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335화 (336/390)

335화.

나는 빠르게 머릿속의 주판을 두드려 피해량을 따졌다.

‘아빠를 선택하는 경우.’

알렉시스가 서운하다.

‘알렉시스를 선택하는 경우.’

아빠가 서운하다.

가족이 아닌 애인이 먼저라며 오라버니들도 서운할 수 있다.

화가 난 아빠가 알렉시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차후 만나기 어려워지고…… 기타 등등.

‘좋아.’

나는 냉큼 대답했다.

“당연히 아빠지요~!”

“……!”

“…….”

아빠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러곤 내 어깨를 끌어안은 채 훗, 입꼬리를 올렸다.

오빠들 또한 애인보다 가족이라는 선언 비슷한 말에 아주 흡족한 표정이다.

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알렉시스는 아량이 넓으니까 잠깐 서운해도 이해하겠지.’

그런데…….

‘응?’

알렉시스의 표정이 어쩐지 무시무시했다.

아빠는 그런 알렉시스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보며 내게 말했다.

“당연한 것을 물어봤구나. 그래, 가자.”

아빠는 엄청나게 다정한 표정이었다.

꿀이 뚝뚝 흐르는 눈빛 하며, 한여름의 장미 정원처럼 아름다운 미소하며…….

하지만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알렉시스가 엄청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그러다 등 찢어지겠다.’

나는 알렉시스에게 최대한 다정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줬다.

“그, 그럼 이따 봐.”

내 마음 알지, 응?

진짜로 그런 건 아니야.

가족과 애인의 애정 정도를 어떻게 순위로 따지겠어?

그런 의미의 눈치를 주려고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런데 알렉시스의 무시무시한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나는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걸었다.

알렉시스가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등이 따끔따끔했다.

* * *

살바토레와의 약속 장소는 그들의 진지에서 가까웠다.

버려진 궁터 인근에 있는, 이제는 쓰이지 않는 사원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살바토레가 와있었다.

아빠와 난 그가 있는, 얼마쯤 부서진 거대한 석조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자 살바토레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호위도 없이 온 건가?”

패색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저 놈의 느물느물한 미소는 사라지질 않는다.

아빠는 고저 없이 대답했다.

“제가 있는데 호위가 필요합니까.”

“아아, 그래. 영애의 아비는 초월 영역에 들어선 칼소이에 최강의 검이지.”

살바토레가 쿡쿡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앉지. 차를 내줄 수 없어 아쉽군.”

우리가 자리에 앉은 후, 그는 말을 이었다.

“호위의 이야기는 신경 쓸 것 없어. 호위 없이 왔으니 공격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 아니니까.”

“하면 무슨 뜻인가요?”

내가 물으니, 살바토레가 턱을 괴며 말했다.

“신뢰의 증표로 여기는 것이지.”

“저를 믿으십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타인을 쉽게 신뢰할 수 있을까. 들어와라.”

살바토레의 명에 누군가 들어왔다.

“……!”

그 자를 본 나는 바짝 굳어졌다.

‘빈센트 에드로페.’

그는 과거를 읽는 가호 <심안>을 가진 자.

그가 살바토레의 곁에 있었나?

에드로페 가문이 살바토레에게 넘어간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정이 바른 빈센트는 가문을 등지고서라도, 명분이 있는 쪽을 택하리라 여겼다.

‘전쟁의 명분은 황태후 쪽에 있는데 그가 왜…….’

어쨌든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나와 아빠는 시선을 교환했다.

‘일이 틀어지면 살바토레를 우리 수중에 넣어야 해요.’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바토레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것을 신호로 빈센트는 가호를 발동했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아빠의 손가락을 꾹 쥐고 있었다.

‘어쩌지. 살바토레는 호위를 데려왔을 텐데.’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면 증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황태후가 이 근방 통신을 끊어놓은 상황.

일단 몬스터를 내보내서 알렉시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그런데 그때였다.

“아스트라 백작님과 그 따님의 과거에선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뭐?’

아빠는 침착하게 무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일순 치맛자락을 꽉 붙잡았다.

빈센트의 가호는 진짜다.

첫 번째 삶에서 달리아가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애가 살던 한국의 풍경도 정확히 짚어냈지.

그러니까 지금 저 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살바토레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리미에는 완벽하게 쳐내도록 하지.”

그 말에 아빠가 물었다.

“딸은 황태후, 황후와 원만한 관계입니다. 더욱이 흠결이 있는 데다가, 궁지에 몰려 있는 황자님을 따를 이유가 없지요.”

“간단하게 얘기하게. 그래서 무엇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잖은가.”

“셈이 빠르셔서 좋군요.”

“황태후의 친정인 파앙테 후작가의 장원을 주지. 그리고…….”

“전쟁 동원령에서 제외될 수 있는 특권 또한…….”

“욕심이 많은…….”

아빠와 살바토레가 대화하는 동안 나는 빈센트를 지그시 쳐다봤다.

빈센트 또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살바토레는 아빠의 요구에 난색 했으나, 아빠는 강경했다.

그렇게 강경한 태도로 나와야, 우리가 이득을 보기 위해 살바토레의 편을 든다고 믿게 할 테니까.

살바토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리미에를 쳐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군사를 합류시킬 것입니다.”

“좋아.”

대화가 끝났다.

살바토레는 빈센트에게 아빠와 나를 배웅시켰다.

혹시나 이 대화로 다른 생각을 했을까 경계하는 것이었다.

나와 아빠는 빈센트와 함께 사원 밖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이죠?”

내가 묻자, 빈센트는 힐끔 아빠를 쳐다봤다.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아빠는 미간을 좁혔지만, 내가 소매를 잡고 “괜찮아요.” 하고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피해주었다.

단둘이 남은 후, 나는 팔짱을 꼈다.

“그럼 이제 말하세요.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

“대답하지 않을 거면 왜 아빠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뭡니까.”

“네?”

“왜 당신의 과거에 나도 모르는 내가 있는 겁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호가 첫 번째 삶보다 높은 단계에 들어섰구나.’

하기야, 제국에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겨서 다들 첫 번째 삶보다는 가호 수준이 높아졌다.

‘그래도 회귀 전 과거까지 읽을 수 있다니…….’

적어도 나보다는 높은 단계의 가호를 가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알렉시스와 같은 단계의…….

“말씀해주십시오.”

“<심안>을 가졌으니 알 것 아니에요? 그래요, 난 회귀자예요.”

“……!”

“어디 가서 밝혀도 안 믿을걸요. 공의 가호를 의심하는 말까지 나오겠죠. 그러니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시계탑 아래에서 나를 계속 기다렸습니까?”

“…….”

“그렇게 추운 날, 덜덜 떨면서까지 왜…….”

“내게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렇게 날 사랑했습니까?”

“……끄러워.”

“달리아 아스트라를 위해 당신을 배반한 나를 어째서 그렇게까지…….”

“시끄러워!”

아빠가 흠칫, 나를 쳐다봤다.

나는 굳은 얼굴로 빈센트를 노려봤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봤는지 모르겠지만, 신경 끄세요. 현재의 세계에선 없었던 일이니까.”

“어떻게 잊습니까.”

“잊으라니까!”

“나도 모르는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한 여자를 어떻게 잊어요.”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

이제 와서 어쩌자고.

나는 저 남자가 준 상처 때문에 타인을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다.

저 남자로 인해 처음부터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는 것보다, 사랑에 배신당한 것이 더 아프단 걸 알았기에.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빈센트가 급히 내 손목을 잡았다.

“저 새끼가……!”

아빠가 빈센트를 살벌한 표정으로 쳐다봤을 때, 나는 빈센트를 돌아봤다.

“놔.”

“난 과거의 빈센트 에드로페가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아니라고 생각해?”

“예?”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너야. 내 첫 번째 삶과 같은 상황이 왔을 때의 너.”

“……결국 난 당신을 먼저 만났어. 달리아 아스트라가 아니라. 왜 그렇게 당신에게 끌렸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내가 알려줘? 넌 내가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서 좋아진 거야.”

난 빈센트의 말허리를 뚝 자르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 넌 첫 번째 삶의 달리아와 같은 이유로 지금의 나를 좋아하게 된 거야.”

“영애.”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서.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서. 그리고 결국 승리자가 되어서!”

빈센트가 바라는 조건을 모두 가진 것이었다.

에드로페 후작은 남의 시선에 예민한 남자였다.

남들에겐 아들을 사랑하는 듯 굴었으나, 결국 그가 제일 사랑한 건 자신.

영리한 빈센트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외로운 유년을 보냈다.

‘그래서 사랑받고 자란 자를 동경한 거야.’

남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후작은 아들에게 혹독했다.

더 잘해야지.

더 반듯해야지.

더 자랑할 수 있는 자식이 되어야지.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래서 제 의지를 남들의 시선과 관계없이 당당하게 표출하는 자를 동경하는 거고.’

결국,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터다.

완벽한 승리자가 되어서.

‘그래서 늘 승리하는 이들을 동경하지.’

지금의 내가 그랬고, 첫 번째 삶의 달리아가 그랬다.

“결국 똑같은 이유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네가 뭐가 달라져.”

“그렇지 않아. 그때도 당신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알았다면…….”

“알았어! 넌 다 알았어!”

“…….”

“네가 얼마나 교묘한 남자였는 줄 알아?!”

“무슨…….”

“내가 지쳐 너를 포기하려고 할 때쯤 손을 내밀어주는 거야.”

“…….”

“나는 다시 설레서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너를 찾아갔지.”

“…….”

“그런 나를 파티장 밖에 세워두고, 밤새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게 하고, 널 바라보며 우는 날 모른 체하고…….”

“…….”

“내가 네게 찾아갈 때마다 곤란한 표정으로 애써 웃었으면서, 고개를 숙이면 손을 내밀어줬지.”

“날이 추워요.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세요. 영애는 영애로 충분하니. 난 당신…… 멋지다고 생각하니까.”

“달리아 양을 보기 전이었다면, 그랬다면 당신을 사랑했을 수도.”

“—그런 말들로 나를 한껏 기대하게 했지만, 결국 지옥으로 처박은 것도 너였어!”

“…….”

“너도 알지. 네가 왜 그랬는지. 설마 이번에도 치졸하게 모른 체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난…… 난 그때의 내가 아니라—”

“널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내 시선이 좋았던 거잖아.”

“…….”

“그렇게 자존감을 채웠잖아. 그리고 그렇게 얻은 용기로 달리아에게 갔잖아.”

나는 표독하게 빈센트를 노려봤다.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지금도 너를 그렇게 애타게 그리는 여자들이 수없이 많을 텐데.”

“…….”

나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가요, 아빠.”

“……그래.”

아빠와 함께 성큼성큼 걷는 와중에 빈센트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한 건 당신 하나야!”

“웃기고 있어.”

“그래서 난 확신할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진짜 내 본심은……!”

“헛소리하고 앉았네.”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완전히 사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알렉시스, 오라버니들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남들 눈이 있는 곳을 지날 때는 대기해 있던 구가 결계를 펼쳐주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아빠도 조용히 내 등을 바라봐주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까지.

오라버니들이 황급히 물었다.

“얘기 잘했어? 뭐래? 믿는 것 같아?”

“아버지,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살바토레의 의중은 어떠한지요.”

오라버니들이 나와 아빠를 둘러싸고 물었다.

그런데 알렉시스는…….

“뭐야, 너.”

내게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양손으로 내 뺨을 잡았다.

“얼굴이 왜 이래.”

“……뭐가.”

“더 못생겨졌잖아!”

이건 ‘왜 그렇게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는 결코 내 외모를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외적으로 보이는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쪼그라들까 봐.

세상에서 제일 당당하게 굴어도 속엔 여전히 연약한 알맹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말해. 무슨 일이야.”

그 어떤 순간에도 내가 최우선인 남자.

“에릴로트.”

저는 전투로 피범벅이 되었으면서, 내 표정 하나에 더 겁내고…….

‘너로 인해서 알았어.’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헌신하기 때문이 아니야.

헌신하는 자신조차 저울에 올려두지 않기 때문이야.

너는 헌신하는 스스로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잖아.

부끄럽다고도, 자존심 상한다고도 느끼지 않잖아.

“이씨…… 네 앞에서 자꾸만 우는 게 짜증 나.”

내가 울먹이자, 오라버니들과 아빠가 흠칫했다.

알렉시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두 번이야?”

“맨날 우는 것 같다고…….”

“울면 안 돼?”

“창피하잖아……. 남들이 다 손가락질할걸.”

“사람이 울 수도 있지, 운다고 손가락질하는 놈들이 이상한 거잖아.”

나는 알렉시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라버니들이 울컥 소리쳤다.

“저 놈이 진짜……!”

“오늘은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군요, 황자님.”

“아버지의 앞입니다. 떨어지세요.”

발자크, 요슈아, 리시먼드가 살벌하게 말했다.

그런데…….

“놔둬.”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

나도, 알렉시스도, 오라버니들까지 흠칫해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알렉시스를 잠깐 노려봤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가 끝나면 술 한잔하지.”

“……예?”

“그렇다고 황자를 인정한다는 건 아닙니다!”

“…….”

기회 정도는 주겠다는 건가?

아빠는 으드득, 으득, 이를 갈며 걸었다.

오라버니들이 급히 아빠를 쫓아가며 물었다.

“미치셨어요?”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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