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2화 삶은 훈련의 연속이다. (5)
[분명, 초식을 암기하셨던 건 알았지만, 불과 하루 만에 이런 진전을 보인다는 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나이트 아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전 동작들을 복기했다.
갑작스러운 성장에 놀란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나 또한 동작이 이전보다 수월히 시연되고 있음을 느꼈고 속도와 기세 면에서 어제보다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보상을 받은 뒤 늘어난 체력과 근력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는 고민에 빠진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어제 하루 푹 쉬어서 그럴 겁니다. 수업을 시작한 이래로 개인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거든요.”
[어쩐지 몸이 부쩍 좋아졌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까 전에도…… 앗,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의 뜻을 표했다.
수업 전에 보았던 내 몸을 떠올렸던 게 분명하다.
나이트 아린이 무슨 생각을 한 지 짐작이 됐지만, 난 모른 척하며 태연히 대화를 이어 갔다.
“저, 그러면 초식 수련은 이것으로 마무리되는 겁니까?”
[힘과 속도가 많이 붙긴 했지만, 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약간의 자세 교정이 필요합니다. 현재 몸 상태라면 동작을 하는 데 있어서…….]
나이트 아린은 갑자기 커진 내 몸에 맞게 자세와 동작들을 교정해 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격기술 수련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짚기 시작했다.
[초식을 모두 익혔다고는 하지만, 전투 중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려면 연습을 게을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동작들이 어떤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쓰일지도 끊임없이 고민하셔야 하고요.]
“안 그래도 실제 싸움에 적용하는 부분에 대해서 틈나는 대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팁을 하나 주실 수 있습니까?”
[사실, 가장 빠른 방법은 실전을 경험해 보는 겁니다.]
“음…… 그렇군요.”
그녀가 살고 있는 카산트 대륙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결투가 허용되지 않는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나이트 아린은 말끝을 흐리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 갔다.
[격기술의 초식과 기본 동작들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투에 있어서 중요한 건 예측 능력과 동체 시력입니다.]
“예측 능력과 동체 시력이요?”
[네, 회피 동작과 방어 동작이 집중적으로 들어있는 4형과 5형의 초식을 살펴보면 상대의 킥과 펀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측 능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게 무용지물이지요.]
그녀는 말로만 설명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세를 잡고 예측하는 법을 차근차근 알려 줬다.
[적을 볼 때는 절대 눈을 봐서는 안 됩니다. 고수들은 눈 움직임으로도 상대에게 혼란을 야기할 수 있거든요. 대신 어깨와 골반의 움직임, 그리고 공격에 앞선 예비 자세를 취하느냐의 유무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충분히 익히셔야 합니다.]
“그렇군요.”
나는 가상의 적을 앞에 두고 몸을 놀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수업에 집중했다.
[다음으로 동체 시력입니다. 상대 공격을 예측할 수 있다 하더라도 눈이 따라 주지 않으면 회피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마련이지요. 따라서…….]
이후에도 그녀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며 설명에 열을 올렸고 나는 부지런히 메모하며 향후 훈련 방향에 대해 숙고했다.
[설명이 꽤 길었지만, 이 모든 걸 손쉽게 단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실전이 바로 그것이지요. 실제 상대를 앞에 두고 지금까지 학습한 개념들을 유념하며 예측 능력과 동체 시력을 키우는 게 실력을 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아,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어디서 실전을 경험할 수 있는 거지?
만화책에 나온 것처럼 복면을 쓰고 불량배들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맞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무릎을 쳤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 놀란 나이트 아린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 묘수라도 떠오르셨나요?]
“네, 이쪽 세계에 복싱이라는 격투술을 배우는 체육관이 있는데 그곳이라면 스승님이 강조하신 실전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복싱이라, 그게 뭔가요?]
카산트 대륙에 없는 생소한 단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네, 저에게 알려 주신 아르마이스식 격기술과 유사한 무술인데, 체육관에서 일종의 합의 대련 같은 게 이루어지곤 하거든요.”
나는 스파링을 떠올리며 말했다.
[잘됐군요. 그러면 앞으로 그 체육관이라는 곳에 가서 실전 감각을 익히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격기술 수업은 계속할 거지만, 아르마이스 님의 일정을 고려해서 강의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동안 수업 시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뒤이어 미르헨 총장의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었다.
‘체육관을 찾아봐야겠어.’
모든 수업을 마친 나는 컴퓨터를 켜고 집 근처에 체육관이 있는지 검색했다.
잠시 후, 포털 사이트에서 정선 체육관이라는 곳을 발견한 나는 신발을 신고 나갈 준비를 했다.
체육관은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해서 왔다 갔다 하기 편했고 선수를 육성하는 곳이라 밤 11시까지 영업을 하여 여러모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인가?’
집을 좀 벗어나면 상가들이 모여 있는 거리가 나왔는데, 체육관은 이 거리 끄트머리에 있는 오래된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갈수록 체육관 특유의 땀 냄새가 짙어졌고 샌드백을 두들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예, 복싱을 배우려고 왔는데요.”
“하하, 잘 오셨습니다. 마침 부원 모집 기간이라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관장으로 보이는 남자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백성철 관장이라고 합니다. 복싱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백성철 관장.
사정이 있어 국가대표가 되진 못했지만, 전국체전 7연패, 동양 챔피언 타이틀 등 화력한 이력을 갖고 있는 자였다.
사무실 내에 걸린 수많은 메달들과 상장들은 그가 유능한 선수였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복싱을 배우기 위한 목적이요?”
그저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방문한 나로서는 목적을 묻는 백성철 관장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까 보시면 아령을 들고 쉐도우 복싱하는 회원들 있지 않았습니까? 요즘, 체육관에 다이어트 목적으로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아, 저는 다이어트 목적이 아니라 복싱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다이어트라는 말에 나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그럼 가볍게 체험해 보시겠습니까?”
“네, 관장님.”
백성철 관장은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진지하게 배울 마음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사무실을 나와 체육관에 배치된 큰 거울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충분히 풀 것을 지시했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기본 스텝과 앞 손 잽을 배우겠습니다. 처음인 만큼 리듬에 익숙해지는 게 중요하니까 잘 보고 따라 하세요.”
“넵.”
백성철 관장은 자세를 잡고 스텝을 밟더니 왼발을 앞으로 디디며 왼손 잽을 날린 뒤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작을 보여 줬다.
“일반인들은 복싱의 잽을 굉장히 쉬운 동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잽 하나만 제대로 쳐도 복싱 경기에서 쉽게 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왼손 잽 이후에는 원투 스트레이트를 배우실 건데, 이 두 동작을 떼는 데만 1달이 걸릴 겁니다.”
복싱에 대한 진지한 열의가 없는 사람을 받고 싶지 않았던 백성철 관장은 손님들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초반 과정을 미리 알려 주었다.
이는 2년간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이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
나는 관장의 설명에 선뜻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아르마이스식 1형과 대동소이하다.
관장이 제시한 코스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르젠 제국 최고의 교관으로부터 초식 습득을 인정받은 나다.
간단한 원투 동작에 한 달이나 허비할 마음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스파링을 하려면 어떻게든 이 체육관을 다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 그가 제시한 루트를 따를 수 없던 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상념에 빠져 홀로 고민하던 그때, 백성철 관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손님께서 보시기엔 이 과정이 지루하게 보이시겠지만, 제대로 된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고급 기술을 배워 봤자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꼴이랍니다. 역동적이고 멋진 레슨을 기대하셨겠지만, 현재로서는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충분히 생각하시고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백성철 관장은 말이 없는 나를 보며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은 후, 다른 관원을 살피러 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등 뒤에서 들리는 내 목소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오호, 생각보다 근성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그런데 조건이라니요?”
“제가 비록 정식으로 배운 경험은 없지만, 복싱에 관심이 많아 평소 기본 동작들에 대한 연습은 충분히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매체가 워낙 발달 돼서 복싱 기초에 관한 동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거든요.”
“푸하하핫. 앗, 죄송합니다. 비웃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손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인터넷으로 복싱을 배웠다는 나의 말이 그가 듣기에는 글로 사랑을 배웠다는 인터넷 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백성철 관장 입장에선 황당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저도 관장님께서 웃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숙고하고 드린 말씀인 만큼, 한 번만 자세를 봐 주시고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신, 제 동작을 본 이후에도 기본 스텝과 원투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다소 억지스러운 말의 내용과 달리 사뭇 진지한 나의 태도를 확인한 백성철 관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본인이 인.터.넷에서 배웠다는 동작들을 보여 주시죠.”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푸후우우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나는 아르마이스식 격기술 1형부터 4형까지 연속해서 보여 줬다.
그러자 처음엔 작은 흥미만 보이던 그의 눈빛이 점점 경악으로 변해 갔다.
“와, 저 친구 누구야? 학생인 거 같은데 자세가 엄청 좋은데?”
“그러게, 쉐도우 복싱을 저렇게 깔끔하게 하는 친구는 처음이야. 내가 볼 땐 정욱이보다 더 잘하는 거 같은데?”
주변에 있던 관원들은 속도감 있게 펼쳐진 아르마이스식 초식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언급한 사람은 체육관 선수로 활동하는 김정욱이었는데, 그는 18살의 나이로 전국체전 은메달을 딸 정도로 엄청난 인재였다.
“저, 이만하면 기초 과정은 스킵해도 될까요?”
나는 쑥덕거리는 관원들을 뒤로하고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는 백성철 관장을 바라보며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