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 * *
“아빠!”
나는 깜짝 놀라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날이 선 표정으로 마시타브바 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시타브바 동생은 천천히 나를 안은 팔에서 힘을 풀었다.
난 냉큼 아빠에게 달려갔다.
“어디 계셨어요?”
“줄곧 이곳에.”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자면 이랬다.
나.
아빠.
수호자들.
오빠들과 콘라드, 한지혁.
‘그리고 아마도 알렉시스까지.’
이렇게 다섯 무리는 각자 다른 시간 축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시간 축은 제각기 어느 부분에선 빠르고, 또 어느 부분에선 느리게 움직인다.
자신이 있는 시간과 다른 그룹이 있는 시간이 일치하게 되면 만나는 모양이었다.
‘그럼 알렉시스와도 언젠간 만날 수 있겠어.’
“뭘 보셨어요?”
“이노락스가 막 풀려났다.”
나와 사람들은 다시 고대의 일에 집중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이노락스가 풀려났다.
달리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 애의 발치에 태사자의 검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이노락스는…….
[꺄하하하! 아아아아—! 드디어 풀려났어, 드디어……!]
소름 끼치게 웃으며 신실을 마구 뛰어다녔다.
달리아는 중얼거렸다.
[태, 태사자의 검에 금이 갔어…… 어떡해. 어떻게 해! 이노락스 님, 이런 말은 없으셨……!]
쿵—!
표독하게 이노락스를 쏘아보던 달리아가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이노락스의 힘이었다.
달리아가 [아으, 아으으윽…….] 신음했다.
이노락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황홀한 탄성을 터뜨렸다.
[이, 이노락스 님.]
[음?]
[제, 제게 어떻게…….]
[감히 제작된 인간 따위가 내 앞에서 언성을 높였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니?]
달리아는 흠칫, 굳어졌다.
예상과 다른 오만한 태도 때문일 터였다.
그 때였다.
[이노락스 님.]
[이노락스 님……!]
어떤 무리가 신실에 들이닥쳤다.
‘저 사람들은…….’
고대의 기억에서 종종 보던 사내들이다.
세일론, 사자들과 늘 마찰을 빚던 강경파의 관료들.
그들은 제작된 인간의 처우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었다.
“어째서 노예들에게 금술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십니까.”
“노예를 제작한 최초의 목적은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이건만, 대관절 어째서 주인이 그들의 목숨을 지켜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사자들과 제사장의 피와 살로 제작된 아이라지만, 제작된 물건에 어찌 세계수의 후손이란 중책을 맡기십니까—!”
‘그래, 그 자들이야.’
그들은 이노락스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
[이노락스 님의 기운을 느끼고 급히 왔사온데, 대체 어떻게…….]
[맙소사. 인간은 결코 접근조차 못 하는 봉인에서 어찌…….]
이노락스가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저 아이가 태사자의 검을 가져와 봉인의 결계를 파괴해주었단다.]
[제작된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군요.]
[아니지, 아니야.]
이노락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분께서 이 아이를 보내 나를 풀어주신 게지.]
[그 분이라시면…….]
[세계수, 창조자이며 태초의 지배자…… 우리의 신이다.]
깔깔 소리높여 웃던 이노락스가 빙글, 몸을 돌려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그간 잘들 지냈느냐.]
[어찌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제사장의 만용이 도를 넘습니다.]
[아아, 세일론. 나의 세일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지만, 또한 가장 오만하지.]
이노락스가 머리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 성으로 돌아가야겠다.]
[모시겠습니다.]
이노락스와 사내들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막 문을 나서던 중, 사내 하나가 물었다.
[저 아이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두어라. 저 애 덕에 내가 풀려난 것을 알면 세일론이 처리하겠지.]
그렇게 이노락스가 떠났다.
달리아는 희게 질린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이노락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발자크가 말했다.
“달리아는 저렇게 사라지는 건가?”
“아니.”
“어째서? 제사장이나 사자들이 봉인을 함부로 풀었단 것을 알면 벌할 것 아냐.”
“일로테의 성년식까지 사자들은 이노락스가 풀려난 것을 몰랐어. 어쩌면…….”
내가 중얼거리던 차에 시간이 빠르게 움직였다.
콘라드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보십시오! 달리아가 궁관을 죽였습니다!”
정말이었다.
달리아는 신실의 이상을 느끼고 온 궁관을 해쳤다.
철컹, 소리와 함께 달리아의 손에서 태사자의 검이 떨어졌다.
[그,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왜, 왜, 와서, 왜, 나를 자, 자극해서…….]
그러곤 궁관의 시체를 질질 끌고 숲으로 향했다.
“방해가 되었던 다른 사람들을 없앨 때와 마찬가지로 이계의 문을 열려는 모양입니다.”
그랬다.
이노락스가 달리아에게 알려준 방해꾼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법.
그건 이계의 틈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었다.
달리아는 바삐 움직였다.
“신실의 물건을 훔치잖아…….”
한지혁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달리아는 신실의 물건을 잔뜩 훔친 후,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달리아가 울며 매달렸다.
[신실에 도둑이 들어서……!]
[어찌 신실에 도둑이 들어! 정확히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겠느냐!]
[모, 모르겠어요. 저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그런데 도둑들이 익숙한 얼굴이라…….]
[익숙한 얼굴?]
[상궁 시녀장과 이베론 님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도 라냐 님인 듯했는데…….]
제가 이계의 틈으로 밀어 넣은 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사자들은 급히 조사를 시작했다.
달리아 또한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으나,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하고 조사가 중지되었다.
일로테의 성년식 때문이었다.
* * *
지난번에 보았던 성년식 사건이 펼쳐졌다.
[세일론 님께선 어디 가시고 노예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
[말씀 삼가십시오. 제사장과 사자들께서 피와 살을 나누어준 귀한 혼이십니다.]
[제작된 것이 귀해 봐야 얼마나 귀하기에. 침실 노예로라도 쓰는가 보지?]
이노락스가 사자들과 세일론이 자리를 비운 일로테의 성년식에 들이닥쳤고—
[따님을 위협한다면 맞서겠습니다.]
[말도 안 돼. 저 가호는 미카엘 님의 <분해>가 아닌가! 감히 그분의 가호로 날 막아서?!]
쿠말을 비롯한 수호자들이 맞섰으며—
[따…… 님…….]
[……브.]
[…….]
[기르타브─!!]
기르타브가 죽었다.
그렇게…….
“저, 저게 네 진정한 힘이란 말이야?”
“메시아의 진정한 힘이란 것이…….”
발자크와 수호자들이 기가 질려 일로테의 가호를 바라보았다.
세계의 흐름을 수정하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일로테는 행복하지 않았다.
세상이 분열했다.
세일론, 사자들의 무리.
이노락스의 무리.
이노락스의 무리는 노예를 수없이 많이 제작했다.
그렇게 제작된 노예들을 성에 둘러 살아있는 결계로 썼다.
온갖 금술로 인공 마수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미에의 인공 마수!”
내가 소리치자, 오빠들이 흠칫했다.
“그 인공 마수가 고대에 개발되었던 금술이란 말이야?”
“역시 이노락스가 수호성으로 붙어 있는 거야! 그 여자가 인공 마수의 제작법을 알려준 거라고!”
고대는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이대로 이노락스를 그냥 둘 순 없어.]
[재봉인해야 한다.]
사자들의 말에 제사장은 싸늘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아니. 재봉인만으론 안 돼.]
[하면?]
[이번엔 기필코 그 자를 인계에서 사라지게 하겠다.]
일로테는 문 뒤편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따님…….]
수호자들이 염려 어린 얼굴로 일로테를 불렀다.
그녀는 기르타브가 죽은 뒤로 눈에 띄게 말이 없어졌다.
이노락스의 일로 사자들도, 제사장도 바빴기에 그녀를 살펴주는 사람이라곤 수호자뿐이었다.
그나마도 수호자 중 공격계 가호를 가진 자는 전쟁에 동원되어 자리를 비웠다.
일로테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자리를 벗어났다.
[따님? 따님!]
수호자들이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향한 곳은…….
[그렇다니까요. 내가 웃겨서 정말…… 따님?]
[달리아.]
달리아가 있는 곳이었다.
이노락스가 봉인에서 풀려난 것은 그녀 추종자들의 짓으로 결론지어졌다.
달리아는 여전히 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일로테의 표정이 매서워 보이자, 궁인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주었다.
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로테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너지? 네가 이노락스를 풀어주었지?]
[……!]
[탓하려는 게 아니야. 탓해서 끝날 일이 아니니까.]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 모르겠어요. 아, 참. 쿼로스 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었지.]
달리아가 서둘러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일로테가 그녀를 붙잡았다.
[놔, 놔주세요!]
[이노락스와 연락하고 있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니까요!]
[거짓말 하지 마! 난 ‘읽었어’!]
[……!]
달리아가 새파랗게 질려서 일로테를 쳐다봤다.
일로테의 가호가 그렇게까지 강해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성년식 이후, 일로테는 엄청난 힘을 손에 넣었다.
사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노락스는 세계수의 뿌리에서 태어난 자이기에 읽을 수 없었지만, 네 행동은 읽었어! 다른 관료들 또한!]
[저, 저는…… 전…….]
[그들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어. 너도 알고 있는 방법으로 궁을 칠 준비를 한댔어.]
[모, 몰라요. 전 몰라요!]
[마지막 기회야. 그 방법이 뭐야? 지금껏 네가 사람들을 없애왔던 방법이 뭐냐고.]
[난 모른다니까요!]
쾅!
달리아에게 떠밀린 일로테가 가구 모서리에 찍혀 주저앉았다.
그 소리를 들은 궁인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 따님!]
달리아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저 쓰레기도 끝났구만. 저 꼴을 다른 사람들이 봤으니.”
발자크가 낄낄거렸다.
그런데…….
[내가 균형을 잃었어.]
[예?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달리아가 따님을…….]
[내 실수야.]
일로테는 그렇게 입을 다물었다.
난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로테는 너무 다정하지.”
인간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존재이며, 반성하면 회개할 수 있다.
일로테는 언제나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저런 족속은 변하지 않아.’
첫 번째 삶에서도, 두 번째 삶에서도 몸소 겪은 일이었다.
봐라.
달리아는 그렇게 일로테에 의해 감싸졌으나, 반성하지 않았으니까.
‘그 증거로…….’
그날 밤이었다.
‘따님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잔뜩 혼이 난 달리아는 울며 궁을 나섰다.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건 이노락스였다.
[이, 이노락스 님!]
[잘 지냈니. 어머나, 너는 여전히 울고 있구나.]
그녀가 뺨을 감싸자 달리아는 흠칫 물러났다.
[하, 하지 마세요. 날 배반했으면서!]
[어머나, 얘야. 배반이란 말은 그리 쓰이는 게 아니지. 너는 그저 버려진 것이야.]
[……네?]
[내가 신뢰를 지킬 가치가 없기에.]
달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노락스가 후후 웃으며 달리아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계속 그리 살고 싶니?]
[…….]
[너는 죽을 때까지 권력의 근처를 맴돌 것이다. 왜냐면 그리 태어났거든.]
[…….]
[그러나 제사장의 딸은 다르지. 내가 패배하면 그 애가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
[자, 이건 세상에 다시 없을 기회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내 손을 외면하겠느냐, 아니면 나를 도와 공신이 되겠느냐.]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그래.
결국 이렇게 또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
이노락스가 속삭였다.
[나의 피와 살을 나누어주마.]
[네……? 제가 수, 수호자들처럼 사자의 피와 살을 나눠 받을 수 있다고요?]
[나의 힘은 <약탈>.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이지. 너는 그것으로 건방진 계집의 영혼에 담긴 세계수의 씨앗을 빼앗아라.]
[세계수의 씨앗이요……?]
[그래, 사자들과 세일론 님께선 그 계집을 제작하며 분명 그것을 썼을 것이야. 그러니 그런 엄청난 가호를 가진 것이겠지.]
[……그걸 빼앗으면 저도 그런 가호를 쓸 수 있는 거예요?]
이노락스가 후후 웃었다.
[욕심이 많구나. 그 계집의 가호는 세일론의 피와 살 때문에 발현한 것이다.]
[그럼…….]
[세계수의 씨앗은 유지 장치. 사자들과 세일론이 나눠준 엄청난 힘을 보잘것없는 육신 안에 가둬둘 수 있게 하는 장치다.]
[그걸로 뭘 하실 건데요?]
[이계의 문을 열 것이야.]
[……!]
[필요 없는 자들은 모두 이계에 가둘 거다. 세일론, 사랑스러운 그 이가 가진 내겐 방해가 되는 힘 또한.]
달리아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통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사람들이 없는 틈에 일로테의 침실을 찾았다.
마침 일로테는 아팠다.
가호가 엄청나게 발전한 바람에 몸이 버티지 못하고 열병을 앓게 된 것이다.
[달리아……?]
[너는 다 가졌잖아.]
[무슨…….]
[그러니까 세계수의 씨앗만큼은 내게 줘.]
[너, 대체 무슨 소리를…….]
일로테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때였다.
[나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이러지 마!]
달리아와 일로테가 서로의 몸을 붙잡고 엎치락뒤치락했다.
달리아의 손엔 단도가 들려 있었다. 칼날이 일로테의 몸을 스칠듯했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앗—!
엄청난 빛과 함께 나와 일행의 주변에 글씨들이 펼쳐졌다.
<이대로 위병을 부르면 달리아가 붙잡힐 거야.
본성은 착한 애야.
성실하고, 다정했는 걸.
어쩌지. 어떻게 하지.>
“뭐, 뭐야. 일로테의 생각인가?”
“가호를 조절할 수 없는 겁니다.”
발자크의 말에 제르모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로테가 고민하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