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368화 (369/390)

368화.

핸들을 잡은 손으로 가리고 있던 다른 손에 들린 저것.

휴대폰이었다.

이제야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이 보였다.

에릴로트

[신모 산부인과야.]

“지금 출발한다.”

세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부웅—!

엔진이 날카롭게 울며 차가 출발했다.

주현균, 아니, 한지혁은 말했다.

“오랜만이죠, 아가씨?”

“너, 너 뭐야!”

“한입니다.”

그가 히죽 웃었다.

“……!”

세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한지혁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죽인 칼소이에의 31만 명 백성을 잊고 혼자 행복해서야 되나.”

“내, 내려줘. 내려달란 말 안 들려?!”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달리는 중엔 절대로 안 열려요. 좋은 차거든.”

“너……!”

한지혁이 휴대폰을 들며 말했다.

“20분 뒤 도착.”

[출발할게.]

그렇게 통화가 종료되었다.

“시, 신고할 거야. 날 내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그야……!”

휴대폰을 든 세은이 흠칫했다.

전파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어, 어떻게…….”

“어떻게긴. 준비성 하나는 칼소이에 제일인 네 이부언니가 파티에 오기 전에 휴대폰을 바꿔놓은 거지.”

같은 기종의 휴대폰에 정보를 옮기고 케이스만 바꿔 끼워놨다.

명의는 유혜민으로 된 휴대폰.

세은이 지혁과 만나자마자 통신사에 전화하여 정지시킨 것이다.

세은은 시체처럼 파리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당했어……!’

* * *

나는 커다란 산악 백팩을 들고 방을 나왔다.

황망한 얼굴로 주저앉아있던 엄마와 할머니, 새아빠가 날 쳐다봤다.

“어디 가냐?”

할머니가 물어서 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음, 떠나러?”

“뭐?”

“서류 준비가 다 끝났거든요. 필요한 것도 모두 준비했고.”

“서류?”

“보험 서류요. 유산 정리도 다 됐어요.”

새아빠와 엄마, 할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엄마의 말에 나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서 팔랑팔랑 흔들다가 던져줬다.

“사회에 기부한다는 내용이에요.”

“뭐?!”

할머니가 버럭 소리쳤다.

“상의도 없이 그게 무슨……!”

“내 돈을 왜 상의해야 하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집을 나섰다.

“혜민아! 야, 유혜민!”

쫓아 나온 아빠가 버럭 소리쳤고, 엄마와 할머니 또한 맨발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리 불러놓은 택시를 타고 신모 산부인과로 출발했다.

그 병원에 사구가 열려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은 세일론이 나를 유혜민의 몸에 넣어두려고 연 사구였다.

제사장이 강력한 힘으로 열었기에 아직 흔적이 남아있던 것이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기야, 유혜민의 몸으론 30년 가까이 된 일이다.

에릴로트의 세월을 합하면 반백 년쯤 된 일이라 잊고 있었다.

병원은 가까웠기에 20분이 안 되어 도착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한지혁의 차가 보였다.

유세은이 난리였다.

쾅! 쾅, 쾅!

유리창을 두들기며 열어달라고 난리였는데, 워낙 좋은 차인 만큼 바깥으로 소리가 잘 안 들린다.

나는 벌컥 문을 열었다.

“이 흉악한 계집애! 신고할 거야! 내가 가만둘 줄 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세은을 향해 마력을 발동했다.

유세은이 열심히 입을 뻐끔거렸으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밀면 미는 대로 걷기까지 했다.

한지혁이 “오…….” 감탄하며 물었다.

“사자의 가호?”

“응, 호루스 아빠의 가호인 <제압>이야.”

“역시 사자의 가호는 엄청나네.”

<제압>은 시전자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가호였으니까.

나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마력이 얼마 안 남았어. 가야 해.”

“위치가 어디야.”

“신생아실이 아닐까. 그곳으로 왔으니…… 가 아니네.”

건물 주변까지 마력이 고여있다.

‘과연 세일론의 힘.’

신생아실에서 열린 사구가 여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주차장에서 열어도 되겠어.”

“마력이 고여있는데 애들한테 영향은 없어?”

“오히려 좋겠지. 신체 능력이 우월한 아이로 클걸. 오감이 예민해질 테니.”

“다행이네.”

“시작하자.”

유세은을 앉혀놓고 미리 준비한 분필로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끼익!

익숙한 차가 주차장에 멈추어 섰다.

새아빠의 차였다.

“유혜민!”

새아빠를 비롯해 엄마, 할머니까지 내려서 내게 소리쳤다.

나는 묵묵히 진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가 소리쳤다.

“너, 이게 무슨 짓이니! 어떻게 상의도 없이 이런 짓을…… 주 선수와 세은이는 또 왜…….”

내가 내던진 서류를 확인하고 득달같이 쫓아온 모양이었다.

정말로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나는 유세은의 주변을 빙 둘러 원까지 그린 후 손을 탈탈 털었다.

“세일론.”

말하자, 이제껏 마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세일론이 현신했다.

“……!”

“……!!”

“……!”

새아빠와 엄마, 할머니가 귀신이라도 본 듯 새파랗게 질렸다.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찢어 죽일 것들.”

세일론은 싸늘한 표정으로 세은의 가족들을 쳐다봤다.

“됐어요. 얼른 가요.”

“하지만—”

“말 통할 사람들이었으면 진작에 대화했을 거예요. 저들은 어차피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를 테지.”

그 말에 기겁하던 가족들이 움찔했다.

“무슨…….”

나는 새아빠를 쳐다봤다.

“한 푼도 남길 생각 없어요. 이제껏 노예로 부려 먹고 남은 재산까지 취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노예? 말 다했어?!”

“노예가 아니면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지혁이 말했다.

“노비인가 보지.”

“비슷한 말이잖아.”

주현균의 모습인 한지혁과 내가 킬킬거리자 새아빠와 엄마, 할머니는 어리둥절했다.

“주 선수와 네가 왜…….”

“아, 이쪽은 내 편.”

“뭐?”

“내가 세은이한테 붙여줬다고요. 부대찌개 집에서 만난 것도 내 계획.”

“뭐?”

이 와중에도 ‘주현균과 네가 그런 관계야?’ 라는 표정이라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때였다.

“아빠, 엄마, 할머니! 살려줘!”

세은이 소리쳤다.

‘이런. 세일론을 현신시켜서 마력이 부족해진 거야.’

세은을 제압하던 힘이 풀렸다.

엄마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대체 무슨…….”

“빨리 신고하라고! 경찰 불러—!”

세은이 비틀비틀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

“경찰은 무슨. 총으로 세일론을 당해낼 수나 있겠어?”

내가 픽 웃으며 얘기하자 세은이 움찔했다.

새아빠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아듣게 설명해라. 대체 무슨 짓이야!”

“뭐긴요. 노예의 반란이지.”

“……뭐?”

할머니가 소리쳤다.

“계속 말을 그따위로 할래?!”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상황 파악이 안 되죠.”

“이게 정말 계속……!”

“그치. 감히 내가 가족들한테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나는 이 집안 노비인데.”

“뭐, 뭐?!”

“어릴 때부터 그랬잖아요. 할머니는 펑펑 놀고 오더라도 학교 다니는 나는 설거지를 하고, 집안을 쓸고 닦고, 세은이를 돌봐야 하고.”

“…….”

“하나라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날은 맞는 날이었잖아.”

“…….”

“뺨을 때리고, 회초리로 있는 대로 두들기고!’

“…….”

할머니가 마른침을 삼켰다.

엄마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말이 너무 심하다, 혜민아.”

“말은 엄마가 더 심하게 하지 않았어?”

“내가 언제…….”

“난 기억해. 세은이나, 새아빠와 싸울 때 엄마가 내게 하던 화풀이.”

“…….”

“내가 없으면 더 행복했을 거라고 그랬잖아.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

“수도 없이 그렇게 말했잖아. 그렇게 힘들면 나가라고, 나갈 데는 있냐고! 농담인 것처럼 어린애 가슴을 난도질했잖아!”

“…….”

엄마가 희멀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새아빠는 잔뜩 화가 났다.

“네게 속상한 일이 있었단 건 알겠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짓을 하냐. 보험을 전부 해약한 건 아니지? 그렇지?”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일관성이 있을까.”

“뭐라고?”

“했어요. 전부.”

“너, 이 계집애……! 지금까지 키워준 빚을 이렇게 갚아?”

“이미 갚았죠, 그건.”

나는 새아빠를 빤히 보며 말했다.

“세은이 레슨비, 다달이 바치던 생활비. 그거면 차고 넘치지 않아?”

나는 희게 질린 세은의 가족들을 둘러봤다.

“처음에 다시 유혜민이 되었을 땐 기대가 있었어요.”

“…….”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

“…….”

“여전히 나를 돈줄로 알고, 날 이용할 생각만 하고, 욕심에 눈멀어 있더라고요.”

“…….”

“그래서 대가를 치르게 해준 거예요.”

“대가?”

새아빠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가방과 옷을 사준 카드 말이에요.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가져가서 펑펑 외식하고, 백화점 투어를 한 그 카드요.”

“카드가 왜.”

“그거 의원님 법인 카드거든.”

“뭐, 뭐?!”

“세은이한테 옷을 사주느라 엄마와 아빠한테 있는 돈은 다 썼고, 할머니도 어제 나온 새아빠의 차 값 때문에 통장에 남은 게 없죠?”

“무, 무슨, 무슨 말을……!”

“그런데 그 카드값을 어떻게 갚으려나. 집 보증금 빼도 다 못 갚을 텐데, 큰일이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그 보증금도 내가 빌려준 돈이니까 괜찮죠?”

“야—!”

새아빠가 흥분하여 내게 달려들었을 때였다.

세일론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내 딸에게 한 짓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따, 딸?”

“내가!”

“……!”

“내가 네 놈을 살려두는 이유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려우리라 여겨서야.”

새아빠가 흠칫 물러났다.

그 순간, 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세은이 허겁지겁 도망치려 했으나 무리였다.

한지혁이 뒷덜미를 쥐고 있었으니까.

나는 빛 속에서 가족들을 보며 말했다.

“약자를 괴롭히며 살아왔으니까, 이제 사회의 약자가 되어 내가 느낀 온갖 설움을 받아봐.”

“혜, 혜민아, 얘기 좀 하자. 응? 이런 식으로 굴면 너 후회해!”

엄마가 어쩔 줄 몰랐으나 다가오진 못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혜민아, 아가! 할미가 손주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랬겠니. 오해다. 얘기로 풀 수 있어. 그러니까……!”

할머니도 오열하며 소리쳤다.

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새아빠 또한 어쩔 줄을 모르고 발을 굴렀다.

“어, 어린 가슴에 흉 냈다면 사과하마. 응? 하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 혜, 혜민아……!”

영혼이 부유하는 감각이 들었다.

세은이 오열하며 도와달라 소리쳤으나, 가족 중 그 누구도 손을 뻗지 않았다.

딸의 위기보다 돈 한 푼 없이, 빚을 갚으며 가난하게 살아갈 날이 두려웠기에.

그런 사람들이었다.

“부디 비참하게, 누구보다 비참하게 살아가길 빕니다.”

“혜, 혜민아, 할미가 잘못했다! 혜민아……!”

“아아아, 혜민아……!”

“저, 정을 봐서라도…… 혜민아!”

그렇게 세상이 온통 희게 빛났다.

* * *

빛이 사그라들었을 땐 시체 세 구가 땅에 나뒹굴었다.

경비원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고, 세은의 부친과 모친, 할머니는 목격자 및 용의자로 붙잡혔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의 야구 영웅 주현균이 엮인 사건이었으니까.

이 사건은 자살로 종결지어졌으나,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말이 되냐. 경찰놈들 제대로 조사는 한 거야?

 └자살일 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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