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334화 (335/390)

334화.

할아버지가 꺼낸 책에서 금제의 금술을 확인했다.

“금제는 3단계…… 맞아요! 두 번 금제가 풀렸으니까 한 번 남은 거예요.”

“그래. 이 금제엔 제물이 필요하지.”

“제물이라면 혹시…….”

“인간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금제의 파훼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물을 이용해 파훼할 수밖에 없겠군요.”

“용까지 테이밍한 가호가 이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냐?”

“아, <마물 조련>은 뻥이에요.”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봤다.

“…….”

“헤헤.”

내가 최대한 무해한 얼굴로 웃자, 할아버지는 기가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하면 네 가호는 고대어를 읽는 가호뿐인 것이냐?”

“그것도 뻥이에요.”

“……네 입에서 진실이 나올 때는 있는 것이냐.”

헤헤, 헤…….

나는 억지로 웃다가 슥,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의 못마땅한 시선이 뺨에 콕콕 박혔다.

“제 가호는 실은 <열람>이에요.”

“열람?”

“세계의 기록을 읽을 수 있고, 흐름을 조종하는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능력인데, 사실 제가 고대에서…… 고대?”

난 흠칫,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그거다.”

“무엇이.”

“전 <열람>의 최종 형태를 알고 있어요!”

고대의 나, 그러니까 일로테가 이노락스를 물리칠 때 쓰던 가호.

텍스트를 재구성하여 세계의 흐름을 바꾸었다.

세계가 지정한 주인공과 그 버프가 전혀 소용없던 능력.

제사장과 사도들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최고의 가호였다.

‘그리미에도 그 능력을 알고 있던 거야.’

내가 무서웠겠지.

그래서 나를 망가뜨리기 위해 그 모든 일을 벌였던 것이다.

결코 마지막 금제를 깨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크로노트 회의 기록에 그런 이야기까지 쓰여있는 건가?

‘아니, 뭔가 이상해.’

그리미에는 아스트라의 소중한 장남.

본래라면 크로노트 회 습격전에 참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참가해 두 다리를 잃어가며 기록을 가져왔지.

‘마치 누가 그 기록이 필요하다고 알려준 것처럼…….’

“헤라.”

나는 조용히 수호자를 불렀다.

헤라가 고개를 숙였다.

“예, 메시아.”

“혹시 말이야. 혹시…… 나 외에도 수호성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런 기록은 전무합니다. 하지만…….”

헤라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수호성 중엔 있습니다.”

“수호성?”

“예, 사자들이 그러하지요. 신이 인간을 다스리라 내린 영혼이기에.”

“하지만 세일론과 다른 사자들은 내게 별다른 얘기를 해주지 못했어.”

“신의 제약 때문입니다. 신의 결단에 감히 반기를 들어 제약되었지요.”

“그렇다면 제약당하지 않은 사자가 있어?”

“예.”

헤라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사자로 만들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으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성정으로 결국 사자가 되지 못한 이.”

“…….”

“해서 신이 제사장과 사자들의 힘을 제약할 때, 운 좋게 피할 수 있던 자가 있습니다.”

“설마 그 수호성이란 거…….”

나와 헤라는 동시에 말했다.

“이노락스.”

“이노락스.”

만일 이노락스가 그리미에의 수호성이라면?

모든 것을 알고, 수호성과 소통할 수 있는 그녀가 그리미에를 도왔다면?

‘가능성 있어.’

그리미에는 크로노트 회의 습격 사건에서 우연히 정보를 얻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힘을 얻기 위해 그곳에 계획적으로 간 것이다.

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작전 변경.”

“……예?”

“뭐?”

수호자들도, 오라버니들도 미간을 좁혔다.

“그리미에에게 이노락스가 붙어 있을 수도 있어.”

“무슨……!”

“고대의 모든 정보를 알고, 말할 수 있는 이노락스가 붙었다면 이 싸움은 필패다.”

나는 콧김을 훙, 뿜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힘을 되찾는 게 우선이지.”

그리미에, 네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 다 알았어.

이번에 당하는 건 너다.

할아버지가 울컥 소리쳤다.

“내게도 설명하지 못하겠느냐!”

“일을 설명한다면 결단을 내리실 수 있으세요?”

“뭐라?”

“불행하고, 끔찍한 선택인 줄 알지만요. 그래도 하셔야 해요.”

“무슨 뜻이냐.”

나는 미간을 좁히며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큰아들을 버릴 수 있는지 묻는 거예요, 할아버지.”

“…….”

눈을 지그시 감은 나는 모든 일의 진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얘기가 깊어질수록 할아버지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할아버지도 그리미에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줄은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가문을 멸문하게 만들고 혈족들을 죄다 도륙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얘기가 끝났을 때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해요.”

“…….”

“할아버지.”

“……장원으로.”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장원으로 돌아가자.”

* * *

며칠 후.

살바토레의 진지.

살바토레 군은 황도 인근, 버려진 궁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막사 안에 모인 귀족들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아베크 백작이 돌아섰습니다.”

“아베크 백작뿐입니까? 베가 후작도……!”

“황태후 세력이 생각보다 견고합니다. 알렉시스 황자의 군세 또한 이쪽에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쾅!

살바토레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해서 방안은.”

“…….”

“…….”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결국 책략도 없이 불평만 떠들 뿐이 아닌가!”

오셀리아 황비의 낯빛도 어두웠다.

그때였다.

“알렉시스 황자가 지휘하는 황군의 공격입니다! 후방에선 비페리 공작군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사색이 된 귀족들이 소리쳤다.

“이, 인공 마수! 인공 마수가 필요합니다!”

“그리미에 공은 어째서 안 보이는 것이오!”

“즉시 파발을 보내겠습니다!”

귀족들이 아우성이었다.

알렉시스의 부대를 막아내기 위해 귀족들이 자리를 떠난 후.

막사 안엔 살바토레와 오셀리아 황비만이 남았다.

“이, 이런 와중에 정말 그리미에를 버릴 거니.”

살바토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었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선 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에릴로트 아스트라를 믿을 수 있을는지…… 황태후, 알렉시스와 얼마나 절친했는지 알잖니.”

“하지만 지난날 동안 에릴로트는 그들을 위해 나서지 않았습니다.”

지독하게 약삭빠른 여자였다.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데이몬드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남자였다.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딸의 의지마저 꺾을 자.

‘데이몬드에게서 합류 의사가 담긴 서한이 왔다.’

그리미에를 버리면 판을 뒤집을 수 있었다.

“정말로 그들을 믿는 것이냐. 그렇게 우리 군에 들어와 세작 노릇이라도 하면…….”

“방법이 있습니까!”

“……!”

살바토레가 사나운 얼굴로 오셀리아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멍청한 어미를 둔 죄로 내게 선택지는 그 계집애밖에 남지 않았어.”

“사, 살바토레…….”

“모후는 아나톨리 선황녀에게 가십시오. 그리미에를 처리하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합니다.”

황제가 귀히 쓰던 아나톨리 선황녀의 가호.

그릇에 손만 닿으면 식물의 분자 구조를 바꿔 음식을 약이나 독으로 바꾼다.

그렇게 아나톨리 선황녀는 황제의 정적을 수도 없이 처리해왔다.

“그리미에와의 티타임에 선황녀를 초청할 겁니다.”

“인공 마수는?”

“용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마수는 필요 없어!”

“…….”

“그리미에가 저쪽에 붙을 위험성만 제거하면 이 전쟁은 끝이 날 겁니다. ……내 승리로.”

“에릴로트와 아나톨리는 원수야. 그 애가 우리 편에 붙은 것을 알면 돕지 않을지도 모르잖니.”

“데이몬드는 넘겨주겠다고 하면 맨발로라도 달려올 겁니다.”

오셀리아 황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 살바토레—”

“쓸데없는 말을 하실 거라면 다무십시오.”

“…….”

오셀리아 황비는 희게 질린 얼굴로 막사를 나섰다.

그러다 마침 막사 안으로 들어오던 자와 마주쳤다.

“에드로페 공자로군. 자네 가문이 살바토레의 손을 들어줄 줄은 몰랐어.”

“아버님을 인질로 잡아두신 분의 모친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줄로 압니다.”

“아들을 위해 무례는 용서하도록 하지.”

황비가 빈센트를 노려보며 스쳐 지나갔다.

빈센트는 그대로 막사 안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있던 살바토레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네 아비의 상태는.”

“피부가 석화되고 있습니다.”

“마물화가 빠르구나.”

빈센트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부친은 황제를 따르는 척, 그리미에의 가호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부친은 마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살바토레가 그에게 약병을 던졌다.

탁, 소리가 나도록 받아 든 빈센트가 물었다.

“무엇입니까.”

“그리미에에게서 받아둔 몬스터화를 늦추는 약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아버님을 치료해주신다는 말은 진정이시겠지요?”

“네가 나를 돕는다면 말이지.”

살바토레가 턱을 괸 채로 빙그레 웃었다.

“네 역할이 중요하다. 네 가호 <심안>으로 에릴로트 아스트라와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속내를 읽어야 할 것이다.”

“만날 일이 있습니까.”

“휘하에 들어올 예정이지. ……그리미에만 없다면.”

“그리미에 아스트라를 버리십니까?”

“네겐 잘된 일이 아니냐. 그리미에는 네 아비를 마물로 만든 원수이니.”

빈센트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살바토레가 어깨를 으쓱했다.

“곧 부녀와 대화를 나눌 것이다.”

몇 시간 전, 연락이 왔다.

‘살바토레를 만나서 이번 전투로 얻을 아스트라의 이득을 셈하고 싶다’는 맹랑한 연락이었다.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가호를 발전시켜 목소리만으로 속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일 사용량은 극히 짧지만 말입니다.”

“그래.”

“하지만 황궁에서 이 구역은 통신할 수 없도록 조치해두었을 텐데요.”

“통신이 아니야.”

“하면 무엇입니까.”

“그들이 직접 이곳을 찾을 것이다.”

“어찌 전쟁의 한복판을…….”

살바토레의 입매가 싸늘한 곡선을 그렸다.

“전쟁의 한복판, 그것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잠입이 가능한 힘을 가진 자들이 내 휘하에 들어오는 것이다.”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살바토레와 만나기로 한 약속 30분 전.

새카만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던 나는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직접 안 와도 된다니까!”

목소리를 바짝 죽이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큰소리가 나오려고 한다.

“네가 전투지에 있는데 나더러 나오지 말라는 게 말이 돼?”

“그렇다고 직접 부대를 이끌고 나오면 어떻게 해?”

살바토레는 알렉시스를 죽이기 위해 혈안일 것이다.

황태후와 황후가 마음 놓고 살바토레를 공격하는 건, 알렉시스라는 패가 있기 때문.

그가 죽는다면 귀족 세력의 대부분이 살바토레에게 넘어갈 것이다.

전투에서 이겨도 황위 계승자가 없다면 득이 없으니.

“호위해 줄 테니까 살바토레의 진지로 넘어가.”

“…….”

“모습과 목소리를 완전히 감출 수 있는 가호를 쓸 수 있다면서.”

“……네가 직접 나를 보낸다고.”

알렉시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바토레는 내 힘을 얻기 위해 결혼하자고 할 텐데.”

“…….”

“아무리 책략을 위해서라도 네가 좋은 마음으로 보낼 수 있어?”

“못할 것도 없지.”

“보내고서 정신 제대로 차리고 싸울 수 있어?!”

“돌아올 거잖아.”

“…….”

“돌아올 걸 아니까 괜찮아.”

나는 알렉시스의 허리춤을 살며시 잡았다.

“다치지 마.”

“너나 제발.”

“이럴 때도 말은 예쁘게 못 하고!”

“너나.”

“이게 진짜!”

알렉시스가 내 허리를 끌어당기며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다치지 않고 오겠다고 약속해.”

“……약속해.”

“그럼 됐어.”

“바보가…….”

우리는 서로를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그때.

“진짜 작작 해!”

“내가 발자크의 말에 동의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에릴로트.”

“그만 떨어지지 그래.”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오라버니들이 있었지.’

나는 큼, 헛기침을 하며 물러나려고 했다.

알렉시스가 허리를 놔주었다면 말이다.

그가 놔주지 않는 바람에 나는 여전히 알렉시스와 딱 붙어 있었다.

알렉시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자주 볼 텐데.”

“처음부터 싫은 새끼더라니, 젠장.”

“황족 모독죄로 처벌되고 싶은가 보지.”

그때였다.

누군가 불쑥 나와 알렉시스 사이에 파고들었다.

“……아빠.”

아빠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알렉시스도 아빠에겐 아무런 말을 못했다.

“난 황족이 무서운 적이 없었어.”

“……안 됩니까?”

“당연한 말을.”

아빠가 눈을 부라리자, 알렉시스는 시선을 피했다.

“벨트리 님과 남들 앞에서 수도 없이 시시덕거리셨다던데.”

아빠가 흠칫했다.

오빠들은 아빠를 쳐다봤고, 나 또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시덕거리셨어요?”

아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울대만 꿀렁, 움직였을 뿐이었다.

난 이번엔 알렉시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아?”

“데본 로체 후작이 옥사에 갇혔을 때, 네 부탁으로 그를 살피다가 탈로프 공에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지.”

“시시덕거리셨대?”

“벨트리 님은 끔찍하게 싫어하셨는데, 아버님 혼자서.”

“그러셨어요?”

“…….”

아빠는 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알렉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빠를 쳐다봤다.

“그러다 아버님께서 결국 주먹으로 얻어 맞으셨다던데요.”

“누가 네 아버님이야!”

“아빠, 남들이 들어요!”

“가자!”

“듣는 다니까…….”

나는 어휴, 한숨을 내쉬고 아빠를 쫓아갔다.

아빠 모르게 알렉시스에게 손을 흔들며.

아빠는 엄청나게 빠르게 걸었다.

“아빠, 잠깐…… 너무 빨라요.”

“나야, 저 녀석이야.’

“……네?”

아빠가 나를 휙, 돌아봤다.

아직까지 내 등 뒤에 서있는 알렉시스를 매섭게 노려보며.

“나이냐, 저 녀석이냐.”

“…….”

“나도 이런 치졸한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아!”

“그게 그러니까…….”

앞엔 아빠.

뒤엔 남자친구.

‘살바토레와의 대화보다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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