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333화 (334/390)

333화.

제르모 공작이 내게 물었다.

“도움이 되었습니까?”

“…….”

“되었나 보군요.”

“시끄러워.”

인정하기 싫지만…….

‘엄청나게 도움이 되긴 해.’

물론 난 황태후의 편을 들 것이다.

하지만 겉으론 살바토레에게 한 발 걸쳐놓은 상태.

최악의 경우, 살바토레가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살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스트라는 이 전쟁에서 소모한 것이 하나도 없다.

군사, 재물…… 그 어떤 것도.

황태후는 속이 타겠지만, 내가 납치당한 것이니 핑계를 대기에도 좋지.

“날 언제 풀어줄 셈이야?”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제르모 공작의 말에 난 흠, 신음했다.

“할아버지는 만날 수 있지?”

“물론입니다. 안내해드리죠.”

나와 아빠, 그리고 오라버니들은 마시타브바들의 안내를 받으며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아빠를 슬쩍 쳐다봤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네.’

아빠의 표정은 딱딱했다.

내가 눈치를 보자, 발자크가 내게 속삭였다.

“화가 나셨으니까 괜히 벼락 맞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응?”

“크로노트 회가 너와 엮였잖아.”

“아…….”

나는 흠칫했다.

아빠는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차원 이동과 회귀했음을 알려준 뒤로, 우리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며 당연하게 나온 이야기가 ‘그리미에는 어떻게 힘을 얻었는가’였다.

“크로노트 회 본거지 습격이 시작이었어요.”

“습격?”

“네. 거기서 크로노트 회의 정보를 얻은 거예요. 그게 큰 힘이 되었을 거로 추측해요.”

“그러며 메시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겠군. 차후엔 네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방해가 될까봐 금제했을 테고.”

“맞아요.”

당시엔 장막이 크로노트 회라는 것을 몰랐다.

또, 그리미에가 달리아를 메시아로 속여 저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도.

단순히 크로노트 회의 정보로 엄청난 마도력만을 얻은 줄 알았다.

‘탄압으로 사라진 종교인 줄 알고, 나만 입을 다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버젓이 활동하는 데다가, 메시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

아빠의 입장에선 나를 지키기 매우 어려워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마음대로 움직이다가 납치까지 당했으니…….

‘망했네.’

수호자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가족들의 시선이 느껴지면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어느 방 앞에 다다라 제르모 공작이 말했다.

“이곳입니다.”

이곳에 할아버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똑똑, 노크한 뒤 방 안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거대한 원탁에 홀로 앉아있었다.

“할아버지, 저예요. 에릴로트요.”

“…….”

할아버지는 돌아볼 생각 없이 지그시 한 곳을 응시했다.

“할아버…….”

“기가 막히는구나.”

“……!”

할아버지를 향해 걸어가던 나는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오라버니들 또한 굳은 얼굴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나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메시아, 예정된 불행, 그리미에를 처단하겠다는 목표, 네 정체.”

“하, 할아버지…….”

“내 울타리 안에서 일을 많이도 벌렸더구나.”

할아버지가 나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시선이었다.

열두 번째 탑에 있을 때도 이렇게 싸늘한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너를 마냥 풀어두었을 거라고 여기느냐.”

“…….”

“정보조가 기막힌 소식을 자주 들고 왔지. 네가 칸시스 대륙에서 단지 유학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시녀로 들어갔다는 것, 아니, 더 어려선 고작 열 살짜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벌였던 것.”

알고 있었구나.

얼마쯤은 눈치 채고 계셨어.

나는 뻣뻣하게 굳어져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오라버니들은 눈을 꽉 감거나, 한숨을 삼켰다.

“그런 너를 놔둔 이유는 내게도 붉은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

“천하의 악당이라는 늙은이가, 선대가 낳은 괴물이…… 사람다운 정이 일말은 남아서.”

“…….”

“너 스스로 내게 와줄 때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동공 안에 굳어진 내가 비치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물었다.

“그래, 나를 가둬둔 것도 네 책략이냐.”

“그건……!”

다급히 소리치려던 내게 할아버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아들을 죽이려던 것은 공작위를 위해서냐.”

“그리미에 백부님의 일은……!”

“그 녀석의 동향 또한 수상하기 짝이 없었으나, 결국 번번이 그 녀석을 함정에 빠뜨린 건 너였다.”

“저는, 그런 게 아니라…….”

“대답을 해.”

“…….”

뭐라고 대답하지?

사실은 그리미에가 이전 삶에서 나를 죽인 사람이라고?

나도 죽이고 아스트라도 멸망시켰다고?

그래서 난 이세계로 날아가 유혜민으로 살았다고?

할아버지가 그 말을 믿어줄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할아버지는 실소를 흘렸다.

“나를 가둬둔 것도 네 책략이냐고 물었다.”

“…….”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맨발로 이곳에 달려온 늙은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느냐.”

“아니에요. 그건 정말로 아니에요. 마, 말씀드리지 못한 게 많아요. 제가 수상하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하지만……!”

크로노트 회의 수호자들 또한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제르모 공작이 말했다.

“사안이 급박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르신. 하지만 이번 일은 결코 메시아의 뜻이 아닌—”

“네가 크로노트 회의 메시아라는 것은 언제 알았지?”

할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희게 질려버렸다.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알았다.

‘그런데도 아빠와 오라버니들에게만 말하고 할아버지에겐 말하지 않았어.’

믿지 못해서.

내가 아닌 그리미에를 신뢰하고, 할아버지가 그의 편을 들까 봐서.

메시아라는 존재는 할아버지가 애써 키우고 지켜온 아스트라를 한 번에 박살 낼 수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고 무해한 척 할아버지의 앞에서 웃었다.

……사실은 내 존재라는 칼날을 목전에 들이민 것이면서.

“할아버지, 화가 나셨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정말 아니에요. 저도 수호자들에게 납치당해서—”

“이제껏 나를 속여온 너의 말을 믿으라고.”

“죄송해요.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이번 일도…… 바보같이 무력하게 납치당해서 할아버지께 큰 피해를 드리고…….”

“…….”

“의심을 사게 행동해서 죄송해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던 것도 잘못했어요. 할아버지, 바보 같이 굴어서 정말—”

그때였다.

“왜 네가 사과하는 거야!”

등 뒤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빠였다.

성큼성큼 걸어온 아빠가 나를 등 뒤에 감추고 할아버지를 매섭게 노려봤다.

“어째서 아이가 믿음을 주어야 합니까.”

“데이몬드.”

“어른이 신뢰를 주지 못했기에 살기 위해 홀로 발버둥 쳤습니다.”

“내 장원 안에서 나를 속이고 내 아들을 절벽으로 떠밀기 위해 수없이 계략을 짠 것이 발버둥이냐.”

“그렇게밖에 살 수 없게 한 건 당신과 나야!”

“…….”

“신뢰를 받고 싶으면 당신도 신뢰를 주었어야지! 매일을 홀로 전전긍긍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한 것은 아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부모인 나의 탓이야!”

“너—”

“걸음마를 겨우 뗀 나이부터 이 아이는 제대로 잔 적이 없어!”

“…….”

“그렇게 살게 했잖아. 매일 사촌들과 겨루고, 이기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을 가르쳤잖아!”

“…….”

“그래 놓고서 무슨 신뢰와 일말의 정이란 거야—!”

아빠의 고함이 원탁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사색이 되어 아빠의 팔을 끌어안았다.

“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걷는 것도 겨우 하던 아이가, 제대로 발음도 못 하던 아이가 눈치를 보면서 살게 한 건 누구야!”

“아빠!”

“애정으로 보듬어 준 어른 하나가 없는 곳에서 처절하게 산 아이가 어떻게 신뢰를 배워!”

“아빠, 제발……!”

“그 누구도 에릴로트를 책할 수 없어! 이 아이처럼 간절하게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버럭 소리치며 일어났다.

“내가 어찌했어야 해!”

“뭐?”

“대체 어찌했어야 하느냔 말이다!”

“…….”

“내가 무력했기에 선대의 손에 온몸이 찢기고 재구성되었다. 끔찍한 인체실험에 몸도 정신도 너덜거렸어! 해서 선대를 친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라 매정하게 경쟁시켰어!”

“…….”

“너희는 그리 살지 말라고—!!”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너무나 왜소해 보여서.

서부를 손에 넣은 거대한 노인이 작고 연약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과 손에 진 주름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마냥 다정하게 굴었어야 했던 거냐. 기반 없이 공작위에 오른 내가 약점인 내 자식과 손주를 세상에 널리 보였어야 해?!”

“…….”

“하면 개잡놈들은 너희를 노릴 것인데. 나를 치기 위해 너희에게 검을 겨눌 것인데!”

“…….”

“아카데미에도 보내지 못했어! 선대의 끄나풀, 나와 척을 진 귀족들, 그 누구라도 네 녀석들을 노릴 것이기에!”

“…….”

“빌어먹을 혈족 교육이라는 핑계로 너희를 가둬둔 것이 나라고 마음이 편했을 성싶으냐!”

“…….”

“나라고 갓난아이인 손주를 열두 번째 탑에 맡기는 게 쉬운 일이었을 줄 알아—!!”

나도, 아빠도, 오라버니들까지 아무런 말을 못 했다.

할아버지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이마를 쥐었다.

“그래, 내가 정으로 키우지 못했기에 기다렸다! 에릴로트가, 네 놈이 내게 사실을 말해줄 때까지!”

“…….”

“한데 사실을 말해주긴커녕, 자식놈들끼리 살육전을 벌이겠다고…….”

“…….”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말해주길 바란 것이 그리 큰 바람이었느냐…….”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이 흔들렸다.

할아버지는 무너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나도 아비의 정을 배운 적이 없어.”

“…….”

“어찌 부모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대비하고, 실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나 또한 모르는 것 투성인데.”

“……당신.”

“자식을 볼 준비가 되어서 너희를 낳은 것이 아니야. 가문의 필요에 의해 아내를 들였고, 종마처럼 자식을 봐야 했다.”

아빠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오라버니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른침만 삼켰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감싸고 있던 모든 깃털이 떨어지고, 알맹이만 남은 상처투성이 노인을 향해서.

할아버지는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부모가 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응.”

“아무도…… 나도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고…… 나도.”

“알아요.”

“…….”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할아버지의 양 손목을 가볍게 잡고 말했다.

“아빠도 자식으로 사는 생이 처음이듯, 할아버지도 이 생이 처음이었을 거예요.”

“…….”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테고요. 할아버지에겐 가족의 안전, 아빠에겐 자존심밖에 남지 않은 삶 같은…….”

“…….”

“저는 세 번째인데도 어려워요.”

“……뭐?”

“저한테도 이렇게 어려운 일을 처음부터 잘 해내라고 요구할 순 없어요. 알아요.”

“무슨 소리냐.”

“그런데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저한테는 제 삶이, 이제야 겨우 찾은 내 가족들이 너무 소중해서 할아버지 가슴에 또 피멍을 들여야 해요…….”

눈물이 뚝뚝 흘렀다.

어린애처럼 우는 나를 할아버지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슨 소리냐.”

“그리미에 백부님이 첫 번째 삶의 저를 죽였어요. 아빠도, 할아버지도, 또 가문의 모두를요…….”

할아버지의 동공이 천천히 커다래졌다.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소리쳤다.

“첫 번째 삶에서 그렇게 죽고, 수호성에 의해 이세계로 갔어요. 이세계에서 살다 죽어서 또 다시 이곳으로 온 거고요.”

“……!”

“그러니까 죄송해요. 말씀드리지 못해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할아버지를 믿지 못했어요! 어헝……!”

할아버지는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나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나는 눈물로 인해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즈, 증거가 없으니까 할아버지가 안 믿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흑, 허엉…… 증거 없이 ‘당신 자식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못하니까 그래서……!”

“너를 금제한 게 그리미에인 것이냐.”

“……넹?”

나는 훌쩍, 코를 들이켜며 말했다.

“금제 당한 것 알고 계셨어요?”

“모를 리가. 너는 내 자식과 라온트라 황족의 딸이다. 혈통만 놓고 보면 결코 가호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어.”

“라온트라 황족…… 어떻게 아세요?”

“그야 네 어미가 신분을 밝히고 찾아와 내게 널 맡겨두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

“너야말로 정확히 말해라. 그리미에인 것이냐?”

“그렇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그리미에의 명을 받은 수호자가 한 거거든요. 제가 메시아인 줄 모르고…….”

“몰라? 그건 또 무슨 바보 같은 말이야.”

“그리미에가 달리아를 메시아라고 속여서…….”

할아버지가 다시 이마를 잡았다.

“나도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저놈들도 한심하군!”

“그렇긴 한데요…….”

“하면 금제한 자가 누군지는 안다는 말이지?”

“네…….”

“그 자를 데려와라.”

“저기 있어요.”

나는 나를 금제한 수호자를 가리켰다.

수호자들이 움찔했다.

할아버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뭐예요?”

묻자,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선대의 실험 기록. 리시안이 은밀히 가지고 있던 것이다.”

“리시안 숙부…… 네?!”

발자크와 요슈아의 친부이자, 아빠의 쌍둥이인 그 리시안 숙부?

내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할아버지는 노트를 파라락, 넘기며 말했다.

“리시안이 죽었을 때, 선대의 실험기록이 모두 분실되었지. 그러나 그 애가 벽난로에 숨겨놓은 이것만은 내가 찾았다.”

“뭔데요?”

“인공 마수 제조법부터 수없이 많은 금술이 적혀 있어.”

인공 마수 제작법!

우리 가족은 모두 흠칫했다.

‘리시안 숙부의 기록을 훔쳐냈던 거구나. 그럼 숙부를 죽인 것도 혹시……!’

“이곳에 금제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만일 그리미에가 이 필사본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너는 네가 모르는 또 하나의 금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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