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3세는 악역입니다-384화 (385/390)

384화.

발자크가 나를 휙,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부르신다.”

말은 내게 하지만, 알렉시스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나는 “그래, 그래.” 하며 발자크를 끌어당겼다.

“그만 노려보고 가자.”

“노려보지 않았어! 그냥 뒤지게 패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알겠다니까.”

발자크는 끌려가는 내내 알렉시스를 노려봤다.

알렉시스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 * *

성에 돌아갔을 땐, 한창 정신없던 중이었다.

목적지는 대회의장이었는데, 나는 공작 집무실 앞에서 멈칫했다.

집무실에서 짐이 나가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거야?”

하인들이 공손히 대답했다.

“새 가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단장 중입니다.”

“아…….”

그렇지, 참.

아빠는 공작위를 이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물건이 치워지고, 아빠의 물건이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할아버지의 물건이 나가는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었다.

‘저 책상…….’

어릴 땐 할아버지의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썼지.

저 책상에 매달려서 할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의자…….’

저 팔걸이에도 자주 매달려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서 눈을 반짝이던 날이 있었다.

소파라든가, 소파 테이블 등에도 추억이 있었다.

펜 하나조차도…….

펜대에 까마귀가 새겨진 저 만년필을 매일 훔쳐보았다.

무슨 일에 서명하는 걸까, 무엇을 하면 더 눈에 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아버지 취향에 맞는 손주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옮겨지는 가구 하나, 장식품 하나, 필기구 하나에 모두 어린 나의 환영이 보였다.

“하부지 보러 와써. 이고 히다 조써. 하부지 마시쓰라구. (할아버지 보러 왔어요. 이거 힐다가 줬는데도, 할아버지도 맛있어 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자, 자, 잔못해써요……! (자, 자, 잘못했어요……!)”

“하부지 조아……. (할아버지 좋으니까…….)”

아, 그래.

‘그럴 때가 있었어…….’

멍하니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에릴로트.”

“아빠.”

“왜 그러고 있는 것이냐.”

발자크가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난데없이 멈춰서서 멍하더라고요.”

요슈아가 발자크를 툭 쳤다.

“하여간 눈치가 없다니까.”

“눈치가 왜?”

리시먼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발자크가 눈치 없던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

“왜! 무슨 소린데!”

요슈아와 리시먼드는 내가 감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빠는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감쌌다.

“가자.”

나는 아빠를 지그시 올려다봤다.

그의 뒤로도 어린 나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은요. 하루에 한 범만 가께요…….”

“아밤미 안 기찮게 몰래 보께요.”

“쪼꼼 보고 빤니 가께요.”

세상이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모든 게 두렵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사소한 일에도 가슴이 떨리던 날이 있었다.

“지나왔으니까.”

아빠의 말에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주변을 가득 메운 어린 나의 환영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는 지나왔다.

결국 지나오고 말았다.

노력해서, 죽을 듯이 발버둥 쳐서, 그래서.

“네.”

나는 아빠의 손을 잡았다.

어리숙하고, 못나기만 했던 나는 없다.

지난달까지 떠올리기만 해도 아렸던 어린 난, 실은 대견한 노력가였던 것이다.

커다란 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밀려들었고, 빛무리가 가득 퍼졌다.

마지막 어린 환영이 복도 저 멀리로 달려갔다.

“안넝!”

—밝게 소리치며.

“안녕…….”

중얼거리자, 아빠가 나를 쳐다봤다.

“뭐?”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는 아빠의 팔을 끌어안고 웃었다.

티 없이 맑게.

노력의 끝은 내가 그리 바라 마지않던 행복이었다.

* * *

……라고 생각한 게 한 시간 전이었지, 분명히.

나는 식은 눈으로 왈왈 짖는 혈족들을 쳐다봤다.

“결국 사재를 투자해서 바스티나 령을 재건한 건 저라고요. 한 치의 땅도 포기 못해요!”

“사재를 쓴 게 너뿐이냐?! 개인 재산을 쓴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아니, 애초에 구스타프 령이 이만큼 발전한 게 다 누구 덕이야아아아악!”

“소리를 질러?! 누군 못질러어어어어억?!”

“내 땅은 안 돼애애애액!”

거의 치고받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평화가 한 시간을 안 가?”

중얼거리자 요슈아가 하하 웃었다.

“아스트라의 긴 역사에서 개 짖는 소리가 안 난 적이 있었어? 평생을 그럴걸.”

그래.

요슈아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개였다.

밥그릇 뺏기지 않으려고 악을 내지르는 꼴이 딱 그랬다.

아빠가 공작위를 이었다.

즉, 아스트라의 직계라는 이유로 500제곱킬로미터 이상의 영토에 본인의 이름을 걸고 다스린 자들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얌전히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구스타프 숙부가 탕! 테이블을 내리쳤다.

“애초에! 넷뿐인 자식이 13구역으로 나뉜 직계의 영토를 어찌 전부 다스린단 말입니까?!”

바스티나 고모가 이때다 하고 끼어들었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가장 면적이 넓은 공작직할령(구 데이몬드 관할령)만 넷으로 찢어 나눠도 허덕이지 않겠어요?!”

데콘스 숙부까지 어흠, 헛기침하며 말을 보탰다.

“아직 나이 어린 직계들이 어찌 이 구역을 모두 다스리겠습니까. 나이가 차서 혼인을 한 뒤에 차차 정리해도 늦지 않을 일…….”

이전부터 방계였던 자들도 얼른 동의했다.

혹시 직계들이 밀려나서 제 관할지를 노릴까 염려한 것이다.

아빠는 인상을 쓴 채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리시먼드가 픽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곧 터지시겠는데.”

요슈아와 발자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릴로트.”

“네가 나서야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빠들을 노려봤다.

“이런 일은 항상 내 몫이야, 왜?”

세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야 네가 우리 가족의 풀이니까.”

“넌 우리 가족의 윤활유니까.”

“우리 가족의 접착제잖아.”

“이 오라버니들이…….”

난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군중 투표를 제안합니다.”

“……뭐?”

“군중 투표?”

“투표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가주가 바뀌면 구역마다 주인이 바뀌어요. 주인의 성향에 따라 체계가 바뀌죠.”

체계를 정착시키는 시간과 비용이 크게 소요될뿐더러, 타 구역과 경쟁이 심각하여 장원의 융합을 저해한다.

“그거야…….”

“뭐…….”

혈족들 뿐아니라, 가신들도 동의했다.

“아스트라 장원 내 전체 69구역을 40구역으로 통합하고, 10년에 한 번 군중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합시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능한 일일 것 같으냐?!”

왜 말이 안 돼.

5년에 한 번 대통령을 선출하는 나라도 있는데.

이 세계의 환경을 고려해 10년이라고 한 것뿐이다.

바실레 고모조차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사회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다. 다른 귀족들뿐 아니라 황궁에서도 반발이 심할 텐데.”

“해서 가주는 세습합니다.”

사회 체계를 바꾸겠다는 큰 꿈은 없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단, 아빠가 가주인 동안엔 폭정과 군사 정변을 막아야지.’

“구역의 지도자로 출마할 수 있는 자도 가문의 허가를 받은 이로 한정하죠.”

“헛소리! 그런 건 말이 안 돼!”

“우리가 왜 그런 일에 동의를……!”

폭정을 일삼던 자들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바실레 고모나 드뷔시 자작, 카라·리지 자매의 모친 등 관할령을 잘 다스리던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턱을 괸 채로 생글생글 웃었다.

“그럼 숙부와 고모들은 이대로 관할령을 빼앗기시겠어요?”

“그, 그건…….”

“…….”

어차피 아빠가 칼을 뽑아 들면 저들은 방법이 없다.

가문법상 가주가 바뀌면 그 직계에게 관할령을 내놔야 하니까.

카라·리지 자매, 밀란 등 지난 ‘방계 연합’을 구축했던 이들의 눈이 떨렸다.

할아버지의 직계 자식이 사망하여 그 배우자가 다스리고 있던 땅.

다른 이가 가주가 되면 고스란히 빼앗겨야 했다.

그런데 이건 기회가 아닌가.

“투표제는 폭정을 막고, 기존의 불필요한 경쟁으로 소모되지 않을 좋은 방도라고 생각하는데요?”

난 오빠들을 쳐다봤다.

발자크야 원래 땅에 욕심이 없었으니 무조건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에릴로트!”

요슈아와 리시먼드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흠칫했다.

그래, 깨달았지?

‘출마는 가문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즉, 출마를 결정하는 건 아빠였다.

중앙의 힘이 강해진다는 거지.

요슈아와 리시먼드가 픽 웃었다.

“동의합니다.”

난 아빠를 쳐다봤다.

“어떠세요? 애초에 10년마다 지도자가 바뀐다는 것을 상정하고 체계를 만들어둔다면 시간과 비용을 모두 절약할 수 있을 거예요.”

아빠가 주변을 쭉 둘러봤다.

땅을 빼앗길까 봐 초조해하던 이들에겐 희망이 생긴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큰 땅을 다스릴 수 있겠지.

‘이 희망이란 게 무서운 거거든.’

도박도 인생 역전의 희망 때문에 흥하는 거잖아?

“선거를 준비해라.”

“예!”

“옙!”

회의장이 불타올랐다.

* * *

밤.

나와 오라버니들, 그리고 아빠와 알렉시스는 서재에 모였다.

요슈아가 물었다.

“아쉽지 않아?”

“뭐가?”

“이번 내전과 어둠을 물리친 일의 일등 공신은 너야. 공작직할령(구 데이몬드 관할령)을 네가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하나도. 다 나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발자크가 “엥?” 하며 내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게 뭐가 널 위한 일이야?”

“난 황실로 갈 거야. 황후가 되면 자연히 내놓아야 할 테지.”

“아아. 네가 빠지면 또 공작직할령을 두고 혈족들이 분열하겠구만.”

아빠가 물었다.

“결국 황후가 되려는 거냐.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일 텐데.”

“사람은 꿈을 꾸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싸움이 아니라 다른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할래요.”

“……언제 할 건데.”

“아빠가 결혼하시면요. 나, 엄마랑 같이 식장에 들어가고 싶으니까.”

“……!”

아빠가 흠칫했다.

오라버니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아빠를 쳐다봤다.

나도 알렉시스와 손을 잡고 푸흐흐 웃었다.

“엄마를 그리워하셨잖아요?”

“……그 녀석은 아니라잖아.”

나는 양손으로 뺨을 잡고 “흐음.” 신음했다.

“역시 아빠가 남이었어도 결혼할 순 없었을 것 같아.”

“뭐?!”

아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아빠는 알렉시스를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내가 네게 섭정보다 못하다는 게냐.”

“알렉시스는요. 제 앞에선 자존심을 안 세워요.”

“…….”

“수줍고 부끄럽고 용기가 없는 순간이 있을 텐데도,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준다고요.”

“…….”

“아빠는 아니잖아요!”

“……제길.”

알렉시스는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좋아, 에릴로트.”

“보세요. 이럴 때도 그런다니까요?”

“망할…….”

아빠가 이를 으득, 갈았다.

“엄마는요. 아빠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닐 거예요. 단지 아빠보다 소중한 게 있었을 뿐이지.”

“……너.”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요.”

엄마는 아빠가 저주에 걸렸을 때에도 구하러 왔다.

아마 내가 없었다면 언제고 다시 만났겠지.

“아빠에게 가장 소중한 건 누구지요?”

“……너희지.”

오라버니들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아빠를 보지 않던 그 순간에도 아빠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같이 애쓴 동료였던 거예요.”

“…….”

“그런데도 아니라시면 어쩔 수 없고.”

나는 알렉시스를 끌어당기며 일어났다.

“가자, 나 공로자 작성해야 해.”

“용기를 내십시오, 아버님.”

아빠는 속이 뒤집어지는 얼굴로 알렉시스를 노려봤지만, 알렉시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날 따라 나왔다.

복도를 막 걸으려던 순간, 서재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난데……. 제길, 데이몬드 아스트라 말이다. 왜 연락했냐니. ……보고 싶어서 했지.”

엄마의 말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미쳤어?]

“오래전부터 네게 미쳐있었어.”

[돌았군, 정말.]

“할 말이 그것뿐이냐?”

[있지.]

“뭔데?”

[……에릴로트는 어때?]

“말고.”

[에릴로트가 식사는 잘 해?]

“그것 말고.”

[에릴로트가…….]

“에릴로트 말고!”

[왜 소리를 질러, 이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가.]

“……네가 욕을 할 때가 좋아.”

[변태야?]

“널 좋아하던 순간이 떠올라서.”

[……미친놈.]

나와 알렉시스는 서로의 손을 잡고 키득키득 웃었다.

아직 아빠와 엄마한테는 시간이 좀 걸리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뭐 어때.

우리에겐 시간이 많은데.

* * *

깊은 밤.

논공행상할 공로자들을 작성하고 있던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쓰다가 멈칫했다.

내 앞에 찻잔을 놔둔 한지혁이 물었다.

“왜?”

“마리는 어디 있어?”

“의료원. 마물을 분리하고서도 상태가 계속 안 좋았거든. 아무래도 혼과 육체가 찢겨졌다가 복구된 거니 멀쩡할 리가 없겠지.”

“……의료원 문 닫혔을까?”

“그러니까 지금 시간이…… 음, 아직 10시가 되기 전이네. 열려 있을 거다.”

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홀로 의료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붉은 달이 뜬 날이었다.

붉은 달에도 무섭지 않다니.

‘평화롭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리의 병실로 향했다.

막 병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지 마세요, 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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