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화 드디어 만났습니다. (4)
“훈련이요?”
[그렇습니다.]
짝!
훈련의 의미를 물으려는 순간, 세이라 씨가 손뼉을 치며 브루스 단장의 말에 동의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그녀는 말하면서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잖아도 커다란 그녀의 눈 안쪽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여기 브루스 단장님께서는 제국 제일의 기사이고, 제국을 넘어서 대륙 전체로 범위를 넓히더라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이십니다. 게다가 단장님께서는 지금까지 훌륭한 기사들을 무수히 육성해 오셨죠. 제국에 있는 기사들이라면 단장님의 훈련을 한 번이라도 받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지도에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으흠. 황녀님, 그리 말씀하시면 이 노인네가 참 부끄럽습니다.]
브루스 단장은 매서운 기세를 뿜어내던 아까와 달리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감정을 내비쳤다.
연신 헛기침을 하던 그는 허리를 곧게 펴더니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아르마이스 님은 저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분이셨습니다. 비록 현재 계신 곳이 우리와 다른 차원이긴 하나 분명,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브루스 단장의 눈에는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맹신에 가까운 그의 믿음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아르마이스는 강했다.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기 일보 직전의 몬스터 군단들을 몰아냈고,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마왕과 단독으로 싸워 결판을 지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아르마이스가 내 전생이라고 해도…… 현실의 나는 운동이라고는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약골이라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체력장에서는 늘 최저 등급만을 받아 왔고, 운동의 ‘운’, 아니, ‘ㅇ’과도 연관이 없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내가, 브루스 단장의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김준석 일행을 이길 수 있을까?
가당치도 않다.
“그…… 저어…….”
[네, 아르마이스 님.]
브루스 단장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다.
아니,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
“제가 전생에 아르마이스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강진우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운동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제가 갑자기 김준석 일행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어요.”
김준석이 실제로 싸우는 모습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준석은 어렸을 때부터 복싱, 무에타이와 같은 투기 운동을 전문적으로 배웠고, 이미 중학생 때부터 싸움을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비록 김준석의 실력은 확인한 적이 없으나 이석호가 싸우는 모습은 본 적이 있었다.
이석호는 학기 초부터 으르렁대던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100kg이 넘는 거구에다 힘이 장사라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붙으니 이석호의 업어치기 한 판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유도를 배웠고 중학교 때 잠깐이었지만 선수로 뛴 적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런 이석호도 김준석의 말에는 꼼짝 못 하고 아랫사람을 자처하니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놈과 맞서 싸운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릿 속이 복잡하던 그때, 세이라 황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아르마이스 님.]
“네?”
[아르마이스로서의 기억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셨죠?]
“……네. 단편적이지만요.”
[이곳 카산트 대륙에는 아르마이스 님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서에 기록되어 대대손손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역사서 중에서도 아르마이스 님의 일대기는 제가 가장 좋아했던 책이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카산트 대륙에 내 위인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겠지만, 나는 세이라씨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태연히 말을 이어 갔다.
[그 시절, 카산트 대륙의 사람들은 마왕과 몬스터 군단의 압도적인 기세에 지레 겁을 먹고 항복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분, 아르마이스 님만이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제가 읽은 책에는 대륙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할 때 아르마이스가 말했다. 우리가 패배하는 순간은 포기할 때뿐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언제나 기회가 있습니다.’ 이처럼 아르마이스 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설득해 동료를 만들고, 몬스터에 맞설 군대까지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시는 데에 이르렀지요.]
“…….”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묘사된 그 장면은 꿈에서도 수차례 보았던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침묵을 유지하는 나를 향해 세이라 씨가 차분히 말을 건넸다.
[그때 아르마이스 님께서 해 주신 그 말이 세계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르마이스 님께 그 말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희망을 품고 있다면 언제나 기회가 있는 법이니까요.]
왠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지금까지 김준석 일행에게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무기력하게,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절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문 탓일까.
입 안쪽에서부터 비릿한 쇠 냄새가 느껴졌다.
‘그녀 말이 맞아. 지금까지는 방법을 몰라 엄두를 못 냈지만, 이제는 지도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잖아?’
이르젠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으며, 지금까지 수많은 기사들을 길러 냈다는 브루스 단장을 떠올리니 용기가 샘솟았다.
외양만 봤을 땐, 중세 기사를 코스프레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지만, 눈빛과 기합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브루스 단장님의 말씀을 따라 보겠습니다.”
[오오오오! 잘 선택하셨습니다, 아르마이스 님!]
브루스 단장은 들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언성을 크게 높였다.
“그러면…… 무엇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지금까지 한 운동이라곤 초등학교 때 태권도 체육관을 잠깐 다닌 게 전부인 내가 제국 최고의 기사의 가르침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꿈에서 몬스터 군단 퇴치나 마왕과의 전투와 같은 주요 장면들은 나왔지만, 그가 훈련하는 장면은 딱히 보지 못했던 거 같다.
하긴, 다른 차원에 환생한 사람의 꿈에 나타나려면 영혼에 각인될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갈팡질팡하던 그때, 기수식을 취하는 브루스 단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아, 일단 저를 따라 하시면 됩니다. 두 발은 어깨너비로, 양 주먹을 가볍게 쥔 채 팔을 앞으로 내밉니다.]
그가 취한 자세는 영상으로 봤던 복싱의 기본자세와 비슷했다.
복싱은 기능성이 가장 좋은 양팔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효율적인 무술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시절에도 복싱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무술로 결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을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따라서 이세계에서도 권투와 유사한 무술이 있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자세를 잡아 보았다.
두 다리는 어깨너비로…… 주먹은 가볍게 쥔 채 두 손을 앞으로.
[오른손은 조금 더 오른쪽 턱 근처로 두시고…… 네, 좋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조금 더 앞으로…… 네. 그 자세입니다.]
이건 분명, 티비에서 봤던 복싱 자세야. 내가 이렇게 파이팅 자세를 취하다니…….
모든 동작과 자세들이 어색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희열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샘솟았다.
김준석 패거리를 향한 반격의 서막이 지금 막 시작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혼자 흐뭇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그때, 브루스 단장이 말을 이었다.
[아르마이스 님, 지금 제가 가르쳐 드리고자 하는 것은 필살기입니다. 현재의 저를 있게 해 준 아주 막강한 기술이죠.]
꿀꺽.
필살기는 격투 게임에서나 쓰이는 용어로 보통 사람이 쓴다면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브루스 단장의 입에서 나오자 어떠한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감을 다스리며 그가 어떤 기술을 선보일지 차분히 기다렸다.
권투의 필살기라면…… 더파이팅에서 나왔던 뎀프시롤과 같은 기술.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어떠한 적도 이길 수 있을, 바로 그러한 것.
게다가 그 필살기를 언급한 이가 바로 이르젠 제국 제일의 기사이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준석도 이길 수 있도록 해 줄…… 바로 그런 기술!
[자아, 목표를 정하셨으면 주먹을 꽉 쥡니다.]
그의 지도에 따라 나도 주먹을 꽉 쥔다.
[그리고 두 주먹의 끝 지점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시오.]
나는 그의 지도에 따라 주먹 끝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리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주먹의 끝 지점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와닿지 않았다.
‘이런다고 뭐가 될 리가 없을 거 같은…… 응?’
그렇게 내 속에 의구심이 생길 찰나, 변화가 발견된 곳은 화면 안쪽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럽게 빛나기 시작한 브루스 단장의 주먹.
‘아니, 저게 대체 뭐야?’
예상치 못한 전개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브루스 단장만큼은 너무나도 태연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아, 집중해서 주먹 끝에 모은 이 마력을 단번에 방출하는 겁니다.]
[잠깐만요 단장님! 여기서 그렇게 마력을 방출하면…….]
“저, 저기, 잠깐만요. 이쪽에는 마력이란 게 없…….”
[으랴아아아아앗!]
브루스 단장은 나와 세이라 씨가 말릴 새도 없이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파아앗!
그와 동시에 새하얀 빛이 화면 전체를 감쌌다.
“읏!”
강력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도 버거웠다.
나는 팔을 들어 눈을 보호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빛은 잦아들었다.
“으으…….”
빛이 사그라진 뒤에도 여전히 눈이 시렸다.
그래도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힘겹게 눈을 떠서 화면을 확인하니, 벽면 한쪽이 무너져 내린 것이 보였다.
[브루스 단장님! 이렇게 벽을 박살 내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세이라 씨의 질책에 브루스 단장이 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저는 그저 아르마이스 님께 제 오의(奧義)를 보여 드리고자…….]
세이라 씨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뭐라 하려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뭐어…… 성벽이야 다시 고치면 되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듯 보이자 브루스 단장은 태연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아르마이스 님, 방금 제가 보여 드린 것처럼 마력을 모아서 발산하는 게 이 기술의 포인트입니다. 자, 한 번 해 보십시오.]
브루스 단장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기술을 펼쳐 볼 것을 권했지만, 그러기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단장님. 이쪽 차원에는 마력이 존재하지 않아요…….”
[네?]
내 말을 들은 브루스 단장과 다른 이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흐음…… 이, 이거 예상 밖이군요. 저는 마력을 활용한 전투에 능숙한지라…… 마력이 없는 차원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뜻밖의 사실을 깨달은 브루스 단장은 턱을 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이렇게 된 이상, 순수한 체술로만 가야겠습니다! 제가 직접 단련시켜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번복하는 게 죄송스럽긴 하지만, 체술만큼은 우리 기사단 안에서도 이 아이가 최고죠. 아린!]
[네.]
브루스 단장의 부름에 흑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또래나 될 법한 나이려나?
[아린, 너는 지금부터 아르마이스 님에게 체술을 가르쳐 드려라.]
[네? 제가 아르마이스 님을요?]
[그래.]
응? 뭐지?
브루스 단장의 말에 소녀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져 보인 건 내 착각일까?……
에이, 설마.
내가 잘못 본 거겠지.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화면을 보니 소녀는 씽긋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음. 역시. 내가 잘못 본 거였어.
[네, 단장님. 제가 책임지고 아르마이스 님을 단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소녀는 활짝 웃으며 밝게 대답했고 브루스 단장은 이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래. 믿고 있겠네, 아린.]
둘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기색이 보이자, 세이라 씨가 나섰다.
[그러면 나이트 아린에게도 통신 크리스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제국의 주요 인사라면 모두 크리스털을 갖고 있어서 원하실 때면 언제든지 소통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루라도 빨리 차원 연결 장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리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뵙는 그날을 기대하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이라 씨와 다른 사람들이 화면 밖으로 물러났고, 오직 한 명, 내 훈련을 전담하게 된 아린이라는 소녀만 남게 됐다.
세이라 씨는 그녀를 나이트 아린이라고 불렀다.
브루스 단장이 기사단 안에서도 체술 실력은 으뜸이라며 칭찬한 것을 보면 열심히 배울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생긴 것으로만 봐서는 나와 비슷한 또래 같은데, 주변의 인정을 받고 있는 그녀가 조금은 부러웠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배워야지. 그리고 강해지는 거야.’
희망을 찾은 내 눈은 고등학생이 된 이래로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아르마이스 님.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예상치 못한 터라 어떻게 체술을 전수할지 준비가 안 된 상황인데요, 괜찮으시다면 내일 같은 시간에 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러면 내일 뵙겠습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나이트 아린은 분명 친절한 태도로 답했지만, 화면이 꺼지는 찰나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 것을 보았다.
어라?
아까도 저랬던 거 같은데?
“저기…….”
혹시 문제라도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화면은 이미 종료된 상태였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방 안은 다시 침묵으로 가득찼다.
“흠…… 뭐, 남들이 영웅이라 해도 업무가 늘어나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못하겠지.”
그녀가 탐탁치 않아하는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일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랜 대화로 목이 타서 냉수를 마셨다. 그리고 쓰고 있던 소설을 마저 집필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날 밤, 정말 오랜만에 아르마이스의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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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과의 인연이 강화됐습니다. 전생의 능력을 일부 되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