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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336화 (337/390)

336화.

발자크는 꽥 소리치다가 아빠에게 걷어차이기도 했다.

나와 알렉시스는 눈이 동그래져서 서로를 쳐다봤다.

"네 아버지가…….”

“술 마실 줄 알아?”

“그럼 못 마시겠어?”

“아기가 언제 커서 술도 마신대.”

내가 중얼거리자, 알렉시스가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너와 같이 있는 게 제일 즐거워.’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알렉시스가 내 양 볼을 잡아, 늘리기 전까지.

“으그그극……!”

“나이는 늘 내가 많았어. 누가 아기야, 누가.”

“나 바! (놔 봐!)”

“항복?”

“으으윽……!”

장난을 치는 것.

사소한 말에 씩씩거리는 것.

토라져서 눈을 흘기고 있으면 슥, 간식거리를 건네는 것.

못 이기는 척 풀어져선 다시 깔깔 웃는 것.

너와 함께일 땐 그런 작은 것들 마저 못 견디게 즐거웠다.

나는 알렉시스의 머리를 확, 끌어당기며 말했다.

“조아애. (좋아해.)”

알렉시스가 내 뺨을 잡은 손을 놓으며 오만하게 말했다.

“알아.”

“넌?”

“그런 말은 쉽게 하지 않아.”

그러며 알렉시스가 뒷짐을 지고 휙, 걸어가 버렸다.

“죽을래!”

“황족 시해가 꿈이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저벅저벅 걷는 알렉시스를 쪼르르 쫓아갔다.

“언제부터 황자님이셨다고.”

“처음부터.”

“그래서 넌 어떤데. 말을 해줘야 알지!”

“듣고 싶으면 업혀보든가.”

“좋아. 간다.”

폴짝 등에 매달리자 알렉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하지 않아도 실은 네 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 마음이란 것을.

봐, 알렉시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전쟁통에서도 웃게 하잖아.

딱 달라붙어서 장난을 치던 때였다.

“에릴로트 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알렉시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흰 후드를 뒤집어쓴 수호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시타브바들과 헤라, 구 등의 젊은 수호자들은 굳은 얼굴로 알렉시스를 노려보았다.

‘젊었을 때 메시아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고 했지, 참.’

웃기고들 있다.

나는 본 척도 않고, 수호자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쿠말 님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며칠 전, 수호자들은 내게 날 납치한 내막을 말해줬다.

‘누군가’로부터 메시아의 진정한 역할을 들었는데, 그 역할이라는 것이…….

‘또 한 번 몰려올 폭풍을 희생하여 막아낼 자라는 것.’

역대 쿠말에게만 전해지는 은밀한 이야기라고 했다.

수호자들이 현 쿠말에게 그 내용을 따지자, 그는 말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너희 정보력으로도 실마리조차 못 얻었다면 당분간 찾는 건 무리겠네.”

“예.”

“내 마지막 금제의 제물은?”

“그 또한…….”

마시타브바 동생의 표정이 흐려졌다.

“도움이 되는 게 없네.”

매정하게 말하니, 수호자들이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파빌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다른 도움이 될 수는 있을 듯합니다.”

“다른 도움?”

“금제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완전한 힘을 찾는 것은 제물을 없애지 않는 한 불가능하지만…….”

파빌은 결의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초월 영역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무슨 방법이기에?”

“고대엔 지금처럼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가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겠지.

고대인들은 지금보다 몇십 배는 강력한 가호를 사용했다.

아이들이 그런 힘을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이성과 지혜를 갖추게 되면 완전한 힘을 갖추도록 의식을 치른다고 합니다.”

고대의 기억에서 본 적이 있었다.

‘고대의 나도 이름을 받으며 탈피 의식을 할 거라고 했어.’

“그 의식이 뭔데?”

“<탈피 의식>입니다.”

“탈피 의식이라…….”

“의식을 치르면 진정한 힘의 일부나마 사용할 수 있으실 것으로 추측합니다. 한데…….”

“한데?”

“매우 위험합니다.”

알렉시스가 흠칫, 나를 쳐다봤다.

“그렇다는데 할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그래, 할 것 없—”

“해야지!”

수호자들과 알렉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내 삶은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에릴로트!”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리미에를 저지할 수 있다면 하겠어.”

이제 이건 황족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아빠와 그리미에, 그리고 나와 달리아가 참전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며칠 후, 바닷가 근처에 어느 폐쇄된 마을.

“아아아악—!”

허름한 오두막 밖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두막 안에선 마법진을 둘러싼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영창했다.

진 안의 인물은 흰자위가 온통 새빨개져선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달리아.

그녀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일라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더는 버티시지 못할 겁니다. 이러다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싸늘한 표정으로 의식을 지켜보던 그리미에는 조용히 말했다.

“출력을 높여라.”

“하지만…….”

“어서—!”

마법사들이 분출하는 마력의 양이 높아지자, 달리아의 눈에선 실핏줄이 끊어지며 피가 섞여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아악……!”

아일라는 희게 질린 얼굴로 달리아를 지켜보았다.

의식을 지켜보던 귀족들 중 유난히 젊은 자가 속삭였다.

“이러다 달리아 님께서 사망하시기라도 하면 우리 계획은 어찌 되는 것이냐.”

“……성공할 것입니다.”

아일라 또한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리아의 개화는 예상보다 더뎠고, 전쟁의 시작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해서, 고대에서 사용되었던 ‘탈피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리미에가 말했다.

“버텨라, 달리아.”

“아윽, 으, 그, 그그극…… 꺄아아아아—!”

“버텨내—!!”

그가 고함을 지른 순간이었다.

달리아로부터 뿜어져 나온 마력의 파동에 영창하던 마법사들이 각혈하며 비틀거렸다.

“커억—!”

“컥……!”

쿵!

마법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아일라는 서둘러 가장 먼저 쓰러진 마법사의 맥을 짚었다.

“주, 죽었…….”

그때였다.

털썩, 주저앉은 달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아, 아아…….”

기묘한 감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주변의 모든 소리와 흐름이 현저히 느리게 느껴졌다.

그리미에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이노락스가 가볍게 날아가 달리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 여자는 누구…….”

아일라가 미간을 좁혔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의아한 표정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리미에는 환희에 젖었다.

“보이느냐.”

“사람들…… 유령 같은…… 아일라 언니의 뒤에도, 기사들에게도…….”

이노락스는 소리 높여 깔깔깔 웃었다.

[성공이야! 드디어 ‘그 애’의 능력을 개화한 것이야!]

이노락스가 달리아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달리아는 흠칫, 물러났다.

“누, 누구예요, 당신.”

[나는 이노락스. 지금의 네게도, 비천하던 고대의 네게도 힘을 선사한 사도.]

“고대의 나……?”

중얼거리던 달리아가 흠칫, 옷깃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동공이 좁아지며 기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일라와 귀족들은 흠칫 그리미에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어찌 된 것입니까? 진정 성공한 것이 맞느냐는 말입니다!”

“망가진 것이 아닙니까?”

달리아는 입을 뻐끔거렸다.

엄청난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 * *

그 시각, 크로노트 회의 본지.

“아아아아악—!”

에릴로트의 비명이 제단을 울렸다.

마법진의 외곽에서 영창하던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흠칫, 그녀를 쳐다봤다.

“영창을 멈추지 마라!”

파빌이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헤라가 마시타브바의 동생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에릴로트 님의 혼과 육체의 연결을 부숴놨어! 이대로 의식이 중지되면 혼이 이계를 떠돌 거야!”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제기랄!” 중얼거리며 영창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몬드와 발자크, 요슈아, 리시먼드는 희게 질렸다.

“아버지…….”

발자크는 울먹이며 데이몬드를 불렀다.

데이몬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견뎌내라.”

“못 보겠다고요! 어떻게 더 봐요!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발자크.”

요슈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리고 데이몬드의 손을 향해 눈짓했다.

말아쥔 주먹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의식을 시작하면 중지할 수 없다는 것을 들었잖아.”

“하지만 난 못 보겠다고.”

발자크가 뚝뚝 눈물을 흘렸다.

내가, 우리가 약해서.

그래서 저 애가 저런 고통을 감내하며 힘을 갈망하는 것만 같아서.

리시먼드 또한 희게 질린 얼굴을 떨구었다.

요슈아는 이를 악물었다.

‘우린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저 애의 희생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

어떤 과정을 겪어 우리를 지켜낼 힘을 얻었는지 눈과 혼에 새겨야 했다.

아버지 또한 그러한 이유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터다.

‘저 녀석들 또한…….’

요슈아는 새파랗게 질린 한지혁과 콘라드, 미켈란, 잔느…… 그리고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그때였다.

쿵—!

쿠궁, 쿵!

에릴로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수호자들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발자크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사벨라에게 달려갔다.

“뭐야! 왜 이런 거야! 영창을 멈추면 안 된다면서, 야! 죽었냐?!”

“시, 시끄러워요. 우리의 수호성은 사자들의 피와 살로 만들어졌다고요. 주, 죽을 리 있겠어요?”

“그럼 일어나 봐. 의식을 멈추면 안 된다면서!”

“우, 우리가 아니면 죽었을 일이라고요! 골 아프니까 제발 조용히 좀……!”

이사벨라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수호자들 또한 비척비척 제단을 향해 걸어가던 그 때.

에릴로트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리고…….

“어?”

“이게 뭐야…….”

강력한 파동이 뿜어져 나오며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눈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에릴로트는 신이 최초로 빚은 가장 강력한 생명의 수호를 받는 자.

홀로 과거의 기억을 읽던 달리아와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다.

엄청난 파동이 주변 생명들까지 끌어들인다.

에릴로트의 빛에 감싸인 인물들의 머릿속에 에릴로트의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다.

* * *

나는 끙, 신음하며 머리를 쥐었다.

‘아우, 머리 깨지겠네.’

탈피 의식이란 거 두 번 할 게 아니다.

첫 번째 삶에서 죽을 때보다 훨씬 아팠다.

‘이런 고통이란 게 존재하는구나’ 싶을 만큼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부유감이 느껴진다.

마치 고대의 기억을 읽었을 때나, 이계로 떠날 때처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고대의 기억이로구만.’

16~18세쯤으로 보이는 고대의 나, 그러니까 일로테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빠들한테 들키면 진짜 죽을 거야.]

일로테의 말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뒤를 달리던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러면 도박장에 안 가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 제깟 게 감히 따님께 충고를 드린 건 아니고요……!]

[쉿, 쉿! 들키겠어. 조용히 해.]

[죄, 죄송합…….]

[그리고 충고해도 돼. 뭐 어때?]

일로테는 기둥 뒤에 딱 숨어서 소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때.

[그래, 충고는 중요하지.]

바키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로테는 흠칫, 굳어졌다.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바키라는 [이놈—!] 소리치며 일로테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아파, 아파요! 아빠!]

[아프라고 잡지, 응? 간지러우라고 잡겠어?!]

[잘못했어요!]

[늘 말만 잘하지. 오늘은 가만두지 않겠어. 따라와!]

[안 가면 안 될까요?]

[……이게 진짜.]

바키라가 눈을 부라리자, 일로테는 울적한 표정으로 그 뒤를 쫓았다.

복도를 걷는 내내 궁인들과 귀족들이 하하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따님. 어디 가십니까?]

[혼나러 가…….]

[도박장에 가시려고 했나 보지요?]

[내 꿈은 프로 카드꾼이니까!]

그러다 결국 바키라에게 쥐어 박혔다.

[악!]

사람들이 하하하, 웃으며 일로테를 귀엽게 쳐다봤다.

후드를 뒤집어쓴 소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녕, 달리아. 좋은 아침이구나.]

[아, 안녕하세요!]

[그래, 일은 잘하고 있고?]

[네에, 따님께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너를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에게서 구해주었다고 했지?]

[네…….]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달리아. 쟤가 달리아구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일로테를 쫓아가지 않고, 달리아의 뒤를 따라갔다.

악역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

달리아는 부엌에서 일하는 궁인이었다.

제사장의 궁엔 뛰어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데, 일로테가 데려왔다는 이유만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래도 달리아는 미움을 사진 않았다.

‘성실하네.’

정말로 성실하게 굴었다.

일로테를 아주 좋아하는 듯했고.

‘그런데 왜 사이가 틀어졌지.’

기억이 빠르게 흘러 몇 개월쯤 뒤.

성실한 달리아는 부엌에서 벗어나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일로테는 공부 중이었다.

펜을 물고 있는 게 아주 지루해보였다.

그 모습을 심부름 온 달리아가 보게 되었다.

[공부하셔요?]

그러자 일로테를 지켜보던 심마흐가 웃으며 말했다.

[나머지 숙제란다. 바키라 님이 내주셨는데 오늘도 해오지 않으셔서.]

[난 숫자가 싫어. 진짜 지루해.]

일로테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수호자들, 그러니까 일로테의 전담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와드릴게요.]

[숙제가 좀 어렵긴 해.]

쿠말이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드려선 안 되잖아.]

[그래놓고 본인도 문제를 풀고 계시면서?]

쿠말은 슥,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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