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8화 (8/122)

8. 2화 삶은 훈련의 연속이다. (4)

“사람의 발길이라고는 닿지 않을 심산유곡에…… 붉은색을 띤 카이저의 머릿결은 태양의 빛이 반사되어 심홍색 빛을 띠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가문의 비전을 수행하던 그때…… 저, 총장님 괜찮으신가요?”

[네, 듣고 있습니다. 계속하시지요.]

내 글을 읽는다는 건 생각보다 오그라드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심취하여 홀린 듯 써 내려간 글이었지만, 소리 내어 읽으니 내 눈에도 부족한 점들이 눈에 띄었고 낭독이 진행될수록 부끄러움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미르헨 총장의 눈빛이 무척 진지했기에 나는 그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낭독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낭독을 멈춰 보시지요. 아르마이스 님께 필요한 게 뭔지 대충 알 것도 같습니다.]

“네.”

3화를 막 다 읽어 내리려는 찰나에, 미르헨 총장은 낭독을 중단시켰다.

나는 그의 입에서 어떤 피드백이 나올지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르마이스 님이 쓰신 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특징은 과도한 형용어 사용과 불필요한 미사여구의 존재입니다.]

“아무래도 글에 풍부함을 가미하려면 같은 장면도 다채롭게 묘사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물론, 적절하게 쓰인 형용어는 글의 풍미를 더해 주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제한하여 피곤을 유발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상상력을 제한한다고요?”

[네, 생각해 보십시오. 심산유곡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풍경은 사람들마다 모두 다를 겁니다. 하지만, 작가가 심산유곡의 정경을 세세하게 묘사를 하게 되면 상상의 영역이 줄어드는 건 필연적이지요.]

아 그래서 예전부터 댓글에 겉멋충이라고 욕하는 독자들이 있었던 거구나.

나는 내 글에 달린 댓글들을 생각하며 미르헨 총장의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주변 풍경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상력이 발휘되려면 지나친 묘사는 지양해야지만 적절한 풍경은 구비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문답 형식으로 시작된 수업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간단한 작법서를 읽어 본 적은 있지만, 나를 위한 맞춤형 수업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집중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글 안에서 인물 사이의 전투를 묘사할 때, 독자들은 어디서 싸우는지 보단 어떤 스킬을 활용해서 합을 주고받는지에 더 주목할 겁니다. 꼭 전투 신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밥을 먹는 장면에서도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하지 집 안에서 먹느냐 야외에서 먹느냐는 부차적인 사안인 법이지요.]

“제가 그동안 포인트를 잘못 짚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원래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그런 디테일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대중성이 아닌 예술성을 강조하게 되면 전문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요. 예를 들어…….]

자신이 말하는 것마다 꼼꼼히 적는 내 모습에 신이 난 미르헨 총장은 기분이 좋은지 열변을 토해 냈고 수업은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이 더 진행된 뒤에 끝이 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궁금한 게 많다 보니 예상보다 수업이 늦게 끝났네요.”

나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 의문이 들었던 점들을 원 없이 질문했고 답답했던 체증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이가 지긋한 어른을 피곤하게 한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한 감정도 동시에 올라왔다.

[하하, 아닙니다. 저도 간만에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무척 좋았습니다. 아카데미 총장을 역임한 이후, 행정적인 업무만 보느라 학자와 스승으로서의 책무를 잊고 지냈는데, 아르마이스 님 덕분에 옛 추억이 떠올라 즐거웠습니다.]

이후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갔고 잠시 후, 화면은 종료되었다.

나는 강의 내내 열심히 적은 노트를 집어 들고 개념들을 잊지 않기 위해 복습했다.

‘이런 벌써 8시 30분이잖아? 준비하고 바로 나가야겠다.’

오랜 수업으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운동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고 천변으로 나갔다.

습도 높은 여름밤, 강도 높은 달리기를 하기에는 좋은 날씨라 할 수 없지만, 밝은 미래에 한 발짝 다가가는 기분에 힘든지도 모르겠다.

이날 밤, 난 10km 달리기를 완주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골아떨어졌다.

* * *

열심히 살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2주가 흘렀고 이틀 후면 시험기간에 돌입했다.

시험이 임박하자 김준석 패거리들도 이전보단 잠잠하게 지낸다.

성적에 목매는 학생 중에는 잘사는 집의 자제들이 여럿 섞여 있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일진 무리라도 소란을 피우는 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김준석이 스스로 공부에 열중한다는 점이었다.

‘얼굴도 잘생긴 놈이 공부까지 잘하니 눈에 뵈는 게 없겠지.’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을 하며 공부에 열중하는 김준석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국회 의원인 아버지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지원 아래 유명강사들로부터 고액 과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사람들이 개인 교습을 해주는데 공부를 못 할 리가 없지.’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그는 우리 학교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자랑했다.

“준석아, 잠깐 내려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자.”

이석호는 시험 기간이면 예민한 준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난 이것들을 마저 봐야니까 너희들끼리 다녀와.”

“으응…… 알았어.”

공부라면 질색하는 석호와 패거리들은 평소처럼 소란을 피우며 놀고 싶었지만, 극도로 예민해진 김준석 때문에 조용히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나로서는 기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 뒤에 기말시험이니까, 다들 준비 잘해라. 1학년 내신이 2학년 3학년에 비해서 비중이 적다고는 하지만, 수능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기초 공부인 만큼 소홀히 하지 않길 바란다. 이상으로 조회를 마치겠다.”

담임에게는 미안하지만, 공부는 당분간 뒷전으로 밀어 둘 생각이다.

이 세계의 조력자들을 만난 후 자신감이 붙은 나는 내친김에 우리나라 최고 명문 대학인 한국대 입학을 결심했으나, 아직은 공부할 때가 아니었다.

학교를 마친 나는 가방을 집에 가져다 놓은 뒤 천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헉, 헉.”

원래라면 수업을 마치고 밤에 달리기를 해야 했지만, 오늘은 운동 미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보상의 결과를 빨리 느끼고 싶은 마음에 일정을 앞당겼다.

‘하, 오늘은 너무 무리했다. 토할 것 같아.’

저녁에 나이트 아린과의 수업이 있었기에 10km에 달하는 거리를 1시간 만에 주파한 나는 벤치에 앉아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보상은 언제 주는 거야?

설마 거리를 잘못 계산했나? 분명 맞는데…….

처음으로 미션을 달성한 나는 흥분되는 감정을 다스리며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내 생각이라도 읽은 것일까, 미션 창이 눈앞에 떠올랐고 나는 차분히 문구를 읽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사용자가 미션을 완료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보상: 근력과 체력 + 30%>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Y/N>

당연히 받아야지.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Y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푸른 빛이 내 몸을 감쌌고 미션 창은 작업 진행률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었다.

20%…… 30%…… 50%

작업 속도는 무척 빨랐기에 30초가 채 되지 않는 시점에서 80%에 달하는 작업 진행률을 보여줬지만, 한시라도 빨리 변화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스템은 작업이 완료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보상 적용이 완료되었습니다.>

헉 이게 뭐지?

상당히 무리한 탓에 허벅지 근육부터 종아리까지 하체에 전체에 느껴졌던 근육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보상이 적용됨과 동시에 내 몸이 자동으로 회복된 것이다.

게다가 크기가 맞지 않아 헐렁했던 티셔츠가 이제는 몸에 꽉 끼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단순한 착각인 걸까?

신체의 변화를 감지한 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와, 대박이다.”

티셔츠를 탈의하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밋밋하기만 했던 내 팔에는 근육이 적당히 붙어 있었고 살면서 가져 본 적 없는 가슴 근육도 형성되어 있었다. 복부에는 식스팩까지는 아니었지만, 윤곽이 어느 정도 들어선 게 운동 경력 2주에 불과한 사람의 몸처럼 보이지 않았다.

‘불과 2주 만에 몸이 이렇게 된다고? 이게 말이 돼?’

30%라는 수치는 얼핏 봤을 때 얼마 안 될 수도 있지만,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두 팔을 들고 근육이 붙은 몸 구석구석을 살피던 그때, 미션 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미션을 계속 수행하시겠습니까?>

‘응? 끝난 미션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고? 그럼, 앞으로도 2주마다 계속 몸이 이렇게 커질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 흐흐…….’

보상이 워낙 괜찮았기에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하지만 아르마이스의 의지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첫 미션 달성 때만큼의 보상은 주어지지 않겠지만, 일반적인 운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는 월등한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긴, 2주 만에 계속 똑같은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면 2달도 안 돼서 헐크가 되고 말 거야.”

이후에도 시스템의 설명은 계속 됐고 나는 대충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알 수 있었다.

운동 미션을 연장하게 되면 이전처럼 큰 보상은 주어지지 않지만,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만큼 매일 꾸준히 하게 되면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나는 흔쾌히 미션 연장을 선택했고 다시 거울을 보며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 예고도 없이 나이트 아린이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어…… 죄송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땀으로 젖은 내 상체를 본 그녀의 볼은 빨갛게 물들었고 나는 갑자기 뜬 화면에 당황하여 급하게 아무 티셔츠나 꺼내 입었다.

“크흠…… 이제 보셔도 됩니다.”

[네, 오, 오늘은 예고했던 데로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의 모든 초식을 총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주 동안 쉬지 않고 단련한 덕분에 난 12가지 초식을 모두 익힐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평소 냉철하고 야무진 모습만 보였던 나이트 아린이 달라 보인다.

약속 시각에 맞춰 의복을 갖춰 입지 않은 내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허둥지둥대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저, 괜찮으시면 지금 바로 시연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시작하세요.]

나이트 아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고 나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아르마이스식 격기술 1형부터 12형까지 차근차근 선보였다.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은 뒤로 갈수록 동작 가지 수도 늘어나고 복잡해졌지만,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기에 체력 소모가 상당히 큰 무술이었다.

“허억, 허억…….”

30분의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시연을 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평가를 기다렸다.

[아니 어떻게…….]

응 뭐지?

나름 완벽히 했다는 생각에 칭찬까지는 아니어도 격려의 말 정도는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트 아린은 턱에 손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마다 친절히 설명해 줬던 그녀인데, 어디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라도 있는 걸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르젠 제국, 격기술 훈련 교관으로서 수많은 기사들을 수련시켰지만, 아르마이스 님 같은 재능은 본 적이 없습니다.]

“휴우,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한 채,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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