭한 의사들이 신속히 움직여준 덕이었다.
나는 황궁의 의료원에서 미적거리는 척 시녀의 상태를 살폈다.
‘선이 다시 깨끗하게 이어졌어.’
그럼 죽기 직전엔 수호성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핫! 숨을 들이켰다.
‘죽기 직전이라면 수호성을 데려올 수 있는 게 아닐까? 혼과의 연결이 약해지니까.’
그리미에도 그런 방법으로 가호를 수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대박, 대박!’
수호성이 보이면 이런 이득이 있구나!
가호를 뺏어오는 방법뿐만 아니라, 상대의 수명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잠깐만 그러면…….
‘쓰러진 사람의 상태도 알 수 있는 거잖아?’
황제궁은 살바토레가 철저히 지키고 있어서 무리.
그렇다면…….
난 비열하게 웃었다.
‘황후의 상태를 확인하자.’
황제가 쓰러지고, 황태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섭정을 맡는 건 본래 황후다.
황후가 깨어나면 섭정하게 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황후 쪽에서 알렉시스에게 힘을 실어줄 수도 있지.
어떤 방식이든 살바토레의 목을 조일 수 있었다.
나는 급히 황후궁으로 향했다.
의료원에서 황후궁으로 가기 위해선 국빈이 머무는 제3궁을 지나야 했다.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너무너무 속상한 거예요……. 알렉시스 황자님을 도울 수 있는 건 저인데, 에릴로트는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하잖아요.”
달리아였다.
그 옆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은 벨로스터 궁주였다.
복도에서 마주 본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달리아가 삐죽 입술을 내밀며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니?”
“말해줄 이유가 있어?”
“밤이 늦었는데 아직도 황궁에 있는 게 이상해서 그렇지!”
“신경 꺼. 허가 받고 있는 거니까.”
“왜 항상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거야?”
난 달리아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달리아의 곁에 있던 마사가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진짜 못됐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벨로스터 궁주님이 혼을 내주시지 않을까? 정말? 물어보자!]
달리아와 대화 중인지 마사는 까르륵 웃으며 혼자 떠들었다.
벨로스터 궁주가 내게 말했다.
“여전히 버릇이 없구나, 너는.”
“송구합니다. 안부를 묻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기실까 염려된 나머지.”
“홀로 판단하지 말고 의사를 묻는 것이 낫지 않겠니.”
“인사해도 되겠습니까?”
벨로스터 궁주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천천히 뒤를 돌아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데…….
“허락하마.”
“…….”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
“고집은. ……누굴 닮았는지.”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궁주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그녀의 수호성이 보였으니까.
“또 도박장에 다녀온 것이냐!”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봐라, 무릎이 다 깨졌지. 제기랄, 쓰릴 것인데…….”
“하여간에, 너는.”
그가 쓰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대의 나를 만든 13명의 사도 중 하나.
지금은 내 어머니의 수호성이라 추측하던…… 바키라가.
“…….”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벨로스터 궁주를 쳐다보았다.
궁주 또한 말없이 내 눈을 응시했다.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다.
“가자.”
“네, 궁주님!”
달리아는 나를 보고 흥, 콧방귀를 뀌곤 벨로스터 궁주를 쫓아갔다.
난 내게서 뒤돌아 걸어가는 궁주에게 소리쳤다.
“엄마예요?”
“……!”
궁주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엄마예요?”
“…….”
벨로스터 궁주는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고요히 서있을 뿐이었다.
달리아가 인상을 찌푸리곤 나와 궁주를 번갈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
“궁주님……?”
“……가자.”
벨로스터 궁주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쥐며 소리쳤다.
“엄마 맞잖아…….”
“…….”
달리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저기, 궁주님.”
“가자.”
“하지만…….”
“가자니까!”
흠칫 놀란 달리아가 입을 다물고 벨로스터 궁주를 쫓아갔다.
* * *
벨로스터 궁주의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르세데스는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입니까?”
달리아 없이 혼자 들어온 궁주가 문을 닫았다.
메르세데스가 소리쳤다.
“부황에게 이 일을 밝히면 가만두지 않을…….”
쾅!
벨로스터 궁주는 메르세데스의 멱살을 잡은 채로 벽에 밀어붙였다.
“내가 말했지.”
“이게 무슨 짓입, 윽, 니까!”
“에릴로트 아스트라를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