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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350화 (351/390)

350화.

어깨를 늘어뜨린 수호자들을 외면하고, 엄마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눈이 약간 커져서 내 방을 둘러보았다.

누가 보면 놀이동산 구경을 처음 하는 어린애인 줄 알 거다.

“왜 그렇게 신기한 표정이에요?”

내가 킥킥 웃자, 엄마가 흠칫해서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라?”

“…….”

“네?”

“……신기해.”

침묵하던 엄마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방에 그렇게 특이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네 방인 것이 신기해.”

“…….”

“네 취향이 이렇다는 것이 신기하고, 내가 네 방 안에 있다는 것이 신기해.”

“…….”

“내게 너는 너무나 작은 갓난애였거든.”

“얼마나 작았는데요?”

“너를 낳은 후에 네게 라온트라에서 가져온 제일 작은 강보를 둘러주었는데, 두르고 둘러도 천이 계속 남았어.”

“그랬구나.”

“처음 안았을 땐 손이 벌벌 떨렸지. 네가 금세라도 사라질 것처럼 작아서.”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느껴진 게 아니고요?”

나는 세일론의 힘으로 나를 막 낳았을 때의 엄마를 보았다.

그때는 꽤 평범한 갓난애 같았는데 말이지.

그때 엄마는 저주의 가호로 온몸이 죄다 먹혀 있었으니까 의식이 혼탁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작았어.”

“아빠랑 오빠들은 지금도 제가 작대요.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건데 엄마는 아니에요?”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으니 엄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야.”

“그래요?”

“그래. 이렇게 작아서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들 만큼 작았어.”

“…….”

“모든 게 내 탓 같았어. 라온트라에서 아스트라 장원까지 가며 제대로 음식을 챙겨 먹지 못했거든.”

엄마는 홀몸으로 아스트라 장원에 왔다.

조심성 많은 ‘벨로스터 궁주’의 성정을 생각하면 호위 몇은 데리고 출발했을 텐데, 혼자 도착했다는 건 추적이 있었다는 거겠지.

“추적자들에게 돈을 빼앗겼나요?”

“버리고 달아난 것이지. 성에서 나오자마자 살수들이 쫓아왔거든.”

“…….”

“수도 없는 전투를 치러야 했어. 난 너를 품고 있었기에 가호를 쓸 수 없었으니 할 수 있는 건 호위에 기대 도망치는 것뿐이었지.”

“그랬구나…….”

“모든 호위가 사라지고 나 홀로 남았을 적에도 살수는 끊이지 않았고, 객점에서 맨발로 도망쳤을 때 돈을 모두 잃었어.”

“…….” 

“산달이 가까워지는데 뱃 속의 너는 점점 태동이 없었지. 덜컥 겁이 나서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먹은 적도 있어.”

“…….”

“모든 게 내 탓 같았어.”

“…….”

“네가 그렇게 작은 것도, 너를 아스트라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도…….”

“…….”

“하지만 에릴로트.”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가늘게 떨렸다.

목소리마저 끝이 갈라졌다.

그러면서도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채로 떨리는 양손을 꽉 맞잡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그러면요.”

목구멍까지 무언가 치밀어올랐다.

나 또한 떨리는 눈으로 엄마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도 새벽에 나를 떠올렸어요? 아이를 보면 나를 떠올렸어요?”

“……뭐?”

“내 생일엔 케이크를 먹었어요?”

“…….”

“날이 좋은 날엔 나를 데리러 오는 상상을 했어요? 비가 올 때면 내게 우산을 가져다주는 상상을 했고요?”

“…….”

“그런 거라면 같이 있었던 거로 칠래요.”

“…….”

“같은 순간을 같이 한 거로 해요.”

눈시울이 붉어진 난 애써 웃었다.

“나는 그랬거든요. 새벽이면 엄마를 떠올렸고, 아이를 안은 성인 여성을 보면 엄마를 떠올렸어요. 생일이면 온갖 패악을 부려서라도 케이크를 받아냈다고요.”

“…….”

“날이 좋은 날엔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는 상상을 했어요. 비가 오면 우산을 가져다주는 상상을 했고요.”

“…….”

엄마는 뜨거운 숨을 터뜨리며 이마를 쥐었다.

서러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려, 세월의 관록을 흡수하여 위압감이 넘치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엄마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그러면 이제 저를 안아주세요.”

엄마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어깨가 엄마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나는 이제 그 어떤 어두운 밤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 * *

“……생일이면 먹지도 않을 케이크를 종류별로 늘어놨어. 너는 어떤 것을 좋아할까 생각하며, 홀로 네 취향을 추측하며 웃었어.”

“응.”

방문 사이로 벨트리의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던 데이몬드가 차를 들고 온 하인을 가로막았다.

“나중에.”

“예? 아, 예.”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모녀의 해후를 깨뜨릴 자들을 물렸다.

삼 형제 또한 벽 가에 서 있었다.

벽에 기대 있던 발자크가 물었다.

“아버지는요? 안 들어가십니까?”

“오늘은 벨트리에게 양보할 것이다.”

요슈아가 쿡쿡 웃었다.

“눈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십니다.”

“이 녀석이.”

리시먼드마저 픽 웃자, 데이몬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곤 손마디로 장남의 이마를 툭 쳤다.

“놀리지 마라.”

“예.”

“그리고 너희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이야.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데이몬드가 살벌한 표정으로 반대쪽으로 쳐다보았다.

수호자들…… 정확히 말하면 마시타브바들과 구, 헤라가 움찔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달책을 통하라고 하였을 텐데.”

“세작을 우려하여…….”

“헛소리. 네 놈들 목숨을 우려하게 해주어야겠느냐.”

그때였다.

알렉시스의 외조부인 이시론 공작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왔다.

“하면 내가 전하지.”

그의 뒤엔 수호자 중 하나인 제르모 공작이 붙어 있었다.

데이몬드가 미간을 좁혔다.

“이제 이시론 공을 들쑤셔서 내 딸에게 접근하려는 것이냐.”

“이들이 못마땅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넘어가 주었지.”

이시론 공작의 말에 데이몬드는 물론이고 삼 형제마저 자세를 바로 했다.

데이몬드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미에에 의해 크로노트 회 본지가 점령당했네.”

“이미 인공 마수 떼의 공격으로 건물이 무너졌을 텐데 큰 의미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제르모 공작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무엇이기에.”

“본지로 삼아 결계를 구축한 이유가 있는 땅입니다. 그곳이 어둠과 이어진 땅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용과 몬스터 떼가 이 땅으로 들어온 통로를 뜻하는 거요? 하지만 고대의 기억에선 제사장의 궁 인근에서 길이 열렸던 것을 보았는데.”

고대에 제사장의 궁이 있던 곳은 현재로 따지면 라온트라의 영토였다.

수호자 헤라, 그러니까 수후르마시가 설명했다.

“그곳은 게헨나(거대룡)가 그 휘하의 종복들과 이동해 온 곳이지요. 이후 총 세 군데의 길이 열렸습니다.”

“위치는.”

“한 곳은 칸시스 대륙의 바란 왕국이고, 또 한 곳은 알리기오사의 영토, 또 한 곳은 우리의 본지입니다.”

제르모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본지에서 열린 길에선 가장 많은 몬스터가 흘러들었습니다. 저희의 기록에 의하면 라온트라, 바란 왕국, 알리기오사 왕국의 길로 들어온 몬스터의 12배입니다.”

“……!”

데이몬드와 삼 형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발자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리미에, 그 찢어 죽일 새끼가 왜 본지를 점령했다는 거야. 어둠과 이어진 길이라도 열겠다는 건가?!”

“모르지요. 하지만 무언가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르모 공작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깊게 가라앉았다.

그 시각, 크로노트 회의 본지.

무너진 건물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에 팔로스토의 경비병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벌써 세 시간 째로군.”

다른 경비병이 침음을 흘렸다.

“누가 말려야 하는 것 아냐? 저러다 달리아 님께서 죽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닌가.”

“네가 말이라도 꺼내 보든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말리러 들어간 귀족 하나가 그 지경이 돼서 나오지 않았어.”

“그러니까.”

경비병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명에, 이 수의 인공 마수에…… 당최 소름이 끼쳐서 살 수가 없다니까.”

이 부근엔 인공 마수가 셀 수 없이 많이 깔려 있었다.

특히 인공 마수를 진화시킨 벤투스들까지 서성이는 터라 더더욱.

벤투스란 특별한 인체를 사용해 인공적으로 만든 병사로, 한 사람이 인공 마수 백여 마리에 육박하는 힘을 자랑했다.

그리미에가 최정예로 꼽는 벤투스 삼백이 지키는 땅.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리미에의 허락 없인 이 땅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아빠, 할머니…… 엄마……!”

경비병들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달리아의 비명이 멎은 건 새벽녘이었다.

피범벅으로 쓰러진 그녀를 보고 마법사들은 쯧, 혀를 찼다.

“이조차 버티지 못하니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림도 없겠구만.”

“역시 팔로스토 공께 시간을 더 청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누가 말씀드릴 수 있겠나. 아일라 님이 그렇게 끔찍하게 가셨는데, 두려워서 말씀드릴 이가 있겠냔 말일세.”

그러자 검은 더벅머리에 깡마른 사내가 번들거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버티지 못하면…… 버티게 하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 마법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만 되면 좋겠지. 하지만 방도가 없질 않나, 방도가.”

“있을 것도 같고…….”

사내는 실험대 주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살덩이를 주워들었다.

인공 마수를 만들며 튄 마수의 살점이었는데, 더벅머리 사내가 쥐자 마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더벅머리 사내가 비척비척 쓰러져 있는 달리아에게 다가갔다.

“자, 아가씨, 좀 더 힘을 냅시다. 팔로스토 공이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니.”

“무슨……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무슨 짓을…….”

“비인간적인 짓이라 설명은 못 드리겠습니다. 뭐, 우리가 언제 도리를 지키고 실험한 것은 아니니 아가씨도 이해하시지요?”

“시, 싫어…… 싫어, 싫어, 하지 마……!”

“왜 그러실까. 이렇게 온갖 인간을 실험해 잔뜩 특혜를 누리신 분께서.”

그가 달리아의 목덜미를 잡았다.

징그러운 살점을 그녀에게 들이밀던 차였다.

파지지짓—!

강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이런, 오늘은 틀렸나.”

“흐으…… 흐, 으으으……!”

“뭐, 아가씨의 몸이 회복되면 합시다. 내일 오전에 실험을 시작하자고요.”

더벅머리 사내는 하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법사들마저 실험장을 빠져나갔다.

달리아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쳐다봤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끔찍한 지옥.

‘엄마, 할머니, 아빠…….’

이런 곳인 줄 알면 오지 않았을 거야.

그리미에는 날 사랑하지 않아.

모두가 나를 이용하고만 있어……!

하지만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아스트라 제 2백작저에서 돌아온 후로 온몸엔 사슬이 채워졌다.

주변엔 얼마나 많은 인공 마수가 있는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진동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결코 도망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다, 달리아…….]

마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리아를 쳐다봤다.

달리아 또한 눈을 가까스로 돌려 마사를 올려다봤다.

“주, 줄게…… 이 몸, 돌려줄 테니까 제발…….”

[시, 싫어. 싫어, 싫어!]

마사 또한 달리아의 처지가 어떤지 이해하고 있었다.

이대로 달리아의 몸에 들어간다면 실험체가 되어 끔찍한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마사가 와들와들 떨며 속삭였다.

[도, 도망치자.]

“어떻게! 여기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단 말이야!”

[쉿! 조용히 해. 방금 경비병까지 헐레벌떡 달려 나갔어. 아스트라에서 여기가 수상하다는 걸 느끼고 병사들을 보내 수색하려는 듯했어.]

“그래서……?”

[족쇄만 끊어낼 수 있으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어떻게 끊어낸단 말이야! 오러를 가진 기사 정도는 되어야 끊어낼 수 있는 사슬이라고……!”

달리아가 절규하자 마사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이 기회인데…… 여기서 계속 있다간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때였다.

묘한 파동이 느껴졌다.

마지막 개화를 마치고 감이 잘 훈련한 기사만큼 예민해진 달리아가 흠칫,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소리…….”

[응? 소리?]

“그래, 소리가 들렸는…… 아, 아아, 아아아, 또 오는 거야. 또 날 실험하려고……!”

달리아가 양팔을 끌어안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마사 또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번 실험은 이전의 실험하곤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소중하고, 소중하게 달리아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을 정확하게 계산했던 실험이 아니라, 완전히 살덩이로 대하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로 달리아가 죽으면 마사는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나, 난 영혼 상태인데 이대로 계속 영혼으로 떠돌아야 한다면…… 싫어!’

마사가 새파란 얼굴로 달려갔다.

[내가 망을 봐줄 테니까 빨리 도망치자. 응?]

“시, 싫어, 싫어, 아아, 엄마, 아빠……!”

[바보 같은 소리 말…… 어?]

덜컹!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누군가 뚝, 떨어졌다.

그를 본 마사의 눈이 커졌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급히 달리아에게 달려갔다.

“이봐, 괜찮아?”

“……당신은.”

“꼴이 엉망이잖아. 가자.”

“누, 누구?”

마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달리아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아, 아는 사람이야?’

[알아…….]

왜 모르겠어.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마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울먹이며 사내를 향해 달려갔다.

[아퀼라 오라버니……!]

아퀼라라고?

달리아는 흠칫했다.

아퀼라라면 마사, 마리 자매가 좋아하던 그 고향의 사내가 아닌가.

마사의 닦달에 그를 조사해준 적도 있었다.

‘아퀼라는 아스트라 령의 기사가 되었다고 했는데?’

아퀼라는 단숨에 사슬을 끊어냈다.

“어서 가자.”

그리고 손을 내밀었는데, 달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 아스트라의 기사잖아요. 그런데 왜 나를……?”

“그게 왜.”

“에릴로트는 나를 싫어해요. 구하는 걸 봐줄 리가 없는데…….”

“나는 데이몬드 관할령이 아닌 다른 관할령의 사람이다. 함부로 어쩔 수 없어. 게다가 일단 가서 용서를 빌어.”

“네?”

“진심으로 빌면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거든.”

달리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여기서까지 에릴로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

그리미에를 배반하고 가면 되지 않을까.

일단 내겐 힘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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