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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세는 악역입니다-386화 (387/390)

386화.

아침부터 안 보이기에 어딜 갔나 했더니, 엄마의 행렬을 맞이하고 있던 모양이다.

엄마는 내가 깨어난 후 다시 라온트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여전히 정적들이 득시글한 데다,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라온트라의 황제 폐하까지 편찮으시니 궁을 더 비울 수 없던 것이다.

나는 황태자의 정복을 입고 온 엄마에게 다가갔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일국의 황태자가 어찌 연락 없이 찾아올 수 있겠니.”

연락을 했었어?

나는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미켈란을 쳐다봤다.

미켈란이 빙그레 웃던 순간이었다.

쿵, 쿵, 쿵.

‘군화 소리?’

등 뒤에서 발소리가 잔뜩 들렸다.

돌아보자 아스트라 공작기를 든 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웬 공작기를……?’

어디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 앞엔 국무 회의에 갈 것도 아닌데 성장(盛裝)한 아빠가 있었다.

‘설마 이거…….’

엄마는 싸늘한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그리고 가까스로 화를 참듯 무언가를 꺼내 휙! 치켜들었다.

“이게 뭔지 대답을 해주셔야 겠는데, 아스트라 공작?”

“대륙어를 읽지 못하십니까?”

아빠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가 꺼내든 건 양피지였다.

양피지에 적힌 글자를 본 나는 눈을 슥슥, 비볐다.

읽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읽은 게 맞나 싶어서.

그야 저건…….

“고발…… 장?”

내가 떠듬떠듬 글씨를 읽자, 엄마는 울컥했다.

“아스트라 공작가가 국제 재판소에 라온트라의 황태자를 고발했다. 그것도 죄명이……!”

“혼인 빙자 사기.”

아빠는 여전히 뻔뻔한 목소리였다.

‘와우.’

나는 기가 막혀서 젊은 샤토브리앙 공작의 청혼도 잊고 두 분을 번갈아 쳐다봤다.

엄마가 이를 악물었다.

“무고죄로 역고발을 당하고 싶은가 보지?”

“무고? 어디가 무고하신지요.”

“난 공을……!”

“꼬시고, 애를 낳더니 도망갔지.”

“……!”

엄마는 숨을 크게 들이켰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그야…….

‘사실이니까.’

“…….”

“…….”

위풍당당 법전을 끌어안고 온 라온트라 행정관들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성문 앞은 휘잉,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눈을 꽉 감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사기로 죄를 묻고자 할 땐 속아서 빼앗긴 게 있어야 하오. 그러나 공은…….”

“빼앗긴 게 왜 없겠습니까.”

“내가 무얼 빼앗았단 말이오!”

“내 마음.”

엄마야.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쳐다봤다.

샤토브리앙 공작만이 인상을 쓰며 속삭였다.

“우리 얘기는…….”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에욧!”

눈치 챙겨!

내가 매섭게 쳐다보자, 샤토브리앙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엄마가 빠득, 이를 갈았다.

얼굴이 벌게져 있었는데, 수줍어서가 아니라 빡쳐…… 아니, 짜증이 올라와서 그런 듯했다.

“진심으로 공의 상태가 염려되니 부디 헛소리는 이쯤하고, 이 기가 막힌 고발이나 물리시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

“이쯤 하고—.”

“널 처음 봤을 때, 네가 남자인 줄 알았을 때.”

“…….”

“어려선 정체성을 고민했고, 커선 네 조건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

“지금도 그래.”

“…….”

“우리 앞엔 여전히 수많은 장애물이 있을 거고, 귀찮으며 머리 아픈 일투성이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

아빠가 성큼성큼 엄마에게 다가갔다.

“내 딸이 청혼서에 너와 나의 서명이 나란히 들어가길 바라.”

“…….”

“저 애가 날 홀로 두는 게 마음 쓰여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못하지 않고.”

“…….”

“더는 부모 일에 고민하지 않기를 바란다.”

양피지를 든 엄마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알아. 알아도 괜찮잖아.”

“…….”

“우린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어코 바라던 행복을 거머쥔 딸의 부모니까.”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했다.

“저요. 어릴 때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고?”

아빠가 미간을 좁혔지만, 나는 ‘에헤이’ 하며 미간을 좁혔다.

아빠가 입을 다물었다.

난 다시 엄마에게 다가갔다.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요. 지금도 아빠는 솔직하잖아요. 엄마는요?”

“…….”

엄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양피지를 힘주어 구기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딸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말하게 될 거야.”

“……뭐?”

엄마가 아빠의 멱살을 확 잡아끌었다.

그리고.

“……!”

“……!!”

촉.

가볍게 입술이 맞닿기 무섭게 사람들이 허억! 헉! 허업! 하며 숨을 들이켰다.

나도 잔느와 붙어서 ‘어머, 어머!’ 하며 소리쳤다.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진 아빠를 탁, 밀쳐내며 손등으로 입술을 슥, 닦았다.

“난 지금도 내 딸의 엄마지만, 세상 모든 서류에 내 이름을 ‘에릴로트의 모친’으로 남기고 싶어.”

“어, 어…… 그래…….”

“결혼하자.”

“그, 그러자…….”

“그러나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내 딸이야.”

“나도 그러니까 됐어, 뭐.”

아빠가 픽 웃었다.

나는 와! 하며 양팔을 번쩍 들었다.

멀리서 둘레둘레 다가온 세 오라버니가 물었다.

“뭐야? 뭔데?”

발자크가 무슨 일이냐는 듯 물어서 난 소리쳤다.

“우리 엄마 생겼다!”

그러며 엄마에게 달려가 쏙 안겼다.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눈치 없는 새 샤토브리앙 공작이 물었다.

“그래서 내 청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거절! 완전히 거절이에요~!”

“…….”

발랄하게 소리치는 날 보고 샤토브리앙 공작이 입을 벙긋거렸다.

“왜!”

—하며.

왜겠어?

“내 부모님 대부터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하기로 했거든요!”

아빠와 엄마가 나를 감싸 안았다.

아, 정말이지 좋은 날이었다.

* * *

물론 아빠와 엄마의 결혼을 반대하는 무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라온트라부터 뒤집어졌다.

“서제국의 공작과 결혼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서제국인이 우리 황실의 후계 서열에 들어가다니요!”

“황태자의 결혼은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한 일! 독단으로 결정하실 순……!”

왈왈왈왈. 왈왈.

엄마는 그들의 고함을 밥그릇 뺏길까 두려운 개들의 짖음이라 표현했다.

난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정말 아빠와 엄마의 결혼이 문제가 될 건 아니잖아?’

못마땅한 황태자에게 아스트라의 지원이 생긴 게 불안할 뿐이지.

엄마의 정적들은 언제든지 황태자위를 빼앗을 수 있다고 여겼을 테니까.

이때 아빠가 나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라온트라의 계승 서열에서 제외되어도 상관없다. 원한다면 각서라도 써주지.”

어디 더 반대해봐라.

그런 말에 라온트라의 개들이 부들부들 떨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스트라의 반응은 어떠냐고?

‘오히려 온건하지.’

온통 선거에 정신이 팔려 있었거든.

아빠가 이전의 기득권층을 모두 물갈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회를 주었다.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들이 수없이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내전, 몬스터의 침입 등으로 혼란했던 민심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칼소이에에서 난리가 난 건 다른 쪽이지.’

“폐하, 라온트라 황실과의 혼맥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요! 아스트라는 이 땅을 지키는 주축 중 하나입니다!”

“예! 행여 아스트라가 라온트라로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칼소이에의 개떼들은 다른 귀족들이었다.

가뜩이나 분위기가 좋은 아스트라가 라온트라 황실과 혼맥까지 맺었으니, 이 기세를 누가 찍어 누르겠는가?

귀족들이 황태후를 붙들고 소리쳤으나, 황태후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하면 자네가 아스트라 공에게 가서 불가라 외쳐보시게.”

“그, 그건…….”

“본궁도 기꺼운 일이 아니니 지원은 해주지. 오, 공은 어떤가? 공이 가겠나?”

“…….”

어렸을 때부터 황태후에게 온갖 아부를 하던 게 이때 빛을 발했다.

완벽하게 내 편인 (예비)시할머니가 ‘나는 에릴로트의 편’을 내색해주신 것이다.

할아버지야 뭐…….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

아들 결혼엔 신경도 안 썼다.

최근에 취미에 홀딱 빠졌거든.

“이것 봐라, 에릴로트. 이게 ‘이롬’이라는 것이다.”

“그게 어디에 쓰는 건데요?”

할아버지의 사저엔 웬 잉크 덩어리를 묻힌 거대한 양피지가 엄청나게 붙어 있었다.

“쓰지 않아. 감상하는 거라고! 이게 내가 잡은 물고기가 얼마나 되나 찍는 것인데……!”

“아아, 어탁이구나. 이건 무슨 어탁인데요?”

“괴수어지. 아, 요놈이 얼마나 미끈거리는지 번번이 미끼만 물고 쑥 도망가기 일쑤였다고! 드뷔시, 그 놈도 못 잡아서 안달인 걸 내가 그냥 훅……!”

그렇다.

할아버지는 바다낚시에 홀딱 빠졌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낚시를 갈 때는…….

“어르신! 제가 자리를 잡아놨습니다!”

“여깁니다, 어르신.”

“이쪽이 잘 잡힐 겁니다. 여기서 도미를 잡았다던데요.”

공자들이 한 무더기 따라다녔다.

제르모 공작의 아들인 카시안.

여전히 아쳐 클럽의 회장인 위엘 랑그로.

심지어는 마시타브바 형제들까지.

오늘, 할아버지의 성화에 함께 낚시하러 나온 난 옆에서 한껏 알랑거리는 공자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질색하는 표정으로 미끼인 지렁이를 보던 한지혁에게 속삭였다.

“요새 공자들 사이에서 낚시가 유행이야?”

“유행은 낚시가 아니지.”

“뭐?”

한지혁이 할아버지 옆에 철썩 달라붙은 공자들을 향해 턱짓했다.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에릴로트 양은 그렇잖아도 내전에, 몬스터 토벌까지 혼란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황후가 되면 평생을 전쟁통에서…….”

“역시 진정한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게…….”

“여유하면 전데!”

“아니, 저……!”

내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한지혁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아쳐 클럽 회장 아니랄까 봐 ‘장수를 쏘려면 말부터 쏜다’고 하더라.”

“…….”

“얼마나 난리인 줄 아냐.”

“……왜?”

“제르모 공자야 제 아비가 성화였을 테고, 위엘 랑그로는 마경 속의 전사 같은 너를 보고 반했다고 하고, 마시타브바들은 뭐, 너도 알잖아.”

“…….”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낚싯대만 보고 있었다.

“내 오늘은 꼭 도미를 잡아주마!”

“……할아버지.”

“도미는 드뷔시 그 놈도 못 잡아본 것이야. 아, 랑그로 공자가 손맛을 좀 아는데 저 녀석도 도미는 못 잡아봤단다.”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공자들을 쳐다봤다.

미끼를 낚싯대에 거느라 진흙 같은 게 묻은 공자들이 헤벌쭉 웃었다.

“어, 어, 움직입니다!”

“어디 들어봐라! 아, 이 녀석! 그렇게 들면 되겠느냐! 줘 봐! 어허, 힘이 보통이 아닌데!”

“어르신, 힘내십시오!”

“어르신!”

……말을 쏘지 마. 차라리 장수를 쏴.

할아버지가 좋아하니 말리지도 못하고.

이러다 진짜 제일 큰 물고기를 잡은 공자에게 날 보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던 찰나였다.

부우우우우우우웅—!

어디서 뱃소리가 들렸다.

‘배?’

“어르신, 여깁니다!”

배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알렉시스의 부관이 할아버지를 향해 양팔을 흔들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나섰다.

“낚시는 배낚시죠.”

“…….”

“…….”

공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황실의 국가 선박을 가져와? 미친…….”

“권력으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제기랄, 형. 장막을 움직여야겠다.”

“연락하지.”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으나, 알렉시스는 씩 웃었다.

“타십시오, 어르신.”

‘공자들이 할아버지에게 붙어있는 건 어떻게 알았대?’

그때,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뭔가 해서 보니 위엘 랑그로를 밀쳐내고서 차지했던 낚싯대가 잠잠했다.

“물고기가 도망갔잖아—!”

“…….”

“제기랄! 큰 놈이었는데!”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알렉시스는 할아버지와 잘 맞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와는 꽤 잘 지냈는데, 할아버지는 유난히 알렉시스를 싫어했다.

다른 공자들과는 낚시도 하며 잘 지냈는데.

한번은 아빠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알렉시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싫겠지.”

“왜요?”

“제대로 된 경쟁자는 그 녀석뿐이잖아.”

“경쟁자요?”

“그래, 너의 애정을 두고 겨룰 경쟁자 말이다.”

“하지만 다른 공자들은…….”

“애초에 경쟁자로 치지 않는 거겠지. 넌 그 녀석 외에 다른 놈을 선택할 마음이 없으니까.”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알렉시스는 모르겠지.

할아버지가 내 짝으로 인정하는 건 저 하나인걸.

‘그래서 저렇게 동동거리는 걸 테고.’

할아버지가 울컥 소리쳤다.

“에잇! 빌어먹을 배 때문에 물고기가 전부 도망갔군!”

“……배에 타시면 더 좋은 물고기를 잡으실 수—”

“그게 내가 잡는 것이오?! 배가 잡는 게지!”

어쨌거나 이번에도 알렉시스는 조용해졌고, 할아버지는 길길이 날뛰었다.

나는 낄낄 웃었다.

‘하여간 바보.’

그러던 와중에 통신석이 울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콘라드였다.

[아가씨!]

“왜 그래?”

[바란에서 연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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