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3화 이제부턴 실전이야. (2)
나이트 아린의 섬세한 지도 덕분에 아직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훈련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관장이 날 인정하고 스파링을 허락해야 하는데, 왜 별말이 없는 걸까?
백성철 관장님은 내가 20분간 진행된 미트 치기를 훌륭히 소화했음에도 어떤 피드백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그는 초조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했어. 혹시 방심하고 있다면 긴장하는 편이 좋을 거야. 지금부터는 나도 공격에 들어갈 거니까 네가 알고 있는 기술들을 전부 꺼내서 피해 봐.”
복싱에는 위빙, 더킹, 스웨이처럼 펀치를 피할 수 있는 회피 기술들이 존재했다.
손쉽게 훈련을 수행하는 모습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다는 확신이 든 관장님은 방어 연습도 겸할 수 있게 합을 짜기 시작했다.
“기억해, 원투 스트레이트 이후에 훅 피하고 어퍼컷이야.”
“네.”
“대답 하나는 청산유수네. 아까 실전 감각을 익히고 싶다고 했지? 미트 치기가 스파링에 비하면 효과가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 지금 하는 훈련들도 충분히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자, 그럼 시작해!”
벼락같은 그의 외침과 동시에 난 원투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퍽!
“윽…….”
“짜식, 알려 줬는데도 못 피하면 어떡하냐?”
관장님께서 훅을 날릴 거라고 예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두들겨 맞았다.
분명, 미트가 오는 것을 보고 숙였는데, 왜 맞은 걸까?
머리에 느껴지는 통증이 조금 가시자 난 소심하게 변명했다.
“아까 시범으로 보여 줬던 속도랑 너무 다르잖아요…….”
“참네, 어떻게 공격할지 미리 알려 줬는데도 못 피했으면서 황당한 소리를 하네?”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 그, 그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순간의 자존심 때문에 쓸데없는 소리를 한 나는 부끄러움 탓에 얼굴이 빨개졌다.
“진우야, 내가 말했잖아. 네가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지만 경험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고. 그렇다고 너무 기죽지 마라.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훈련을 계속 이어서 해 볼까?”
조금 전 실패를 털고 다시 자세를 취하자 백성철 관장은 두 손을 들고 훈련을 재개했다.
이후, 미트 치기 훈련은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난 진도를 얼마 빼지 못했고 의기소침한 상태가 되었다.
“이제 복싱이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알겠지?”
“후, 제가 그동안 자만에 빠져 있던 거 같아요.”
“하하, 나도 입문 초기에는 너랑 비슷했어. 그리고 이 운동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라고. 보아하니 스파링은 당분간 어렵겠어.”
그는 한숨을 쉬며 낙담하고 있는 제자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스파링을 하기에는 갈 길이 멀겠죠?”
“당연하지 녀석아! 오늘은 간단히 기초만 뗀 거니까 마음 가라앉히고 찬 물로 샤워라도 해라.”
“네, 관장님.”
그의 말이 옳았다.
다른 차원에 사는 자들의 도움과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복싱을 단시간에 익히는 것은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상보다 훈련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서 초조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계획이 살짝 어그러졌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일단, 샤워를 하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관장님, 저 학생 배우는 속도가 일반 관원들에 비해서 훨씬 빠른데요?”
백성철 관장과 함께 관원들을 관리하는 박재엽 코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후, 그러게 말이다. 스파링을 바로 허락하면 자존심이 상할 관원들이 있을까 봐 미트 치기를 제안한 건데 습득 능력을 봤을 때 2주 안에 모든 코스를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전에 미트를 휘두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많이 놀랐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강도를 높이시면 큰일 날 수도 있다고요.”
박재엽 코치는 새로 들어온 관원이 행여나 다칠까 싶어, 당부의 말을 꺼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만약 내가 초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살살 했으면 순식간에 훈련이 끝날 수도 있었어.”
“그 정도였어요?”
“그래, 네가 나중에 미트를 잡아 보면 내 말이 뭔지 알게 될 거다. 아직 지역 대회 수준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아주 대단한 놈이야. 잘만 키우면 국내 챔피언을 넘어서 세계로 나갈 수도 있겠어.”
백성철 관장은 나를 제대로 키워 보고 싶은 심산이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알 턱이 없던 나는 짐을 챙기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미트 치기도 훌륭한 훈련이지만, 어떻게든 실전 경험을 쌓아야 할 텐데……. 후,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다른 체육관에 가서 복싱 경력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파링을 하면 어떨까 잠시 생각을 해 보았지만, 정선 체육관과 인연을 맺은 상황에서 다른 체육관을 기웃거리는 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방법을 궁리하며 집으로 걸어가던 그때, 미션 창이 켜지더니 화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목표치를 설정합니다.>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길거리 복싱 아르바이트를 실시합니다. 채워야 할 인원수- 100명>
<보상: 민첩력 +30%, 동체 시력 +30%>
갑자기 뜬 미션 창을 살펴보던 나는 길거리 복싱 아르바이트라 적힌 문구에 호기심이 생겼다.
길거리 복싱 알바라면 설마, 헤드기어랑 호구를 차고 일반인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말하는 건가?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오락실에 가기 위해 대학가에 자주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오락실을 가는 길목에는 호구를 차고 사람들의 펀치를 피하던 아저씨가 계셨는데, 당시 몸놀림을 생각해 보면 복싱을 수련한 분임이 틀림없었다.
미션의 의미를 알게 된 나는 수행을 위한 방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100명이라는 숫자가 얼핏 보면 많은 것 같지만,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할당량을 채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거야. 내일 당장 체육용품점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구비해야겠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며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그날, 난 부모님께 공부를 핑계로 늦게 귀가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드린 후 잠자리에 들었다.
* * *
3일이 지났다.
학생들은 기말시험을 맞아 책을 보며 공부하기에 바빴지만, 나는 미션을 수행하고 수련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우선 알바를 위하여 체육용품점에서 호구와 글러브 등을 구입했고, 옛날에 친구들과 할로윈을 보낼 때 썼던 흰 가면을 따로 챙겨 두었다.
다음으로 나이트 아린과의 수업을 한동안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처리해야 할 미션들이 산적했을 뿐만 아니라, 글쓰기 수업과 체육관에서 훈련을 병행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수업은 분명 체육관 훈련보다 여러모로 유용한 측면이 있었지만, 스파링을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가방에 뭘 그렇게 가득 넣고 다니는 거냐?”
“아, 최근에 개인 글러브를 샀거든요. 복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거 하나쯤은 다 있잖아요?”
여느 때처럼 체육관에서 미트 치기를 마친 나는 관장의 물음에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녀석…… 이런 식으로 날 감동시키다니.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줄 게 있다.”
좀 있다 알바하는 것을 말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한 건데, 저렇게 좋아하시니 조금 민망했다.
복싱을 사랑?하는 내 열정에 감동한 백성철 관장은 사무실에 들어가더니 손에 감는 붕대를 잔뜩 가지고 나왔다.
“맨날 똑같은 붕대를 쓰면 냄새도 나고 손에 상처라도 있으면 감염될 수도 있어. 내 특별히 너한테만 주는 거니까 아껴서 써라.”
“감사합니다, 관장님.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연기했다. 그러자 관장은 어깨를 두드리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오늘도 수고 많았다. 내일 보자.”
“네, 관장님. 안녕히 계세요!”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미리 생각해 둔 지점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아파트에서 조금 나와 골목으로 들어가면 술집이 모여 있는 거리가 있다.
근처에 파출소가 있긴 하지만, 노점상에 대한 단속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인근 사장님들의 텃세도 적은 편이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많이 오가는 길 한복판에 도착한 나는 짐을 전봇대에 세워 놓은 뒤, 호구와 헤드기어 등 준비한 것들을 꺼냈다.
“오빠 저것 좀 봐 바. 2분 동안 원 없이 때리는데, 만 원밖에 안 하네?”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성 하나가 남자친구의 팔을 끌어안고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 좀 풀게?”
“아, 몰라. 됐고 가서 바로 신청한다.”
남자친구의 장난에 여자는 삐진 척을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만원 만 내면 되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애당초 미션을 위해 시작한 알바였지만, 기왕이면 훈련에 도움이 되는 손님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하드보드지에 분명, 돈만 내면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썼기에 거절할 명분이 없던 나는 호구와 헤드기어를 차고 글러브를 여자에게 건넸다.
“얼굴을 쳐도 되는 거죠?”
“어디든 가격하셔도 됩니다.”
“잘됐네요. 그럼 시작할게요.”
여자는 흰 가면 뒤편에 내가 아니라 직장 상사의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목소리에서는 꼭 때리고 말겠다는 강력한 전의가 느껴졌다.
“에잇, 얍얍!!”
외마디 탄성과 함께 그녀는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엉성하기 그지없는 공격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시간이 흐를수록 제풀에 지쳐 갔다.
“허억, 왜 이렇게 안 맞지. 아, 짜증 나!”
종료까지 30초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가 내지른 주먹은 한 대도 적중되지 않았다.
나는 여자의 표정을 잠시 살펴보다가 몇 대 맞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대로 끝난다면 진상을 부릴 것 같은 묘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자, 난 짐짓 놀란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가까이 붙었다.
퍽퍽퍽
흥분한 여자는 분풀이를 위해 닥치는 대로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격이 가드나 호구 위로 들어왔기에 내 몸에는 어떤 타격도 없었다.
“엇!”
손님에게 시간 종료를 알리려고 하던 그때, 그녀의 날카로운 하이힐이 내 쪼인트로 날라왔다.
예상치 못한 킥이었지만, 속도가 느려 간신히 피할 수 있었고 나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저, 손님. 시간이 다 됐습니다. 만약 연장을 하고 싶으면 돈을 더 지불하셔야 됩니다.”
“헉, 헉. 아이 씨 진짜. 오빠! 이번엔 오빠가 해 봐.”
“으응? 갑자기?”
“예전에 나한테 킥복싱 배웠다고 자랑했잖아.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싶으니까 한번 보여 줘 바.”
약이 잔뜩 오른 여자는 옆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가서 해보라며 강요했다.
“내가 이런 걸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저분께서 발차기는 허락하지 않을 거야.”
“쳇, 그런 게 어딨어.”
“킥이 허용되면, 당장이라도 묵사발을 낼 수 있지. 하지만 룰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남자는 실제로 킥복싱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곳에서 실력을 뽐내는 게 유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 친구 앞이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허세를 부렸다.
나는 두 남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복싱 룰대로 해야 하는데, 여자 친구분께서 애타 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네요. 원하시면 킥을 쓰셔도 되니까 하고 싶으면 하세요.”
“네?”
여자 친구를 대충 달래고 술집에 들어가려고 하던 남자는 뜻밖의 이야기에 순간 당황했다.
나는 남자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리며 글러브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익숙한 화면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응? 설마?’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미션이 발생한 지 3일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또 미션을 준다고?
복싱 레슨, 미션, 글쓰기 수업 등 가뜩이나 스케줄이 빡빡한 상황에서 미션 화면이 뜨자 뒤이어 들어오는 문구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