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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3화 (13/122)

13. 3화 이제부턴 실전이야. (4)

분노에 지배된 박준태는 숨을 잠시 고르더니, 보호구를 붙잡았다.

단순 클리치라 생각하고 손을 뻗어 밀어내려 하던 그때, 발목 쪽으로 그의 킥이 거세게 들어왔다.

“윽.”

“헉, 헉 씨발…….”

갑작스러운 공격에 순간 당황했지만, 발을 들어 간신히 피해낸 나는 상대를 차갑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킥 공격은 금지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룰은 지켜야지요.”

“룰 같은 건 개나 주라 해.”

규칙을 준수할 것을 주지시켜 줬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차기를 해 댔다.

“우우, 그만둬라.”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아주 비겁한 새끼였잖아? 정정당당하게 해라!”

‘재밌게 돌아가고 있네?’

주위를 둘러보니 인파가 다시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여론이 쌍둥이 형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런 분위기라면 조금은 대응해도 나쁘지 않겠어.

형편없는 공격을 피하느라 내심 지루했던 참이었다. 난 이번 기회에 그동안 학교에서 괴롭힘당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말하는 동안 시간이 다 됐네요. 글러브 벗고 가 주세요.”

“됐고, 다시 붙어 새끼야!”

흥분한 박준태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호구를 벗고 등을 돌리려 하자 빈틈을 포착했다고 판단한 그는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던 나는 프론트 킥을 간단히 피한 다음, 상대의 양어깨를 잡고 발목을 걷어 올렸다.

쿵!

“끄으윽…….”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 박준태는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뼈아팠던 건 조금 전 자신이 시도했던 기술에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창피한 마음에 회복이 됐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마 병원에 가진 않아도 될 겁니다. 일행분, 잘 모시고 집에 들어가세요.”

“이 자식이!”

형이 쓰러졌음에도 부축하기는커녕 심드렁한 투로 집이나 가라는 이야기에 박준용은 눈깔이 뒤집혔다. 그는 내 얼굴을 향해 왼손 스트레이트를 있는 힘껏 뻗었지만, 더킹으로 가볍게 피한 나는 아까처럼 상대의 발목을 있는 힘껏 가격했다.

쿵!

박준용은 강한 일격에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준용아 괜찮아? 잠깐만 기다려, 내가 제대로만 하면 저놈은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할 거냐?”

“…….”

짐을 챙겨 집에 돌아가려던 나는 계속되는 도발에 부아가 치밀었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더 이상 적당히 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묻어났고 박준태는 곧바로 전의를 상실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 그니까 뭐 하러 깝쳐 가지곤.”

“그러게, 실력은 없는 것들이 성질만 더럽네.”

상황이 정리되자 관중들은 형제들을 향해 야유하기 시작했고 쌍둥이들은 도망치듯이 자리를 떴다.

‘첫 승리인가?’

다른 차원의 존재를 만난 후, 훈련의 연속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다.

고교 생활 내내 나에게 스트레스를 줬던 놈들인 만큼 긴장됐던 순간도 있었지만, 막상 붙어 보니 싱겁게 끝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씻고 들어가서 자라.”

집에 도착한 나는 부모님께 인사를 한 뒤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방에 있던 여동생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거실로 나왔다가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오빠 표정 봤어요?”

“아니, 왜?”

“최근에 힘이 없어 보여서 걱정했었거든요. 그런데 방금 보니까 기분 좋은 일이 있는 사람마냥 얼굴이 환하더라고요.”

“네 말 듣고 보니 그러네. 안 그래도 말수도 줄고 축 처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무슨 일인지 한번 물어볼까요? 오빠 성격상 먼저 말할 리가 없잖아요.”

“됐어. 때가 되면 자기 입으로 말하겠지. 시간 늦었다. 이제 들어가서 자.”

“치잇, 네.”

엄마는 알아서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에게 굳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여동생은 입술을 한 번 쭉 내밀더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강지연, 하나뿐인 내 동생의 이름이다.

평범한 외모에 존재감 없는 나와 달리 지연은 길 가는 남자들을 뒤돌게 할 정도로 예뻤고 누구한테 배우지 않았음에도 노래와 춤에 능해 재능까지 겸비한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인 동생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일찌감치 대형 연예기획사에 스카웃되었고 학교가 끝나면 매일 회사에 출근하여 연습에 몰두했다.

“오빠 요즘 좋은 일 있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동생이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지연아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지. 좋은 일이 뭐 있겠어, 매일 똑같은 하루지 뭐.”

“다른 사람은 속일 수도 있어도 나한텐 어림없어. 최근 봤던 오빠 모습 중에 오늘이 가장 얼굴이 밝은데?”

예전부터 그랬다. 우리 남매는 무심한 듯해도 결정적일 때는 서로를 위하면서 살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졌지만, 가족에게 티를 내지 않기 밝은 척하며 살았다.

그러나 동생은 변한 내 모습을 이전부터 알아챘던 모양이다.

“꼴에 오빠라고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오빠는 모르겠지만, 난 항상 신경 썼거든? 피곤해 보이니까 빨리 자. 난 간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 뒤 문을 닫아 주었다.

남매간에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낼 때가 적지 않았다. 비록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느라 만나는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지연이에게 든든한 오빠가 돼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열심히 살다 보면 지연이도 나에게 기댈 수 있는 순간이 올 거야.’

연속된 훈련과 아르바이트로 인해 지쳐 있던 난 멋진 미래를 설계하다가 자연스레 잠이 들었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새 금요일이 되었다.

아르바이트 중 얻은 작은 승리는 나에게 많은 변화를 안겨 줬다.

훈련을 시작한 이후에도 학교에 갈 때면 왠지 모를 압박감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였지만, 박준태, 박준용 형제를 제압한 뒤에는 김준석 패거리를 보아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판 붙고 싶다는 전의가 타오르고 있달까?

“하, 드디어 끝났다.”

“난 이번에 완전히 망했어. 이번에 시험 잘 보면 엄마가 노트북 사 준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아.”

길었던 기말시험이 마무리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몇몇은 성적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며 울상을 지었다.

‘노트북을 놓치다니, 참 안타깝네. 물론 나도 시험을 망친 것은 매한가지지만 말이야.’

글쓰기 수업과 훈련을 병행했던 나는 제대로 시험 준비를 못 했고 결과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성장을 확인하고 유의미한 시간을 보낸 덕분에 아쉽거나 슬픈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휴, 이제야 살 거 같네. 다음 주부터는 강진우 새끼 글도 읽으면서 재밌게 놀아야겠어.”

김준석이 예민한 탓에 교실에서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석호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역겨운 그의 눈빛을 외면하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선택의 시간이 오고 있다. 월요일이면 이제껏 유지되었던 평온한 학교생활은 끝이 날 것이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김준석 패거리와 정면으로 붙을지 말이다.

거대한 덩치와 유도 실력을 자랑하는 이석호와 우두머리인 김준석이 조금 부담되긴 했지만,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내친김에 오늘 붙어 볼까?

머릿속에 나름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며 일진 무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던 그때, 교실 뒤편에서 날카로운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호들갑 떨지 말고 다들 조용히 해.”

“야, 시험도 끝나서 같이 놀자는 건데, 왜 이렇게 신경질이야?”

이석호는 친구들에게 학교 끝나고 옆 학교 여자애들을 보러 가자며 분위기를 띄웠고 패거리들은 금세 호응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시험을 못 본 탓에 예민했던 김준석은 괜히 아이들에게 짜증을 냈고 이석호는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깝치지 말고 닥치고 있으라고 새끼야.”

“하아, 준석아. 그동안 네 눈치 보느라 다들 얌전히 지냈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들떠 있던 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고 나는 이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준석이 리더라곤 하지만, 이석호도 만만치 않은 놈이야. 만약 여기서 싸우게 되면 누가 이길까?’

이석호는 180을 훌쩍 넘는 키와 중학 시절까지 유도 선수를 한 경력 때문에 타 학교 일진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몇 달 전, 난 통학로 부근에서 삥을 뜯던 불량배들을 본 적이 있었다. 성문고등학교는 명문 사립고로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잘 사는 학생들이 많아 근방 양아치들의 좋은 타깃이었다.

그러던 그때, 이석호는 겁도 없이 자신에게 다가온 불량배 하나를 마주하게 되었고 돈을 달라는 요구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메쳐 버렸다. 이후,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간단히 처리하던 그였다.

이렇듯, 출중한 싸움 실력을 자랑하는 이석호였지만 김준석에게만큼은 기를 펴지 못했고 난 그 점을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속사정이야 어쨌든,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둘이 싸워서 내분이 일어나면 나쁠 것은 없었고 이번 기회에 저들의 싸움 실력을 확인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씨발, 대변인 노릇이라도 하게?”

“크윽…….”

“자신 없으면 한쪽에 찌그러져 있어 새꺄. 같이 놀아 주니까 동급인 줄 아나 본데 서열 정리 한번 해 줘?”

“김준석, 애들도 있는데 말은 좀 가려서 하자.”

처음엔 기세에 눌려 우물쭈물하던 이석호는 계속되는 모욕에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김준석 앞에 서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 갔다.

“생각해 보니까 소문만 무성했지, 우리 붙어 본 적도 없잖아.”

“오, 그래서 한번 해 보시겠다? 잘됐네.”

김준석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쌓여서 짜증 났었는데, 너로 풀어야겠다.”

“이 새끼가!”

자신을 심심풀이 취급하자 발끈한 이석호는 단숨에 옷깃을 잡고 바닥에 꽂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목은 어느새 김준석에게 잡혀 있었고 힘으로 풀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놔.”

“훗, 병신 같은 새끼.”

팔목에 느껴지는 강력한 악력에 이석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고 김준석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더니 그대로 라이트 훅을 얼굴에 날렸다.

퍼억!

육중한 덩치 덕분에 쓰러지진 않았지만, 관자놀이를 가격당한 이석호는 몸이 휘청거렸고 김준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꿈치로 턱을 후려갈겼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석호의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렸고 턱을 맞은 충격에 균형감을 잃은 그는 비틀댔다. 싸움은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김준석은 싸늘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새끼야,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후, 김준석의 무차별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다른 패거리들은 살기를 띤 그의 눈빛에 나설 엄두를 못 냈고 학생들은 두려운 나머지 그 광경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김준석이 저렇게 강했던가?’

나는 빠르면서도 정확한 김준석의 타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르마이스식 격기술과 복싱 체육관에서의 훈련으로 나름 강해졌다 생각했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김준석과 충분히 붙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붙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이석호를 순식간에 제압하는 그의 모습에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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