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메이저리그에서 MVP까지 받은 대한민국 야구영웅.
실력뿐 아니라, 모델에 가까운 장신의 키와 배우 같은 외모로도 유명해 온갖 잡지사의 표지를 장식했던 그.
오백 억이 넘는 연봉에 광고비까지 합치면 일 년에 천억 원대의 돈을 번다는 풍문의 슈퍼스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주현균이었다.
“어, 어떻게…….”
“주 선수가 우리 의원님 조카잖아.”
엄청나게 촌수가 먼 조카지만.
선거 활동할 때 알차게 써먹었다.
“아, 의원님과 함께 병문안 오셨구나?”
새아빠가 잔뜩 흥분해서 물었다.
“예. 혜민 씨가 아버님이 제 팬이라고 꼭 한 번 인사해달라고 성화라.”
“아이고, 딸 잘 둔 덕에 내가 호강하네. 그, 악수 됩니까?”
“그럼요.”
악수하자마자 새아빠는 절대로 다신 손을 씻지 않을 거라며 호들갑이었다.
“아이고, 식사는 하셨어요?”
“저희는 따로 하려고요.”
“아쉽네…….”
새아빠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이었다.
세은도 자라목이 되어선 주현균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럼 전 의원님께 인사드리고 올게요.”
“그, 그래! 주 선수도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예.”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나와 한지혁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병원 로비 안에서 자세한 내용을 얘기했다.
“물꼬는 텄으니까 다음이 중요해. 아, 번호부터 줘.”
“어어, 010-33…….”
한지혁의 번호를 입력하자, 그가 말했다.
“내 번호는…….”
“왜 이래?”
한지혁이 씩 웃더니 통화창에 입력한 번호 밑에 발신 아이콘을 눌렀다.
금세 한지혁의 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게 통신기 코드랑 같은 줄 알아?”
“맞다. 너무 편리해…….”
내가 감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쳐다보자 한지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루종일 폰만 봐도 질리지가 않아. 마이튜브, 코코넛페이지, 아웃스타그램, 리그 오브…….”
한지혁도 감격한 표정으로 볼을 폰에 문질렀다.
“신문이나 보고, 체스나 하던 그 세계와 얼마나 다른 줄 아냐?”
“그 세계도 그 세계만의 즐거움이 있잖아?”
“내가 봤을 땐 즐거움이 없어서 사교계 전쟁 같은 게 있는 거라고. 오락거리가 없으니까 남을 오락거리로 삼지.”
“……이 세계가 더 좋아?”
휴대폰을 보며 히죽히죽 웃던 한지혁이 날 쳐다봤다.
“왜 그런 걸 물어?”
“……가족들은 보고 왔어?”
그쪽 세계는 소설 속 얘기가 아니었다.
세계의 기록을 볼 수 있던 거지.
한지혁도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이었다.
즉, 이쪽 세계엔 그의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있던 병원, 이름, 나이, 전부 아는 네가 이렇게 늦게 온 걸 보면 뻔하잖아.”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거다.
한지혁은 휴대폰을 정장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마포에 부대찌개 기가 막히게 하는 집이 있어. ‘혁이네’라고.”
“뭐야? 뜬금없이.”
“가보라고. 난 간다.”
“…….”
한지혁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먼저 떠나고 홀로 남은 나는 포털 창에 ‘혁이네’를 검색했다.
[창업의 옳은 예, 혁이네…… “막내아들 잃고, 가게에 매달렸죠.”]
‘아…….’
한지혁의 부모님이 하는 식당이었다.
* * *
병원을 나온 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목적지는 ‘혁이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서 겨우 자리에 앉았다.
“무슨 부대찌개를 이렇게 기다려서 먹어.”
자리에 앉자마자 세은이 투덜거리자, 메뉴판과 밑반찬을 가져다주던 중년의 여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대번에 느낌이 왔다.
평범한 종업원이 아니었다.
‘한지혁의 어머니다.’
기사에서 본 사진과 꼭 같은 인자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꼭 그게 아니라도 말투라든지, 손짓 같은 것에서 한지혁이 보였다.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세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면 가게 좀 넓히시든가요. 도롯가까지 줄 서 있는데 이거 주변에 민폐 아니에요?”
“세은아.”
“내 말이 틀려?”
가족들은 세은의 무례를 지적할 생각 없이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
“우리도 이런 거 하나 하면 좋겠다. 사장님, 얼마나 벌어요?”
“그거는…….”
“음, 이 파김치 맛있네. 어떻게 만들어? 뭐 넣었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해요, 사장님. 부대찌개 대자랑 공깃밥 다섯이요.”
“예.”
한지혁의 모친이 주문을 받아간 후에도 세은은 연신 투덜거렸다.
“어디 다른 데 가지 부대찌개가 뭐야? 식당이라도 좀 깨끗한 데를 고르든가.”
“여기 맛있대.”
“조미료 때려 넣으면 맛있지 않은 곳이 있겠어? 식당 청결 관리도 이따위인데 주방이 어떨지 답 안 나와?”
“이 정도면 깨끗하지, 뭘.”
“깨끗은 무슨…… 이거 머리카락 아니야?”
세은이 북어 무침에서 털 같은 걸 집어 올리자, 다른 손님들이 힐끔거렸다.
“북어 거스러미잖아.”
“난 머리카락 같은데?”
“아니야. 왜 이래, 남의 가게 망치려고 작정을 했어?”
“내 생각을 말도 못해?”
세은이 짜증을 내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이번엔 모친이 아니라 키가 큰 젊은 남자였다.
“머리카락 아닙니다.”
‘한지혁의 형이다.’
이 사람도 기사 사진에 조그맣게 나왔다.
“아니면 말지 왜 성질이에요?”
세은의 말에 한지혁 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적 없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니, 지금 말투부터 기분이 나쁘잖아.”
“아닙니다.”
“‘아닙니다’가 아니고 ‘죄송합니다’지. 안 그래요?”
소란이 일자 다시 우리 테이블에 시선이 모였다.
멀찍이 있던 한지혁의 모친이 서둘러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직원 교육 좀 똑바로 시키셔야겠어요.”
“네? 왜 그래, 윤혁아.”
“……별 일 아니에요.”
세은은 팔짱을 낀 채로 지혁의 모친을 쳐다봤다.
“오자마자 사람 기분 나쁘게 음식 내려놓더니 인상 쓰고 있잖아요. 제가 지적하니까 잡아떼기만 하고 끝까지 사과는 없어요.”
‘날을 잡았구나, 아주.’
지금껏 내게 쌓인 스트레스를 여기서 풀려는 듯 난리였다.
“그리고요. 이거 진짜 머리카락 아니에요?”
“유세은, 그만해!”
“내 돈 내고 먹으면서 물어보지도 못해?”
“안 되겠다. 가자.”
“아파! 왜 이래!”
엄마와 새아빠, 할머니는 멀뚱히 쳐다만 봤다.
유세은은 이제 거의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프다고—!!”
식당에 있던 다른 손님들까지 불쾌한 표정으로 유세은을 쳐다봤다.
한도혁의 모친과 형은 당황해서 손님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나는 유세은을 끌고 계산한 뒤, 가게를 나섰다.
“놓으라니까. 아프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아프시다는데 놔드리시죠.”
낯선 목소리에 세은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말을 건넨 사내를 본 세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뒤이어 나온 가족들도 깜짝 놀라서 사내를 쳐다봤다.
주현균.
그러니까 한지혁이었다.
“주선수가 여긴 웬일입니까!?”
새아빠가 다시 호들갑을 떨자 한지혁이 말했다.
“저도 여길 추천받아서요. 나온 김에 들렸는데 우리가 인연인가 보네요. 이렇게 만나고.”
내가 살며시 손을 놓으니, 한지혁이 세은에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아…… 좀 뻐근하긴 한데요…….”
“잠깐 봐드려요?”
“네? 아, 네…….”
세은이 수줍은 표정으로 팔을 내밀었다.
스포츠 팬인 새아빠도 난리였다.
“아이고, 우리 세은이 인생의 영광이다. 영광. 주 선수가 팔을 다 봐주네.”
“가, 감사해요…….”
세은은 어쩔 줄을 모르고 어깨를 움츠렸다.
한지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손이 예뻐서 다치면 아쉽겠다 싶었거든요.”
세은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할머니는 신이 났다.
“우리 손녀가 피아노를 치거든.”
“아아, 피아노. 언제 공연 보러가도 됩니까?”
세은이 흠칫 주현균을 쳐다봤다.
“네?”
“아, 반응이 이러면 민망한데. 지금 수작부린 거거든요.”
“네?!”
한지혁은 쿡쿡 웃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따려고요. 병원에서 봤을 때부터 이상형이다 싶었거든요. 그렇게 인사해서 아쉬웠는데 잘됐네요.”
세은은 물론 새아빠와 엄마, 할머니까지 난리였다.
“어머머, 이게 무슨 일이야.”
“뭐하냐, 세은아!”
세은은 새빨개진 얼굴로 한지혁이 내민 휴대폰에 번호를 입력했다.
“저기, 저 원래 이렇게 번호 주는 사람이 아닌데…….”
“아버님이 제 팬이셔서 어쩔 수 없이 주시는 거죠.”
“네에…….”
한지혁은 빙그레 웃고서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인 후 떠났다.
세은은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래.”
“세은이가 제 취향인가보다. 어째, 메이저리그 선수 사위 생기는 것 아냐?”
새아빠의 호들갑에 엄마는 웃음을 터트렸다.
가족들 모두 꿈에 부푼 표정이었다.
“애기 춥다. 유서방 가세.”
“예, 장모님.”
가족들의 관심은 다시 세은에게 쏠렸다.
꼴랑 돈 몇 억 있는 나보다 오백억 원 연봉 받는 남친이 생길 지도 모르는 세은이 더 귀했을 테니까.
나는 다시 가족들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새아빠가 손수 문을 열어 세은을 태워주던 그 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한지혁: 반응은? p.m08:55]
[나: 예상대로 p.m08:55]
[한지혁: 이대로 진행시킨다 p.m08:56]
[나: ㅇㅋ p.m08:56]
.
.
[한지혁: 달리아는 여전히 재수 없더라 p.m08:57]
꿈에 부풀어 있는 유세은은 모를 것이다.
주현균이 한지혁이란 것은.
차에 오르기 전, 유세은이 내게 속삭였다.
“너, 굳이 이 식당에 온 거 주현균 때문이지?”
“뭘.”
“어떻게든 엮어보려던 것 아냐?”
“망상이 지나치네.”
유세은은 히죽 웃었다.
“그런데 아쉽게 됐다. 번호는 나한테 물어서.”
유세은은 벌써부터 한지혁이 제 것이라도 된 듯 으스댔다.
‘역시 파이어볼 당첨이 맞았다니까.’
* * *
며칠 동안 집안은 난리였다.
주현균에게 코코넛톡이 오면 할머니, 새아빠, 엄마까지 세은의 휴대폰에 머리를 내밀고 지켜봤다.
“오늘도 연락 왔니?”
“어제부터 연락이 끊기질 않네.”
세은은 에헤헤 웃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식탁에서 휴대폰을 보는 걸 제일 싫어하는 새아빠는 되려 세은을 더 종용했다.
“얼른 답장해야지.”
“아빠는……. 밀당도 하고 그래야지.”
“뭔 밀당이야. 그 녀석은 너한테 푹 빠진 것 같은데. 안 그래, 여보?”
“그치. 그런 스타가 식당 앞에서 번호 받아간 것만 봐도. 혜민아, 애기 물 갖다줘라. 목 메이겠다.”
나는 다시 이 집안의 무수리가 되었다.
세은에게 물을 가져다주니, 그 애가 나를 보며 거만하게 웃었다.
가족들이 이렇게 나오니 세은은 더더욱 한지혁을 잡고 싶을 것이다.
그를 잡으면 신데렐라라도 되는 것 같을 테지.
시종일관 웃으며 톡을 하던 세은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왜 그래?”
새아빠가 물었다.
“파티에 같이 가자는데…….”
“파티?”
“응…… 연예인들도 오는 큰 파티라고…….”
“그럼 간다고 해야지. 인맥 만들 기회 아냐!”
나는 슬쩍 말을 보탰다.
“관둬.”
“네가 무슨 상관이야?”
세은의 말씨가 뾰족해졌다.
나는 수저로 국을 뜨며 말했다.
“그런 파티에서 얼마나 행색을 따지는데.”
달리아일 적에 사교계 파티를 겪어본 너라면 잘 알지?
“드레스에 구두, 가방…… 온갖 걸 따진다고. 지금 주현균과 분위기 좋은데,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면 암만 너한테 관심 있어도 식을걸.”
“……그런 거 아니거든?”
“넌 드레스가 무슨 백화점에서 외투 사듯 살 수 있을 것 같니? 예약 걸고 받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
“가서 망신당하지 말고 얌전히 집에나 있어.”
자극하니 세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쾅!
테이블을 치며 일어난 그 애가 소리쳤다.
“드레스야 빌리면 되지.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그러곤 쿵, 쿵, 발을 구르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몰래 히죽 웃고 식탁 아래로 핸드폰을 들었다.
[이쪽은 오케이.]
수신자는 당연히 한지혁이었다.
아무리 드레스를 빌려가도 파티에선 우습게 여겨질 것이다.
그렇게 차이를 경험하고 나면 한지혁이 더욱 간절해지겠지.
그때 한지혁이 달래줄 것이다.
‘너는 너 그대로 아름답다.’
—그렇게.
세상에 오직 한 명. 그것도 그만큼 잘생긴 슈퍼스타 동아줄이라면 마음이 금세 녹아들걸.
‘그리고 나면 사구가 어디인지 말해주는 건 순식간이지.’
* * *
저녁.
세은은 혜민이 없는 사이 부모님과 할머니에게 매달렸다.
“3,000만원?!”
“드레스가 그 정도 한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돈이면 차를 사!”
“그럼 어떻게 해? 나 이대로 파티에 가지마?”
“그건…….”
“예솔이한테 애원해서 예약한 드레스 겨우 받은 거야. 못 가면 얼마나 창피해.”
“…….”
엄마는 곤란한 얼굴로 새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도 고심했으나, “에잇!” 소리치며 말했다.
“현금 좀 있어.”
“무슨 소리야, 당신. 우리 가진 건 그게 전부인데 어쩌려고.”
“그게 중요해? 주현균이 중요하지! 가자, 세은아.”
“정말?!”
세은이 활짝 웃으며 부친에게 매달렸다.
“아빠 최고야.”
“주현균만 데려와. 주현균만.”
가족들의 눈빛에서 욕망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