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3화 이제부턴 실전이야. (3)
“그러다가 다칠 수도 있어요. 돈 벌기 위해서 애쓰시는 건 알겠지만, 손님도 상대를 봐 가면서 받아야 하는 거예요.”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
“권투가 길거리 싸움에서는 제법 통할지는 몰라도 입식 겨루기에서는 킥복싱에 안 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자기야, 저분은 왜 말이 없을까?”
“풋, 막상 하려니까 쫄리나 보지.”
커플들은 한참 이야기를 쏟아 내며 도발을 멈추지 않았지만, 추가 미션에 멘붕이 온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떡하지, 방학이면 추가로 더 받아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는데…….
응? 이게 뭐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린 난 미션 창에 뜬 문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돌발 미션이 발생하였습니다.>
<목표와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남자의 공격으로부터 2분간 버티십시오.>
<보상: 민첩성과 동체 시력 +5%>
이거라면 문제없다.
당장 눈앞의 남자를 처리하면 끝나는 미션 아닌가?
보니까 킥복싱을 제법 구사할 줄 아나 보다. 하지만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이 있기 때문에 걱정되지 않는다.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은 복싱과 유사하긴 하나 모든 종류의 대인 전투에 적용할 수 있도록 창안됐기에 상대가 킥복싱을 하든, 종합격투기를 하든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봐,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무시할 거야?”
처음엔 달래듯이 말하던 남자는 침묵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실례했습니다.”
반말을 들은 난 조금 짜증이 났지만,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자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할 마음은 있는 거야?”
“네, 손님께서 원하는 건 뭐든 하셔도 좋습니다.”
“이 자식이, 좋아 그럼 바로 준비하지.”
“자기야, 파이팅! 꼭 이겨야 돼!”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내고 올게.”
여자 친구의 성원에 힘을 얻은 남자는 글러브를 끼며 허세를 부렸다.
이런 커플의 모습에 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호구와 헤드기어를 장착했다.
“시간은 2분이지만, 힘드시면 바로 말하세요. 일반인을 상대로 킥복싱을 하는 건 양심에 찔리는 행동이니까요.”
“이런저런 거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신 대로 하세요.”
나를 위해주는 척했지만, 남자는 여자 친구 앞에서 힘을 뽐내기 위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양손을 든 채 자세를 잡은 남자는 있는 가볍게 로우 킥을 찼다. 그러나 허리와 골반의 움직임을 통해 킥이 올 것을 예상한 나는 백 스텝을 밟으며 사뿐히 피했다.
“오호, 마냥 일반인은 아닌가 보네요.”
“…….”
나는 상대의 도발에 대꾸하기보다는 다음 움직임에 대비하는 데 집중했다.
남자는 서서히 나에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클린치를 잡았다.
두 눈으로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공격권이 없는 나로서는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상대를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양 주먹 외에도 다리를 사용할 수 있어서 복부로 쏟아지는 니킥을 막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처음에는 가드로 니킥을 막으려 했지만, 수련을 통해 단련된 무릎을 양팔로 막기에는 무리였다.
“윽…….”
두꺼운 호구에 의지하여 충격을 버티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결국 상황을 빠져나오고 싶어서 왼쪽 팔로 남자를 밀었고 간신히 클린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 어? 팔 쓰는 건 반칙 아니에요?”
“혜선아, 좀 봐줘라. 붙잡힌 상태에서 팔도 못 쓰게 하면 이 사람 병신이 될 수도 있어.”
“했던 말이랑 다르니까 그러지. 그것보다 내 남친 너무 멋지다.”
털이 쭈뼛 설 정도의 닭살 돋는 대화에 구역질 날 것 같았지만, 눈앞의 상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웃을 여유는 없었다.
‘공간을 조금 넓게 쓰자.’
미션 수행의 목적을 갖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적당히 맞아 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프로 선수에 버금가는 킥복싱 앞에서는 더 이상의 요행은 불가능했고 난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한 대도 맞지 않기로 결심했다.
“죄송합니다, 아까는 부득이하게 팔을 써서 밀어냈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괜찮대도 그러네. 것보다 아직 1분이나 남았는데 계속하실 거예요?”
“물론입니다.”
나는 남자의 비아냥은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기 없깁니다.”
그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아까처럼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 왔다. 하지만, 더 이상 상대의 장단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공격할 틈을 아예 주지 않았다.
“아이 씨, 그렇게 도망만 다닐 겁니까?”
남자는 남은 1분 간 부지런히 나를 쫓아왔지만, 그때마다 난 빠른 스텝으로 멀찍이 거리를 넓혔고 결국 초반에 니킥을 허용한 거 외에는 한 대도 맞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쳇, 가자. 혜선아.”
“그래도 아까 무릎으로 한 방 먹여 줬을 때 통쾌했어. 가자 오늘은 내가 쏠게.”
커플들은 끝까지 비매너로 일관했고 난 쓴웃음을 지으며 사라져 가는 그들을 바라봤다.
<돌발 미션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민첩성과 동체 시력 5% 향상됩니다. 보상을 바로 받으시겠습니까?>
얼마 있지 않아 미션 완료를 알리는 창이 떴고 난 지체 없이 Y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푸른 빛이 내 몸을 감쌌고 이전처럼 작업 진행률이 표시되었다.
30%…… 80%…… 100%
이전보다 보상이 작았던 탓일까,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잠시 후, 적용이 완료되었다.
‘왠지 모르게 몸이 가벼워진 기분인데? 지금이라면 어떤 공격도 피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체력과 근력 보상 때처럼 육안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모래주머니를 찼다가 뺀 것 같은 상쾌함이 온몸에 감돌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스텝을 뛰며 변화를 점검하던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까지 해서 세 명이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손님. 가격은 다 해서 3만 원이고 시간은 적힌 대로 2분씩 진행될 겁니다.”
조금 전의 공방 이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부쩍 늘어났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을 중심으로 인파가 형성됐다.
“헉, 헉. 그래도 내가 너보다 한 대는 더 때렸다.”
“참네, 계속 허우적대기만 했으면서 자랑은.”
손님들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쉬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리 체계 없는 공격이라지만, 개 중 몇 방은 적중되기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긴 시간 온몸으로 공격들을 받아 냈음에도 별 타격이 없는 상태였다. 이는 동체 시력과 민첩성이 증가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나이트 아린으로부터 배운 회피술이 점점 체화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큰 것들은 피하고 잔 주먹들 위주로 맞아 주니까 별로 힘들지 않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정리하고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다.’
정신없이 손님을 받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1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짐들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글러브와 헤드기어 등 장비들을 집어넣고 가면을 막 벗으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일찍 오자고 했잖아. 보니까 끝났네.”
“아, 기다려 봐. 내가 이야기해 볼게. 저기요. 마지막으로 우리까지만 받아 주시면 안 돼요?”
“…….”
등을 돌려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난 순간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박준태, 박준용.
쌍둥이 형제인 이들은 우리 학교 일진 무리의 일원으로 김준석을 대신해서 소설을 받으러 종종 오는 놈들이었다.
김준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예사고 애들 앞에서 뒤통수를 때리거나 조롱함으로써 힘자랑을 하는 악랄한 녀석들이었다.
그동안 여러 훈련을 소화하면서 심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긴장한 탓에 몸이 조금씩 떨려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면을 쓴 상태라 나라는 사실을 저들이 모른다는 점이었다.
“저기요, 다 끝났냐고요.”
“그게, 시간이 좀 늦어서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지난 2주 동안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나름 자신감이 생겼다고 자부했지만, 한 번 각인된 두려움은 쉽사리 떨치기 어려웠다.
“우리 둘 해 봤자 4분인데, 시간 좀 내 주세요. 가격을 두 배로 쳐 줄 테니까 제발요.”
“야, 그냥 가자. 우리랑 하기 싫은 모양이야. 딱 보니까 쫄았네.”
콰득.
나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해 보자.
쌍둥이 형제는 패거리들 사이에서 김준석, 이석호 다음으로 강한 놈들이었지만, 어차피 내 목표의 끝은 김준석이었기 때문에 피하지 않기로 했다.
“저, 원래라면 퇴근 시간이라 안 되지만, 열정들이 대단하신 것 같으니 제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훗, 내가 뭐랬어.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했잖아?”
박준태는 동생 박준용을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으니까 빨리 준비해 주세요. 좀 있다가 약속이 있어서 얼른 가 봐야 하거든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장비들을 먼저 꺼내겠습니다.”
박준용은 인정하기 싫었는지 형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나를 재촉했다.
잠시 후, 호구와 헤드기어를 착용한 나는 글러브를 준용에게 건네며 말했다.
“글러브 끼시면 바로 시작할게요.”
“알겠어요.”
이상하다.
아까 전만 해도 몸이 굳어 있었는데, 신기하리만치 마음이 편하다.
180에 달하는 키와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가 글러브를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전혀 긴장이 되지 않았다.
‘펀치력 외에는 경계할 게 없는 놈이야. 평소대로만 하면 큰 문제는 없겠어.’
박준용은 시작하기에 앞서 주먹을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허공을 가를 때 나는 소리와 펀치 끝에서 느껴지는 임팩트를 봤을 때, 파워는 제법 있는 듯 보였지만 처음 상대했던 킥복싱 선수와는 비교 안 될 정도로 자세가 엉성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상대를 분석하며 대응책을 고민하던 그때, 박준용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훅을 날렸다.
“야, 야. 집중 좀 해. 그게 뭐냐?”
30초의 시간이 지났지만, 동생이 변변한 공격하나 적중시키지 못하자 박준태는 한심하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씨발, 기다려 봐.”
약이 바짝 오른 박준용은 있는 대로 펀치를 휘둘렀지만, 나는 관장님으로부터 배운 더킹, 위빙, 스웨이 등의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한 수 위의 기량을 선보였다.
“아예 상대가 안 되네? 하도 껄렁거리길래 좀 하는 줄 알았더니 별 볼 일 없는 놈이잖아?”
“딱 보면 몰라? 자기 힘만 믿고 나댄 거잖아. 학생들 같은데, 공부나 하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유난을 떠는지 참…….”
나와 형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행인들 중 몇몇은 저들의 예의 없는 행동을 안 좋게 보고 있었다.
‘이런 젠장. 사람들이 우릴 완전 X밥으로 보고 있잖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박준태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고 화가 치밀었는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쪽팔리니까 그만하고 나와 새끼야!”
“헉, 헉…… 너라고 다를 줄 아냐? 방심하지 마. 보통 놈이 아니라고.”
시간이 끝나자 박준용은 헉헉대며 글러브를 형에게 건넸다.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박준태는 신경질적으로 글러브를 낀 뒤,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기세 좋게 나왔지만, 박준용 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이 씨 진짜.”
그는 동생의 추태를 만회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공격했지만,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을 장착한 내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 제대로 좀 해 보라고.”
“조용히 하고 기다려!”
이제는 박준용이 형한테 똑바로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형제들을 조롱하기에 바빴다.
“저 자식들 저렇게 할 거면서 뭘 믿고 큰소리쳤던 거야?”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하잖아. 이번에 임자를 만난 거지.”
‘이 씨발, 진짜 죽여 버린다.’
사람들의 조롱이 점점 심해지자 박준태는 점점 이성을 잃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