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이제 공작이 아니지.”
“……어르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마리에게 고개를 숙이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네 모친과 네 인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네 동생……. 모든 것이 그리미에의 죄고, 그리미에를 그리 키운 나의 죄다.”
“…….”
“그러나 감사한다. 에릴로트에게 다정한 존재가 되어준 것에.”
“…….”
“그 애의 힘이 되어준 것에…….”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귀하신 분이 제게 어찌 이러십니까…….”
“이제 지위에서 내려온 한낱 노인이다. 손주의 삶에 빚지고, 아들의 죄를 뒤집어쓴 노인이지.”
“…….”
마리는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용서하기 어려울 것을 알아.”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흠칫 쳐다봤다.
“저 애 엄청난 부끄럼쟁이거든요.”
나는 씩 웃으며 마리의 팔을 끌어안았다.
“사실은 사과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예요.”
“너…….”
마리가 나를 살짝 쏘아봤다.
민망해서 그러는 것을 나는 안다.
“할아버지와 비슷하지요?”
“…….”
“…….”
두 사람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다정한 구석을 날 세운 말로 가리는 것도, 약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아요.”
“그만해…….”
마리가 휙,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노력가인 것도, 책임감이 강한 것도 할아버지와 비슷해요.”
할아버지가 움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이 애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이 애의 속도에 맞춰서.”
마리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할아버지는 픽 웃었다.
“그래. 그러나 속도를 맞춰야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지.”
“네?”
“마리를 입적할 것이다.”
마리가 흠칫했다.
“어르신, 저는 호문쿨루스예요! 게다가 피를 나눠 받은 사람은……!”
“대죄인인 그리미에지.”
그리미에의 딸이란 게 밝혀지면 마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괴로워질 것이다.
심하게 박해당하겠지.
그에게 살해당한 자들의 가족, 연인, 형제가 나타나 복수하려 할 수도 있었다.
“해서 너를 내전의 공로자로서 입적할 것이다. 방계 가문을 이끌어야 할 것이야.”
“……!”
“가문의 이름은…… 에릴로트에게 받지.”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마리의 손을 잡았다.
어쨌거나 마리는 아스트라의 피를 이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방계 가문을 이끌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저 생각해둔 이름이 있었어요.”
“이름은 무슨……! 나한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야? 귀족으로써의 교육은 전혀 받지 않았다고! 가문에 폐만 끼칠 거야!”
마리는 네가 대신해서라도 거절하라며 닦달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마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루아즈(생명).”
“너…….”
“미들 네임은 내 이름의 한 자를 줄게. 릴 루아즈(고귀한 생명).”
“…….”
“귀족답게 이름도 살짝 고치자고. 마리안느 릴 루아즈.”
“……짜증 나. 호문쿨루스에게 무슨 생명이야. 사람 놀려?”
“고맙다는 뜻이지?”
“짜증 난다고. 너…….”
“그건 너무나 기쁘다는 뜻이고.”
마리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게 있어 마리는 영혼의 쌍둥이 같은 아이였다.
감당하기 힘든 힘을 타고난 죄로 세상에 상처받았다.
그러나 아등바등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부탁해, 마리.”
“……뭐가.”
“내 해피엔딩엔 너의 행복도 포함되어 있거든.”
이 애 앞에서만 서면 꽁꽁 닫아둔 마음의 틈이 열린다.
열일곱, 여느 애들처럼 눈물이 많고 웃음이 많아진다.
봐, 지금도 나는 울고 있잖아.
“이제 하고 싶은 공부를 잔뜩 해.”
“…….”
“숨어지내지 말고 가고 싶은 곳을 잔뜩 가자.”
“…….”
“네 능력을 숨길 필요 없어. 뭐든 꿈꿀 수 있으니까.”
마리가 나를 끌어안았다.
“어허헝…….”
이 애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의 앞에서 누구보다 감정이 풍부한 소녀였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와 마리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리의 등을 토닥이던 난 문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퀼라가 나와 할아버지, 마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엔 들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마리가 아주 좋아하는 메리골드였다.
나는 마리에게 속삭였다.
“봐, 넌 지금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잖아.”
내가 마리에게서 떨어지자, 마리는 우물쭈물 손끝을 문질렀다.
팔짱을 끼고 있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스트라는 직계든, 방계든 그 어떤 자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
마리가 움찔, 할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아퀼라에게 다가간 그녀는 옷자락을 말아쥔 채로 웅얼거렸다.
“우리가 살던 산…… 어느 겨울에…… 모닥불 앞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
“뭐?”
“오라버니가 불을 때 줬고, 마사는 내게 기대 잠들어 있었어…….”
“아, 그 날…….”
“불그림자가 비추는 오라버니 얼굴을 봤는데…… 그런데 나…….”
“…….”
“……살고 싶다고 느꼈어.”
아퀼라가 멍하니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옷자락을 꽉 그러쥐고 웅얼거렸다.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그 날은 살고 싶었어. 살아서…… 오래 오라버니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얼굴만?”
“어?”
아퀼라가 고개를 삐딱하게 젖힌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나한테 볼 게 얼굴뿐이냐고.”
“……얼굴 말고 뭐가 있담.”
마리가 퉁명스러운 척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퀼라는 부드럽게 마리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마리의 눈이 떨어질 듯 커졌다.
“뭐, 뭐, 뭐 하는……!”
“또.”
“어?”
“또 뭐가 보고 싶은데.”
“뭐냐니…… 그건, 어, 그러니까…….”
마리는 눈만 억지로 돌려서 나를 쳐다봤다.
‘뭐든 말해도 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모, 몸?”
“…….”
아퀼라는 물론, 나와 할아버지까지 침묵했다.
“……그거 말고.”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마리가 새빨개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생각하다 보니 화가 났는지 그녀는 울컥했다.
“확실하고,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깔끔한 대답을 하게 해달라고! 난 이래서 수학이 좋아. 공식을 알면 답이 하나잖아! 이런 대화는 모르겠……!”
아퀼라가 마리를 휙, 끌어안았다.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어머, 어머.’ 하며 손끝으로 입을 막았다.
‘팝콘이 필요하다!’
아퀼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어버리더니 말했다.
“이런 뜻이다, 이 여자야.”
“……에, 에이씨.”
“이런 때까지 말이 험하지.”
“뭐,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나와 같이 노을이 보고 싶다고 해.”
“…….”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해.”
“…….”
“모닥불도 다시 보고 싶고, 겨울 산도 다시 보고 싶다고 해. 겨울은 물론, 봄과 여름, 가을도 함께 있을 테니까.”
“…….”
“난 확실하고 명료하게 말해줬는데? 깔끔한 대답은?”
“……보고 싶어. 전부.”
아퀼라가 킥킥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겨울, 끝났다. 그치.”
“……응.”
“봄부터 보자고.”
“응…….”
마리는 아퀼라의 허리춤을 잡고 울먹였다.
나는 할아버지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가요.”
“왜?”
“할아버지 눈치 없어요…….”
“뭐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할아버지를 끌고 나왔다.
창문 너머로 가까워지는 마리와 아퀼라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팔을 끌어안았다.
“날씨가 좋지요?”
“춥기만 하구만 무슨.”
“이럴 땐 좋다고 해주세요!”
“……좋아, 그럼.”
난 할아버지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잠은 좀 주무셨어요?”
“그래.”
“정말이에요? 제가 죽은 줄 알았을 땐 한숨도 못 주무셨잖아요.”
“……누가 그래.”
“드뷔시 자작이요.”
“내 이 놈을…….”
나는 “아!” 하며 할아버지를 올려다봤다.
드뷔시 자작의 입을 찢어버리겠다느니 살벌하게 중얼거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움찔했다.
“눈은요? 눈은 괜찮으세요?”
“눈은 왜.”
“막 우셨다던데. 아빠와 끌어안고서.”
“……거기 누구 없느냐! 내 검을 가져와라!”
할아버지는 내게 울었다는 걸 말한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누구냐! 누가 그런 말을 네게……!”
알렉시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에 할아버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저도 엄청 보고 싶었어요.”
“……어리광은.”
“할아버지는 어리광이 많은 저를 좋아하시잖아요.”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가 어흠! 커흠! 헛기침하며 고개를 슥, 돌렸다.
“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소용이 없으니까요?”
“널 싫어한다는 게 아니라…….”
“더 좋아할 수 없을 만큼 절 사랑하시니까.”
“…….”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또 헛기침하시면서 고개를 돌리시겠지.
민망한 말씀은 못 하시니까.
‘그래도 좋…….’
“그래.”
“……네?”
“맞아, 난 널 더 좋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반칙이에요. 수줍어진다고요.”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어.”
“…….”
“네가 아주 어릴 때, 날 할아버지하고 달려오던 그 순간부터.”
“……응.”
“널 잃을까 두려웠고, 널 지키지 못할까 무서웠다. 그러나 나를 잃지 않게 한 것도, 날 지킨 것도 너로구나.”
“…….”
나는 할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
“증손주는 더 예쁠 거라고요. 그러니까 그 애가 자라고, 결혼하고, 또 다른 손주를 낳을 때까지…….”
“증손주는 필요 없어.”
할아버지가 눈을 희번득 빛냈다.
‘그런 맥락이 아니었는데.’
나는 킥킥 웃어버렸다.
“왜…….”
할아버지가 다시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냥요. 좋아서.”
아, 나는 오늘 정말로 틈 없이 행복하다.
아마도 아주 오래 그렇게 되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 * *
“……라고 확신을 한 게 어젯밤이거든.”
나는 흐린 눈으로 바닥에 쌓인 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지혁이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하루아침에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해줄 사람?”
콘라드는 어색하게 웃었고, 한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새벽, 공작성으로 옮겨온 황도 저택의 하녀 하이디와 베티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건 모두 아가씨께서 사랑스럽고!”
“훌륭하시고!”
“멋지셨고!”
“눈부셨기 때문이지요~!”
와아아아아!
고용인들이 한껏 동의하며 양팔을 번쩍 들었다.
‘……보너스를 너무 많이 줬어.’
내전으로 무너진 성과 저택을 보수한 고용인들에게 보너스를 한껏 안겨줬다.
그러니까 저들 눈은 마치 별이 박힌 듯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말했다.
“이 선물이 다 뭐야!”
셀 수 없이 많은 선물.
전부 청혼장과 함께 온 선물이었다.
‘그래, 마경으로 생중계를 했으니 내 힘이 탐나는 건 알겠다.’
그런데 왜…….
“샤토브리앙 공작은 또 뭐야?”
현 샤토브리앙 공작은 실린의 오라버니이자, 실린 사건에 엮여서 가문에서 축출된 전대 공작의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난 동생과 아버지의 원수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청혼을? 미쳤나?”
“미친 건 아닌 것 같던데.”
한지혁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닌 걸 어떻게 알아?"
“성문 앞에 있는 걸 봤는데 멀쩡하더라고.”
“뭐?”
나는 깜짝 놀라 성큼성큼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커튼을 확, 치자 성문 앞에 샤토브리앙의 가문기를 든 행렬이 있었다.
“정식 청혼이다. 거절은 어떻게 하는지 알지?”
오늘부터 행정관의 정복을 입고 입성한 한지혁이 씩 웃었다.
그렇다.
내전과 어둠을 닫는데에 크게 일조한 한지혁은 지난 번 귀족원에 이름을 올렸고, 내 부관이 되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이디, 옷…….”
“예, 아가씨!”
* * *
옷을 입고 나갔을 땐, 성문 앞이 바글바글 했다.
샤토브리앙 공작이 직접 온 청혼.
응당 가신과 혈족들이 맞이해야 했다.
할아버지의 퇴진과 함께 가신들의 장에서 내려온 드뷔시 자작을 대신해, 새로운 가신의 장이 나섰다.
“안녕, 미켈란.”
“아가씨를 뵙습니다.”
그래, 새로운 가신들의 장은 미켈란이었다.
‘물론 아직 반항이 엄청나지만.’
미켈란은 아스트라에 있던 세월동안 엄청난 공로를 세웠으나, 가문의 역사가 깊지 않다는 이유로 가신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하지만 잘 처리하겠지.
형제, 자식이 없는 드뷔시 자작이 미켈란과 형제의 연을 맺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니까.
드뷔시 가가 미켈란의 뒷배가 된 것이다.
젊은 샤토브리앙 공작이 나를 쳐다보았다.
“스테판 샤토브리앙과 메리 샤토브리앙의 장자, 샤토브리앙의 검은 개들을 이끌고 있는 나 제레스 샤토브리앙—”
“……진짜 하셔야겠어요?”
다른 사람이면 말을 안 해.
샤토브리앙은 뭐야?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장녀, 아스트라의 에릴로트에게 청혼하는 바이다.”
“틀렸습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느?”
“데이몬드 아스트라와 벨로스터 라온트라의 장녀입니다.”
라온트라의 행렬을 이끌고 온 잔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