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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2화 (2/122)

2. 1화 드디어 만났습니다. (2)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르마이스 님을 직접 뵙고 인사드리고자 함이니까요. 눈앞에 뜬 창에서 승인 버튼을 눌러 주세요.]

그녀가 말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놀란 감정이 쉽사리 진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기에 끝까지 가 보기로 결심했다.

‘승인.’

손을 뻗어 승인 버튼을 누른 순간, 빛이 번쩍하더니 온몸을 감쌌다.

“큭!”

눈을 질끈 감아 봐도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빛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로 빛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빛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난 조심스럽게 팔을 거둬들였다.

“어?”

귓가에 목소리가 들린 후부터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 경우가 많아진다.

눈을 뜨고 앞을 보니 빛의 테두리를 지닌 사각 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화면 안에는 소녀가 들어 있었다.

화려한 금발의 머리와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미소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르젠 제국의 황녀인 세이라 이르젠이라고 합니다. 대륙의 영웅, 아르마이스 님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이르젠 제국?”

이르젠 제국은 어린 시절 내 꿈속 무대였던 카산트 대륙에 건립된 인간들의 나라 중 하나였다.

대륙 중앙에 위치해 있어 타 국가들 사이에서 교역과 소통의 장이었던 나라.

게다가 아르마이스로서 마왕과 싸우러 갈 때,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아미라 이르젠의 고향이기도 했다.

“아미라의 고향?”

이르젠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아미라는 이르젠 제국의 황녀였다.

그녀는 황족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졌음에도 대륙의 평화를 위해 마왕을 무찌르는 파티에 참여했고 주특기인 백마법을 통해 회복 및 보조 마법들로 파티원들을 지원했다.

아미라 이르젠이 없었다면 아무리 아르마이스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들, 마왕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아미라’를 언급하는 순간 소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맞습니다! 아미라 님은 저의 먼 조상님이십니다.]

“먼…… 조상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르마이스 님께서 마왕을 무찔러 주신 시점으로부터 9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비록 천 년에 가까운 긴 시간이지만, 카산트 대륙 사람들 중에는 아르마이스 님을 잊지 않은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구백…… 육십…… 칠 년?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

그 목소리는 꿈속에서 수도 없이 듣던 이름으로 나를 지칭했다.

게다가 단순한 환청이라고 치부할 수 없도록 빛의 화면까지 떠오르더니, 아르마이스로 활동하던 꿈속 배경이 천 년 전 일이라고 한다.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황당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지만, 자신을 이르젠 제국의 황녀라 소개한 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저희가 아르마이스 님께 연락을 드리게 된 것은 말이죠…….]

* * *

세이라 씨는 한참의 시간 동안 말을 쏟아 냈고 모든 설명을 마치자 차분히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아르마이스가 제 전생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 꾸었던 아르마이스에 관한 꿈이 그저 어린이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우연의 산물로 치부했다.

하지만 세이라 씨의 설명에 의하면 꿈속 내용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며 아르마이스는 전생에서 불리던 내 이름이라고 했다.

카산트 대륙에 태어나, 마왕에 의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대륙을 지키고 평화를 가져온 존재.

그녀가 아르마이스의 환생인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함이라고 했다.

[아르마이스 님 덕분에 대륙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작금의 평화를 가져다주신 아르마이스 님께 보은하고 싶었습니다. 아미라 님께서는 아르마이스 님께서 분명 환생하실 거라 예언하셨고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든 환생한 아르마이스 님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아미라 님께서는 돌아가신 지 오래지만, 우리 후손들은 아미라 님의 의지를 이어받아 아르마이스 님의 환생체를 찾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입니다.]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내가 아무리 비현실적인 내용을 다루는 웹소설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지만,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은혜를 갚겠다는 다른 차원의 존재를 만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고!

“그……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 일이니까요.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래서 저도 아르마이스 님께서 아미라 님의 이름은 꺼내셨을 때 놀랐습니다. 전생의 기억을 꿈으로 꿀 수 있다니…… 어떤 연유로 그런 꿈을 꾸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 아르마이스 님의 영혼이 매우 강인한 힘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차분히 아르마이스로서의 꿈을 상기해 본다.

열세에 몰려 멸망 위기에 처한 인간들, 그리고 밀물처럼 몰려오는 몬스터들.

카산트 대륙이 절망에 허덕이던 그때, 난 동료들과 혜성같이 등장했고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꿈을 꾸지 않게 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아르마이스의 영혼이 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인 걸까?

일련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던 그때, 세이라 씨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재차 본론으로 돌아오면, 저희는 아르마이스 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아르마이스 님. 혹시 필요하신 게 있을까요?]

“음, 필요한 거라면…….”

질문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이 빌어먹을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문제는 그녀가 내 현실을 바꿔 줄 만한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다른 차원에 머물고 있는 존재가 김준석 패거리로부터 나를 지켜 준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잠시 잊고 있던 학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일진 무리의 협박으로 인해 강제로 글을 써야 하는 상황, 그리고 이로 인해 학우들에게 변태라고 경멸당하는 현실이 비참하게 여겨졌다.

한 번 떠오른 부정적인 생각은 내 기분을 가라앉혔고 어느 순간부터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아르마이스 님.]

“네?”

감당할 수 없는 우울감에 허덕이던 그때 세이라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봤고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린 째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방금 아르마이스 님의 표정이 너무 침울해 보였습니다. 혹시, 무슨 어려운 상황에라도 놓인 건 아니신가요?]

“!”

그녀의 표정, 목소리에서 나를 걱정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감정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 학교에서 김준석 일행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김준석은 일진 모임에 속해 있었고 그를 따르는 불량배들이 적지 않았지만, 선생님들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깔끔한 외모에 성적도 최상위권인 준석은 선생님들이 보기에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으니까.

내가 그놈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해 봤자 선생님들이 나보단 김준석의 말을 더 믿어 줄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을 가족들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데다가 각자의 일로 바쁜 가족들에게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혼자 참고 견뎌야 한다고 다짐했고 생각과 감정을 꾹꾹 누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꽁꽁 막아 뒀다고 생각한 감정들은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가 드러나자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에게 내 고민을 말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 처지와 아픔들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한 순간, 어떻게 지금까지 감정들을 누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그렇게 제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허억허억.

애써 외면했던 서러운 감정들을 쏟아 내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거친 목소리로 말을 토해 내서였을까, 숨을 쉴 때마다 안쪽에서 비릿한 내음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채로 숨을 들이쉴 때마다 상체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문득, 후회가 됐다.

혹여나 조금 전 내 모습이 상대방에게 실망감을 주지는 않았을까?

‘다른 차원에서는 영웅으로 불리던 존재가 이렇게 나약해졌다는 게 한심하겠지……. 후, 어차피 나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밑천을 모두 보였다는 생각에 민망한 감정이 후폭풍처럼 몰려왔고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던 세이라 씨가 경멸의 눈빛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나를 아르마이스의 현신이라고 믿고 있는 그녀는 어떤 역경도 이겨 낼 수 있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영웅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감정을 분출할 통로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아픔들만 쏟아 내는 데 바빴으니 실망했다 해도 할 말은 없다.

[갈!]

자책감에 빠져 있던 그때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

고함에 놀라 고개를 들자 세이라 씨의 옆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집고 들어왔다.

얼굴을 반쯤 덮은 거친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장년의 남자.

대충 봐도 곰만큼이나 큰 덩치를 지닌 사내는 매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 지옥에 사는 악귀쯤은 단숨에 베어 버릴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내가 정신을 못 차리자 그는 별안간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브루스, 위대한 이르젠 제국의 제1 기사단장직을 걸고 맹세한다! 아르마이스 님을 기만한 버러지 놈들에게 기필코 천벌을 내릴 것이라고!]

천벌을 내려?

김준석 패거리에게?

이세계의 존재가 어떻게?

사내의 선언에도 여러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브루스 단장님, 일단은 조금 진정하시지요.]

[황녀님! 우리의 구원자이신 아르마이스 님께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쓰레기들 때문에 곤란에 처하셨는데, 어찌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 죽일 놈들! 이 개 같은 놈들을 반드시 씹어 먹고야 말테다!]

세이라 씨의 만류에도 브루스가 언성을 높이며 격앙된 제스처를 취하자 그녀는 단장의 팔 위에 손을 얹으며 재차 진정시켰다.

[브루스 단장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 또한 같은 마음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르마이스 님 앞입니다. 예의를 차리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춘풍처럼 부드러웠지만, 단장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단호함이 물씬 느껴졌다.

[크흠……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내는 뜨겁게 발산하는 기운을 가라앉힌 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부산했던 분위기는 금세 차분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면에 보였던 것은 세이라 씨 혼자였기에 당연히 둘만의 대화라고 여겼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차피 이세계의 존재이니 내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겠거니 생각했었지만, 세이라 씨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봤을 거라 생각하니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밀려오는 쪽팔림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부림치고 있던 중, 세이라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마이스 님.]

“네?”

[어떤 수모를 겪으셨는지 대충은 알게 됐지만, 품고 계셨을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아르마이스 님을 찾아뵙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아르마이스 님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보은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르마이스 님께서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으시다면 저희는 아르마이스 님께서 고통에서 해방되실 수 있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말만 들어도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지금까지 혼자서 맞서야 했던 빌어먹을 현실에 누군가가 함께해 준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이들은 다른 차원의 존재이기에 세이라 씨가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말을 계속해도 그냥 예의상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차원의 벽을 넘어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할까?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아픔을 토로하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은이라는 단어를 거듭 꺼내는 세이라 씨의 진지한 모습에 차원의 벽을 뛰어넘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정말로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입니다.]

반신반의하면서 던진 질문에 세이라 씨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세이라 씨라면 믿을 수 있어.’

다른 차원의 존재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던 내 마음 안에 희망이 들어서고 있었다.

[저희에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면, 애써 아르마이스 님을 찾은 보람도 없었겠죠.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즉, 보은할 수 있는 수단도 확실히 갖추고 있다는 말이지요.]

세이라 씨는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바로 차원 연결 장치를 가져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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