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할머니는 날 끌어안고 몇 번이나 등을 쓰다듬었다.
감수성 풍부한 사람들은 울먹이고 있었지만 난…….
‘어, 어색한데.’
할머니와 이런 일이 있었어야지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할아버지와도 이러한 일이 없어서 매우 어색하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저, 우선 ‘길’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용족이 나오는 그 길 말이다.
할머니가 “아아.” 하며 퍼뜩 떨어졌다.
“그렇지…… 가자꾸나…….”
“예…….”
할머니가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 나타난 건 무구를 쓴 한지혁이었다.
어차피 겁이 많아 전투엔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미리 라온트라에 보내놨다.
한지혁이 다가와 말했다.
“만체 박사와 길을 확인했습니다.”
만체 박사, 리카르도 만체.
라온트라 황후의 조카로 내게는 외당숙이었다.
고대에 심취한 그는 전 세계의 누구보다 어둠에 관해 박식한 자였다.
나는 한지혁과 함께 다가온 그에게 물었다.
“역시 용족의 길이 맞나요?”
“그래…… 가 아니고 ‘예’인가. 뭐, 하하. 차차 얘기하시죠.”
황후, 만체 박사, 한지혁과 함께 라온트라의 궁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황제의 대알현실이었다.
타국에 온 만큼 황제에게 인사는 해야 했으니까.
‘외할머니 다음엔 외할아버지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알현실에 들었다.
그런데 막상 금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엄……!”
깜짝 놀라서 ‘엄마!’ 하고 소리칠 뻔했다.
금좌엔 라온트라의 비센테 황제가 아니라, 엄마가 앉아 있었으니까.
“폐하께선 과중한 업무로 피로가 쌓이시어 의실에 계시네. 황태자가 귀빈을 맞이함에 면구스럽다 전하셨지.”
나는 빙그레 웃고 허리를 굽혔다.
“라온트라의 벨로스터 황태자를 뵙습니다.”
엄마와 나는 마주 보며 후후 웃었다.
그런데 주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콘라드가 속삭였다.
“환대하는 건 벨로스터 황태자의 측근뿐인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눈 뜨고 차기 황좌를 빼앗겼으니.”
“불상사를 대비하겠습니다.”
“그래.”
엄마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귀빈실을 내어주마. 또한 고대의 기록 열람권을 줄 터이니 필요한 자료가 있거든 거리낌 없이 요청하게.”
“감사합…….”
“그게 무슨—!!”
누군가 빽! 소리쳤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의 귀부인이 보였다.
콘라드가 다시 내게 속삭였다.
“막내 황자인 프레이의 모후인 베르단디 황비입니다.”
붉은 머리의 황비, 베르단디가 엄마에게 언성을 높였다.
“고대의 기록은 극비 문서입니다. 어찌 타국의 영양이 극비 문서를 함부로 열람한단 말입니까!”
다른 황비들 또한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때였다.
황후,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말했다.
“이곳에 타국의 영양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저 에릴로트 아스트라는……!”
“황태자의 딸이며, 황제 폐하의 황손이다.”
“……!”
“황제 폐하께선 금일 황족 인명록에 에릴로트의 이름을 등재하고, 궁을 하사하신다는 뜻을 밝히셨네.”
“…….”
“고대 기록의 열람은 직계 황족의 권한. 감히 누가 에릴로트 궁주의 권리를 일개 개인의 잣대로 운운하는가.”
“황족 인명록에 이름이라니요. 그는 황족원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
“황령이네.”
“폐하, 실로 기막힌 일입니다. 규율에 어긋난 명은……!”
“폭정이라 할 셈인가.”
황후가 매섭게 황비들을 노려봤다.
베르단디 황비가 입을 뻐끔거렸다.
“저, 저는…….”
“분명히 하지.”
황후가 황좌 밑에 있던 황후좌에서 일어나 주변을 매섭게 노려봤다.
“감히 금수리 궁(황제궁)의 위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이 내가 황후령으로 단죄할 것이네.”
고함이 터져 나오자, 황비들은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나는 타이밍에 딱 맞춰 무릎을 굽혔다.
“황은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아스트라의 군사들 또한 일시에 무릎을 굽혔다.
외할머니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는 미소 지었다.
다른 라온트라의 황족들만이 이를 악물었다.
* * *
나와 콘라드, 잔느, 한지혁은 곧장 만체 박사의 방으로 향했다.
“으하하하! 이모님이 이처럼 박력 있는 분이셨던가!”
만체 박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분이 아니신가요?”
“아무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인자한 분이셨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흠, 신음하며 만체 박사 책상에 있던 책을 뒤적거렸다.
만체 박사는 찻잔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걸쭉한 액체를 차랍시고 내밀었다.
‘……먹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살짝 차를 한지혁에게 밀어줬다.
한지혁이 흠칫, 나를 쳐다봤다.
배신감이 어린 눈으로 날 쏘아보던 그는 다시 슬쩍 콘라드에게 밀어줬다.
콘라드 또한 희멀건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만체 박사가 말했다.
“벨로스터에게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흘 밤낮을 두문불출하시고, 달라지신 거야.”
“네?”
“황후 폐하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도 큰 충격을 받으셨지.”
“결혼도 안 한 딸에게 이렇게 큰 자식이 있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그게 아니야.”
만체 박사는 내 손에서 책을 부드럽게 가져가며 말했다.
“아니면요?”
내가 묻자 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딸이 손주까지 숨겨온 이유를 아시니까.”
“……아신다고요?”
“그래. 부모에게 힘이 없고, 제 자리는 위태로우니,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 살덩이를 떼놓는 심정으로 숨겨온 거잖냐.”
“…….”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에게 힘이 있었다면 넌 ‘더러운 피’가 아니라 적통 황손으로 자랄 수 있었겠지.”
“…….”
“모두 당신들의 탓인 것 같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선 특히.”
“……오늘 알현실에 나오지 않으신 거요. 피로 때문이 아니라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그런 것 아녜요?”
내가 우물쭈물 물으니, 만체 박사가 책을 펼치며 말했다.
“3년 전에 쓰러지신 뒤 하반신에 마비가 오셨다.”
“……!”
“누가, 언제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죽일지 모르는 곳에서 몇십 년이나 버텨왔잖으냐.”
“…….”
“스트레스를 그리 받았는데 몸이 남아날 리가.”
“그렇게 몸이 좋지 않으시면 섭정을 맡기셔도 될 텐데…….”
“어떻게?”
만체 박사가 나를 쳐다봤다.
“네?”
“황제 폐하께서 안 계시면 황후궁에 자객부터 들 테지. 벨로스터는 무사했겠느냐?”
“…….”
“황후 폐하께선 지난달에도 두 번이나 음독하셨어.”
“…….”
“그런 자리에서 언제 죽을지 몰라도 버틴 건 네 엄마 때문이다. 네 엄마뿐 아니라, 네 엄마가 낳을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으니 너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라.”
만체 박사가 문을 향해 턱짓했다.
문에 난 작은 창으로 희게 센 머리가 보였다.
……외할머니의 머리였다.
나는 외할머니의 머리를 빤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안 미워요.”
만체 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행이고.”
“제가 부탁드린 자료 말이에요.”
“어어. 용족 자료 말이지?”
“예. 여기 콘라드와 한, 잔느와 함께 찾아주세요. 곧 올게요.”
“그으래.”
만체 박사는 히죽히죽 웃었다.
콘라드와 한지혁, 잔느 또한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슬쩍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외할머니가 흠칫, 나를 쳐다봤다.
“아, 저어……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 이 포도 말인데 네 엄마가 어릴 적에 아주 좋아했거든. 혹시…… 입에 맞을까 하고…….”
“엄마도 그랬는데.”
“뭐?”
“칼소이에에서요. 제가 엄마한테 화가 나니까 이렇게 먹을 것을 가져와서 쭈뼛거렸어요.”
“…….”
“할머니 딸이라 할머니와 비슷한가 봐요.”
외할머니의 눈매가 붉어졌다.
입을 뻐끔거리다가 억지로 연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벨로스터에게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당황했단다. 그리고 슬펐지.”
“이해해요.”
“또…… 네가 보고 싶었어.”
“…….”
“엉망으로 혼란스럽던 와중에도 어떤 아이일까 궁금했지.”
“…….”
“착한 아이구나. 다정한 아이야.”
“……포도, 할머니랑 같이 먹을래요.”
“……!”
외할머니의 눈이 훅 커졌다.
외할머니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시녀들의 얼굴 또한 확 밝아졌다.
“폐하……!”
“세상에, 잘 되었어요.”
“폐하, 온실로 가시면 어떨까요? 에릴로트 궁주님을 닮은 예쁜 장미가 가득하니 좋아하실 거예요.”
외할머니도 “어, 어어, 그래야지.” 말을 더듬었다.
“오, 온실로 안내해 주어라. 저, 나는 챙겨갈 것이 있어서……!”
“어머, 혼자 보내시려고요.”
“아, 그, 그러면 안 되나. 손주는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다들 허둥지둥해서 나는 쿡쿡 웃었다.
“먼저 가 있을게요. 천천히 오셔요.”
“그, 그래. 서둘러 가마. 휘렌, 네가 온실로 안내해주렴.”
“예, 폐하.”
외할머니는 품위도 잊고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과자, 아기가 좋아할 만한 과자를 가져와라. 차는…… 그래, 지난번에 공물로 들어온 백차가 좋겠다.”
“예, 백차!”
“옷이랑, 내 장신구…… 요새 애들이 내 것 같은 목걸이를 좋아하려나? 사재 창고! 샤라, 사재 창고에 들러야겠다.”
“폐하,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어쩔 줄 모르는 외할머니를 보고 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내 곁에 남은 시녀, 휘렌이 에헤헤 웃으며 말했다.
“오늘을 얼마나 기대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곤 “자.” 하며 말을 이었다.
“온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휘렌과 함께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이 라온트라.
내 외갓집이었다.
* * *
라온트라 황후의 온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칼소이에 제국에선 못 본 품종의 장미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차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내올 테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래.”
휘렌이 나가고 나는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봤다.
토벌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꽃이 보인다니 신기하다.
할머니와 엄마의 환대 때문일까.
그런 감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벌컥!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더니 몇몇 사람들이 내 앞에 거칠게 앉았다.
“그 유명한 에릴로트 아스트라를 이렇게 보게 되는구나.”
황비들과 황자들이었다.
“예.”
내가 간략하게 대답하자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베르단디 황비가 입매를 비틀었다.
16살쯤 된 베르단디 황비의 아들, 프레이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수 없는 년.”
그 모친인 베르단디 황비는 대놓고 나를 지적했다.
“듣던 대로 오만한 아이로군. 황족에 대한 예는 그 잘난 몸뚱이 어디에 구겨 넣은 게냐.”
“아아, 송구합니다.”
“그래, 하면 어디 인사를 받아볼까.”
“하렴.”
나는 뻔뻔하게 프레이 황자를 바라보았다.
“뭐?”
“뭐, 뭐라고?”
말뜻을 못 알아듣는 모양이니 정확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나는 황태자의 원자(첫 아이). 라온트라 계급으로 치면 3등 황족이다. 황태자가 생겼으니 다른 황자, 황녀는 자연히 4등 황족이 되지.”
황비의 계급은 논외고.
나는 프레이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인사하라고, 삼촌.”
“무, 무슨……! 어머니!”
“너—!”
나는 차분히 소리치는 베르단디 황비를 바라보았다.
“‘너’가 아니고 ‘궁주’입니다. 황비.”
라온트라의 내궁은 복마전으로 유명했다.
이제껏 귀족, 그것도 더러운 피로 살아온 나는 만만하다고 여긴 모양이지.
하지만 나도 아스트라의 복마전을 겪어온 사람이라 이거야.
“나는 메제일공(라온트라의 개국공신)의 61대손이며, 황제 폐하의……!”
“아, 제가 제 소개를 안 했군요.”
나는 황족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스트라의 23대손, 위대한 크로노스 아스트라의 손녀이자 현 공작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적녀…….”
“…….”
“또한 알렉시스 칼소이에의 혼약자로 성녀의 이름을 허락 받은 자입니다.”
“…….”
“라온트라의 비센테 황제의 적통 황손이자, 벨로스터 황태자의 유일무이한 자식임도 밝혀야 할까요.”
“이게……!”
어린 프레이는 감정을 조절할 줄을 몰랐다.
벌떡 일어난 그가 손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나는 확, 그 손목을 끌어당겼다.
균형을 잃은 프레이가 테이블에 턱을 찍고 우당탕! 넘어졌다.
“프레이! 너, 이 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이에게 다가갔다.
“내 어머니보단 내가 만만하지, 삼촌?”
“……!”
“몇 번 윽박지르면 알아서 도망칠 줄 알았어?”
“어, 어머니, 저 계집이……!”
“궁주—!!”
내가 소리치자 프레이가 딸꾹! 하며 굳어졌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프레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라온트라에서 신경전을 벌이며 살아온 삼촌이 강자라고 생각해?”
“…….”
“이 복마전 안에서 힘을 키웠다고 느껴?”
“…….”
“어쩌지, 삼촌.”
나는 프레이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난 정말로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이야.”
“…….”
“확실하게 말하지. 한 번만 더 내게 찾아와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아.”
“…….”
“내가 어떤 방식을 취할지는 잘난 머리로 생각들 해보시고.”
슥, 시선을 돌리자 황비들은 물론이고 황자들 또한 흠칫 어깨를 오므렸다.
그 후에야 난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짝, 쳤다.
“좋게 지내자고요. 난 기왕 생긴 외가 인척들과 잘 지내고 싶어요.”
“이, 이…….”
황비가 부들거렸다.
더 하려고?
‘그럼 받아줘야지.’
나는 힐끗 황비의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수호성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손을 내밀려던 찰나였다.
“감히 황후 폐하의 온실에서 이 무슨 소란이십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서늘하고도, 단정한 인상을 가진 미남자가 보였다.
그 뒤에 있는 건 메르세데스 황자였는데, 그를 보자마자 알았다.
‘아아, 메르세데스 황자의 형이구나.’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