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일로테는 조용히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미카엘 아빠가 말씀하셨어. 인간은 만물의 꼭대기에서 군림하지만, 때론 금수보다 못한 짓을 한다고.]
[네?]
달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일로테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또, 미카엘 아빠는 인간은 그토록 무서운 생물이지만, 반면에 가장 사랑스럽기도 하노라고 말씀해주셨어.]
[…….]
[반성이란 걸 하거든.]
[…….]
[악행을 후회하면 도태되는 짐승의 세계와 달리, 인간은 뉘우칠 기회가 있다는 뜻이야.]
일로테가 다정한 표정으로 달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달리아—]
[좀 더 공부를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
[저는 인간이 아니에요. 노예지. 그리고 따님도 정확히 따지면…….]
달리아는 일로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숙제는 하셨나요? 또 도박장에 가느라 못하셨겠지요?]
어휴, 한숨 내쉰 달리아가 한쪽 뺨을 감싸며 말했다.
[내년이면 성년인데 조금쯤은 의젓하게 구시는 게 어떨까요? 제사장과 사자님들이 염려되어 드리는 충언이에요.]
[…….]
[충언이란 단어는 아셔요? 아하하, 농담이에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자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정신이 아니구만. 어쨌든 이 시대에 저 제사장의 딸은 황녀나 마찬가지인 거잖아.”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발자크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노예가 어떻게 황녀에게 저토록 무례한 거지?”
“만만하니까요.”
한지혁이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제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상급자라도 만만하다 싶으면 무시하죠.”
“설마.”
“정말입니다. 학생이 만만한 교사를 무시하기도 하고, 계급 체계가 어느 곳보다 뚜렷한 군대에서도 하극상이 일어나기도 하죠.”
요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야 평생 강자로 살았고, 주변에도 권력을 쥔 자들이 저렇게 무른 경우가 없으니 몰랐을 테지.”
“하기야, 천민 출신 하급비(妃)가 총애를 믿고 황후와 황태자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으니.”
콘라드도 동의했다.
“무엇보다 저 달리아는 제사장 딸의 평가서를 작성하는 각궁의 장의 총애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제사장의 딸은 번번이 사고를 치는 말괄량이고.”
발자크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잡아먹히겠구만.”
그런데 그때였다.
[위병은 명을 받들라!]
일로테가 매섭게 소리쳤다.
위병들이 황급히 달려왔고, 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신가요? 명은 제게 내리셔도 될 텐—]
[연통장(각궁의 연락을 총괄하는 직책) 달리아를 추포해라.]
[……!]
달리아는 흠칫, 일로테를 쳐다봤다.
[제, 제게 무슨 죄가 있다고 추포하신단 말이에요?!]
[연통장 달리아는 제사장의 뒤를 이어 인계를 다스릴 세계수의 후손에게 불손하고, 각궁에 파벌을 만들어 혼란케 하였으니 죄인이다.]
세계수의 후손!
그건 세계수에서 태어난 제사장과 사자들의 후계인 일로테를 뜻하는 말이었다.
일로테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세계수의 후손임을 칭한 적이 없었다.
[세계수의 후손을 뵙습니다.]
[나는 그냥 딸이에요.]
[예?]
[이름이 없어서 사람들은 나를 ‘따님’이라고 부르고요. 아빠들은 ‘딸’이나 ‘아기’라고 불러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귀인도 나를 딸이나, 따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세계수의 후손이 아니라!]
도리어 그녀를 세계수의 후손이라 부르는 자에게 해맑게 웃으며 정정했다.
권위는 불리는 이름에 가장 먼저 깃든다.
세계수의 후손이라는 권위에 짓눌리지 말고, 일로테 자신으로 봐달라는 뜻이었다.
달리아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요! 따님, 오해예요! 저는 따님을 우습게 여긴 적이 없다고요!]
[너는 지금도 거짓을 입에 담아 나를 우롱하는구나.]
[따, 따님!]
[연통장 달리아를 옥사에 가둬라. 오전, 오후 세 시간씩 신께 감사 인사를 하고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갖게 해야 할 것이다.]
위병들이 우렁차게 [예!] 대답했다.
그대로 달리아는 끌려갔다.
[따님! 따님—!]
발자크와 한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착하기만 한 사고뭉치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좀…….”
그들이 중얼거리고 있던 찰나, 요슈아는 정신없이 일로테를 쳐다봤다.
일로테는 무감한 표정으로 끌려가는 달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애, 에릴로트와 닮았어.”
“닮았다고? 에릴로트는 공부 귀신이야. 한 번도 숙제를 안 해온 적이 없다고.”
“그게 아니라.”
요슈아는 발자크를 멸시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저 애가 부러 궁 내에서 위병을 불러 소란을 일으킨 이유가 뭐겠어.”
“그야 달리아를 벌하고…… 아.”
“그래, 궁인들에게 주의를 준 거야. 더 궁이 소란스러워지면 너희들도 단죄하겠다고.”
“뭐…… 닮긴 했네.”
“본가의 영양이 공격당했다. 아스트라 공작군은 무얼 하고 있느냐!”
“반역인가.”
“그 자의 공격에 대항하였을 뿐입니다.”
“황궁의 사자다.”
“하면 황궁의 사자가 본가의 영양을 공격한 겁니까?”
“…….”
“묻습니다. 저 자, 황궁의 사자입니까?”
“…….”
“말씀이 없으시니, 네가 대답해야겠다. 너, 황궁의 사자인가!”
평소엔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사람을 사귀나, 권위를 세울 때는 정확히 분간하는 점.
자애와 유약함을 착각하지 않는 점.
그리고…….
[따님, 어찌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까.]
[별로.]
[별로는 무슨. 그리 속상하실 거라면 추포령을 내리시지 마시지요.]
[이건 세계수의 후손으로 선택된 내가 감당해야 할 슬픔이야.]
권위에 의무가 있음을 안다는 점까지.
발자크가 빙그레 웃었다.
“당연하지. 누구의 전생인데.”
리시먼드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일로테를 바라보았다.
“본래의 혼부터 강했던 거지.”
삼 형제와 콘라드,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였다.
“하지만 물러.”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남자가 흠칫하여 등 뒤를 쳐다보았다.
에릴로트가 차가운 얼굴로 일로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자크는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디 있던 거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난 오빠들과는 다른 시간 축에 있었나 봐. 아빠와 현대의 수호자들은?”
발자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도 다른 시간 축에 계시는 모양이야. 수호자들은 알 바 아니고.”
에릴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슈아가 물었다.
“무르다니? 무슨 뜻이지?”
“일로테는 인간의 악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어. 제사장과 사자들이 만든 꿈 같은 세상 안에서 글로만 배웠지. 그래서…….”
그 순간,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2주 뒤쯤.
달리아는 일로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따님. 제가 그간 무슨 짓을 했던 걸까요.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어요!]
[달리아…….]
[주인에게 버려진 제 주제에 임관을 받으니 정신이 나갔나 봐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버려진 내가 이렇게 엄청난 사람이 됐다고 말이에요……!]
[응, 그랬구나.]
[옥사에서 반성하고 또 반성했답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면, 따님께서 혹시나 제게 한 번 더 아량을 베풀어 주신다면 다시는…… 결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
달리아는 엉엉 울며 일로테에게 매달렸다.
일로테는 헤헤 웃고 달리아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달리아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사람은 후회하고, 반성하면 다르게 살 기회가 있어.]
[따님…….]
[용서할게. 응, 용서하고말고!]
달리아는 엉엉 울며 일로테의 품에 안겼다.
일로테는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달리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달리아가 자신의 품 안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고.
그녀는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매섭게 일로테를 노려보았다.
발자크가 중얼거렸다.
“무르구만.”
에릴로트는 팔짱을 낀 채로 달리아를 지그시 쳐다봤다.
“세상의 혹독함을 전혀 모르는 자는 군림할 수 없는 법이지.”
얼마쯤 뒤, 달리아는 다시 복귀했다.
남들 앞에선 매우 반성한 듯했으나, 그녀가 연통장으로 복귀한 후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신실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비에 젖은 달리아는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노락스, 알려줘요.]
[또 무엇이 알고 싶을까.]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법.]
이노락스는 우후훗 웃었다.
[의도를 명확히 하려무나, 귀여운 소녀야.]
달리아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지혜, 처세, 능력, 그 어느 하나 나보다 못한 그 바보를 끌어내릴 방법을 말이에요—!!]
우르르, 쾅—!
우레가 하늘을 갈랐다.
이노락스가 뱀처럼 간교하게 속삭였다.
[나를 풀어다오. 하면 너를 가장 높은 곳에 앉혀줄 것이다.]
달리아의 눈이 검게 일렁였다.
[방법은?]
[태사자의 검. 그것으로 은잔을 부수면 나는 이 지독한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단다.]
[좋아요. 마침 그 바보의 성년식이에요. 태사자의 검으로 제물을 베어 신께 바치겠지요. 연통장인 나라면 운반하는 틈에 가져올 수 있을 거예요.]
에릴로트는 눈을 꽉 감았다.
이것이었다.
이것으로 일로테의 아름답기만 하던 꿈이 깨지고, 파멸의 장이 열렸다.
* * *
그 시각, 현재의 수호자들이 있는 시간 축.
마시타브바의 동생은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년식을 닷새 앞둔 일로테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녀는 황금빛 털을 가진 커다란 개와 함께 정원을 달리고 있었다.
[옳지. 그래, 잘한다!]
거대한 개가 일로테의 품에 뛰어들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가 주저앉자 고대의 수호자들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조심하시지 않고요.]
고대의 수후르마시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로테의 치마를 털어주었다.
[응, 고마워.]
[‘다음부턴 조심할게’겠죠?]
고대의 수후르마시가 눈을 가늘게 뜨자, 일로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 언제라도 수후르마시가 구해줄 거잖아.]
[예?]
[이렇게 치마를 털어주고, 다치지 않았나 살펴줄 거야. 나는 그게 좋아.]
[제가 주인의 명으로 얼마나 많은 자들을 살해했는지 알고나 하시는 말씀이신지…….]
[알아.]
[…….]
[하지만 폐기될 것을 짐작하면서도 주인의 명을 어기고 가여운 모녀를 살려준 것도 수후르마시란 걸 알지.]
[…….]
[엄청나게 멋진 일이잖아?]
고대의 수후르마시가 멍하니 일로테를 바라보았다.
헤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저런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니. 무리지.’
치마를 마저 툭툭 턴 일로테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보고 [응?] 하며 달려갔다.
그러곤 수풀로 쏙 고개를 내밀었다.
[마시타브바들은 왜 그러고 있어?]
[…….]
[…….]
[말해줄 수 없어?]
고대의 마시타브바 중 형이 웅얼거렸다.
[저희가 또 가호를 잘못 써서 따님의 마음을 다치게 하면 안 되니까요…….]
고대 마시타브바의 동생은 잔뜩 굳은 얼굴로 허공만 보고 있었다.
고대의 마시타브바들은 일주일 전, 일로테의 새를 죽였다.
성격이 아주 나쁜 새였다.
걸핏하면 일로테의 손을 쪼고, 발톱으로 얼굴을 할퀴었다.
그날은 참을 수가 없었다.
눈을 노렸는데, 일로테가 얼른 고개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실명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관자놀이는 할퀴어져서 얼마나 피가 흘렀는지 모른다.
양탄자가 흥건해졌을 정도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새의 죽음을.
“새가 죽고 엄청나게 우셨지…….”
현대의 우르굴라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하자, 현대의 마시타브바들이 조용해졌다.
일로테는 의기소침한 고대의 마시타브바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새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는 사람은 나야.]
[……예?]
[……예?]
[너희는 내 사람들이니까 책임은 내게 있어.]
[…….]
[…….]
[내가 좀 더 영리하게 새를 길렀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따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더 짜증나니까.]
고대 마시타브바의 동생이었다.
고대의 수호자들도, 현대의 수호자들도 흠칫했다.
현대의 수호자인 헤라와 제르모 공작이 쯧, 혀를 찼다.
“네 성격이 더러운 건 수호성 때부터 있던 일이구만.”
“그렇군.”
현대 마시타브바의 동생은 칫, 혀를 찼다.
고대 마시타브바의 동생이 소리쳤다.
[결국 죽인 건 나잖아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해 봐야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요! 난 이 힘이 싫어. 불행의 원천이라고, 제기랄!]
[상냥해서 그래.]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마시는 너무 상냥해서 새를 죽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는 거야.]
[…….]
[힘이 싫은 게 아니라,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신이 싫은 거잖아?]
[…….]
[그러면 연습하자. 하고, 또 하고, 또또 해서 지금보다 나아지자. 그러면 스스로가 싫지 않을 거야.]
세상에서 제일 바보처럼 구는데, 어느 때는 누구보다 현명한 답을 준다.
“저 사람이 메시아…….”
“그래, 메시아는 저런 사람이었구나.”
수호자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순간 장면이 크게 요동치며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변했다.
어느 지점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흠칫 놀란 마시타브바들이 재빨리 가호 시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아빠! ……가 아니고 수호자들이네.”
시간축을 찢고 등장한 건 에릴로트와 삼 형제, 콘라드, 한지혁이었다.
마시타브바 동생이 울컥 소리쳤다.
“조심 좀 하라고요! 죽일 뻔했잖습니까!”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너희가 조심하면 될 것 아냐!”
“조심한다고 될 힘인 줄 압니까? 이런 내가 나도 싫다고요!”
“시끄러워!”
에릴로트가 빽 소리치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빠는 없네. ……그리고 너!”
“예?”
“네가 싫은 게 아니라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네가 싫은 거잖아. 그러면 연습하면 될 것 아냐!”
“…….”
“엄한 사람한테 성질을—”
에릴로트가 투덜거린 순간이었다.
마시타브바 동생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여기 있었구나.”
“이게 무슨 짓이야. 안 놔?!”
사실은 수호자 모두 가슴이 시렸다.
저토록 다정한 메시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하지만 있었다.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우리의 메시아.’
그때였다.
“그 손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