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0화 (10/122)

10. 3화 이제부턴 실전이야. (1)

“증명이라면 충분히 되고도 남았습니다.”

백성철 관장은 나를 초보로 여겼던 생각이 부끄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후 그는 내 시연을 보며 궁금했던 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저, 그런데 인터넷 어떤 영상으로 연습하셨습니까? 그리고 독학으로 복싱을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독학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아, 그게 딱히 특정 선수의 영상을 중점적으로 시청한 건 아니고 그냥 복싱 레슨으로 검색했을 때 나온 영상으로 연습했습니다. 기간은 정확히 세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대략 한 달 정도 된 것 같고요.”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예견하지 못했던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급조된 답변을 되는 대로 내뱉었다.

“한 달이요? 방금 한 달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호들갑을 떠는 관장님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저 정도로 깔끔한 자세를 고작 한 달 만에 터득했다고? 하아, 그렇다고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평생 복싱만 해 온 백성철 관장으로서는 나의 존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잽,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 스웨이, 위빙 등 복싱에 나오는 기술들을 완벽하게 선보인 자의 수련 기간이 한 달이라는 말에 이제까지 믿고 지내던 복싱 체계에 관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지경이었다.

“테스트는 통과한 걸로 봐도 무방하겠죠?”

나는 혼잣말을 하는 백성철 관장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크게 흔들며 긍정의 표시를 했다.

“물론입니다. 당장, 내일 아니 오늘부터 정식 수업에 들어가도록 하죠. 회비는 한 달에 8만 원이니까 편할 때 주세요.”

“지금 지갑에 돈이 있으니까 바로 드리겠습니다.”

인터넷 블로그로 회비를 미리 확인한 터라 돈은 구비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저, 아직 학생이신 것 같은데 말을 편하게 해도 될까요?”

“네, 관장님이 편하신 대로 하세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못 물었는데, 이름이 뭐니?”

“강진우라고 합니다.”

관장의 물음에 공손히 대답하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하하, 그래 진우야.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이거 간만에 인재가 들어왔어.”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앞으로 저를 어떤 방향으로 가르치실 건가요?”

제대로 된 학교생활과 웹소설 작가로서의 꿈을 원활히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김준석 패거리들과의 인연을 하루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이트 아린이 실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실전을 추천했으나 관장님의 계획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지도 방향에 대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은 모두 습득된 상태라 오늘부터 바로 미트를 잡아 줘도 되겠어. 그건 그렇고 혹시 선수로 뛸 생각은 없어? 내가 이 바닥에 오래 있으면서 선수 보는 안목이 있다고 인정받는 편인데, 만약 네가 내 밑에서 정식으로 배운다면 최소 국내 챔피언은 노려볼 수 있을 거야.”

그는 간만에 원석을 찾은 기쁨에 나를 선수부에 등록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난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복싱 입문도 안 한 상태에서 선수를 생각하는 건 조금 이른 것 같아요.”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 안 해도 돼. 일단 지역 아마추어 대회를 뛰어 보고 괜찮다 싶으면 내년 전국체전을 천천히 준비하면 학교생활에도 큰 지장은 없을 거야.”

백성철 관장은 내가 가진 재능이라면 학업을 병행하면서 복싱을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재 나한테는 선수부 등록보다 스파링 가능 여부가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한 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저, 그것보다 훈련에 대해서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응, 뭐가 궁금한데?”

“실전과 최대한 가까운 훈련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예를 들면 스파링처럼 말이죠.”

“뭐? 지금 스파링이라고 했어?”

아무리 출중한 기본기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복싱 경력이 전무한 손님이 스파링을 요청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네, 다른 훈련들도 저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스파링을 하는 게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네가 실력이 좀 있다는 건 알지만, 스파링만큼은 안 돼. 스파링은 주로 선수부나 일반부 중 경력이 최소 6개월 이상 된 사람만 허락이 돼 있단 말이다.”

“체육관 규칙인가 보군요?”

“그래.”

“흠, 그럼 체육관 다니는 것을 고려해봐야겠네요.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준수되어 온 룰을 깨면서까지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드린 뒤 체육관을 나오려 했다. 그러자 백성철 관장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은근히 타일렀다.

“가는 건 자유지만, 스파링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실전 감각을 키우는 방향으로 레슨을 받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과정을 스킵하고 바로 실전에 들어가려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미트를 치는 훈련만으로도 실전 감각을 충분히 키울 수 있어. 만약, 네가 미트 치기 훈련을 훌륭히 소화한다면 이례적이긴 하지만, 스파링을 허락하도록 하겠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종합격투기 붐이 일어나고 있었고 복싱을 하려는 사람의 수는 점점 주는 추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인재를 놓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관장은 나를 설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알겠습니다, 미트 훈련은 언제부터 할까요?”

미트 치기만으로 실전 감각을 키울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관장님의 눈빛에서 진실됨이 느껴졌기에 믿어 보기로 했다. 게다가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을 어느 정도 익힌 상황이라 미트 훈련 테스트를 빠르게 통과할 자신도 있었다.

“응? 이렇게 쉽게 마음을 바꾼다고?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강하게 나가 볼 걸 그랬네. 일단, 오늘은 훈련 예약이 모두 잡혀 있어서 어려우니까 내일부터 시작하자. 특별히 너는 내가 직접 코치할 테니까, 각오하고 오도록.”

백성철 관장은 선선히 제안을 응하는 나의 모습에 김빠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내일 보자.”

대화를 마친 나는 꾸벅 인사를 한 뒤,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내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 몇몇 관원들은 백성철 관장 주변으로 모여 한마디씩 했다.

“이번에 물건이 온 것 같은데요?”

“속도와 힘이 더 붙어야겠지만, 기본자세만큼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깔끔하더라고요.”

“하하, 역시 내가 제대로 본 게 틀림없어. 하긴, 원래 천재라는 게 아무리 숨기려 해도 눈에 안 띌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의 첨언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나를 두고 마냥 좋은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 새끼 누구야?”

“어, 너 오기 전에 체육관에 와서 관장님한테 테스트를 받은 모양이야. 아까 너도 봤어야 돼. 스파링이나 시합을 뛰어 봐야 실력을 알겠지만, 자세만큼은 메이웨더, 파퀴아오 못지않았다니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둘은 화제의 중심에 선 나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정욱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봤자 복싱에 막 입문한 풋내기야. 전국체전 금메달을 노리는 네 상대는 아니라고.”

“그놈을 신경 쓰는 게 아니야. 관장도 그렇고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게 거슬려서 그렇지.”

체육관 최고 기대주인 김정욱은 자신에게 쏟아져야 하는 관심을 뺏어 간 불청객이 적지 않게 거슬렸다. 그는 중3 때 관장의 눈에 띄어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고 1년 만에 전국체전 은메달을 딸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백성철 관장이 김정욱을 발견했을 당시, 3년만 배우면 바로 프로에서 통할 인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체육관에 가끔씩 방문하는 복싱계 인사들에게 자신의 제자를 자랑하기에 바빴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리고 뭐? 미트를 직접 잡아 주겠다고? 씨발, 이제까지 열심히 한 사람들을 뭘로 보는 거야. 이게 다 그 버러지 같은 새끼 때문이야.’

김정욱은 껄껄 웃으며 팔불출처럼 구는 관장보다 갑자기 튀어나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더 거슬렸다.

‘스파링을 원한다고 했지? 기회가 오면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나와 관장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던 그는 주먹을 부서질 듯 쥐면서 이를 갈았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학교를 마친 나는 평소처럼 격기술과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관장과 약속한 시간이 되자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성철 관장이 화색을 띠고 나를 반겼다.

“오, 겁먹어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제시간에 왔네?”

“관장님께서 직접 미트를 잡아 주신다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좋아, 장비 갖추고 바로 올 테니까 스트레칭 좀 하고 있어.”

“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거울 앞에서 몸을 풀었다.

잠시 후, 양손에 미트를 낀 관장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원래라면 샌드백을 치면서 감각을 먼저 익힌 뒤 미트를 치는데, 약속은 약속이니까 바로 시작하자.”

“감사합니다, 관장님.”

“훗, 감사는 무슨. 각설하고 기본 원투부터 점점 난이도를 높일 계획이니 잘 따라와라. 자, 먼저 가볍게 잽 먼저 날려 보자. 하나!”

이야기를 마친 그는 왼손 미트를 들어 자세를 잡았고 나는 지체 없이 잽을 꽂았다.

팡!

시원한 타격음이 체육관을 울린다.

이후에도 난 손짓에 맞춰 30초가량 잽을 날렸다.

관장은 이런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그래, 어쩐지 말이 안 된다 싶더라니…….”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들은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풋, 이 녀석 연기가 일품일세? 샌드백 한 번 쳐 본 적 없다는 놈이, 끊어치기를 어떻게 이렇게 잘할 수 있냐? 자세야 백번 양보해서 혼자 익혔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정확한 타격을 하려면 어느 정도 경험이 쌓여야 한다고.”

“집에 아버지가 달아 놓은 샌드백이 있어서 치면서 연습했습니다.”

“이 자식, 갑자기 지어낸 말 아니야?”

“어제 관장님이 자세히 묻지 않으셨잖아요. 어쨌든 전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백성철 관장의 집요한 추궁에도 난 능청을 떨며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물론 집에 샌드백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끊어치기가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나이트 아린 덕분이었다.

그녀는 초식을 행함에 있어 가상의 상대를 상상하며 진지하게 임할 것을 요구했고 자세가 약간만 삐뚤어져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지적을 당하며 배운 게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나는 나이트 아린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지난 2주가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체감하고 있던 그때, 백성철 관장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쳇, 능구렁이 같은 녀석. 알겠으니까 바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자.”

그는 제자의 해명이 석연치 않았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이후로는 원투 훅, 잽 잽 스트레이트 등. 복싱에서 사용되는 기본 연계를 쉬지 않고 시켰지만,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시를 소화할 수 있었다.

“거참, 보면 볼수록 물건이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향한 관장님의 애정은 점점 커졌고 훈련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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