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4화 (14/122)

14. 4화 전생의 나를 찾아서 (1)

쓰러진 상태에서 다리를 붙잡으며 반항을 이어 가던 이석호는 구타가 이어지자 점점 수그러들었다.

“헉, 헉…… 준석아, 미안해. 그만, 그만…….”

“그만은 뭘 그만이야, 새끼야.”

이석호가 숨을 헐떡이며 잘못했다고 말해도, 김준석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해. 한 번만 봐줘. 앞으로 다시는 개기지 않을게. 제발…….”

“아이 씨, 뭐야? 벌써 항복이야? 야, 누구 수건 있어?”

김준석이 주위를 돌아보며 외치자 패거리 중 하나가 서랍에서 수건을 꺼낸 다음 두 손으로 공손히 수건을 건넸다.

“곧 있으면 담임 오니까 피 잘 닦어. 괜히 나한테 불똥 튀면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처신 똑바로해. 너희도 입단속들 잘하고.”

“아, 알았어. 걱정하지 마. 으윽…….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아.”

이석호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야, 박준태.”

“으응, 준석아.”

“이 새끼 데리고 병원이나 가. 선생한테는 혼자 지랄하다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고.”

“알겠어. 석호야, 일어날 수 있어?”

지시를 받은 박준태는 동생 박준명과 함께 이석호를 부축해 반을 빠져나갔다.

“뭐, 구경 났어 새끼들아?! 남자들끼리 화끈하게 치고받은 거니까 관심들 꺼.”

김준석의 으름장에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고 이후, 선생님이 반에 왔지만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

‘어떡하지? 다음 주면 당장 소설을 쓰라고 할 텐데, 당분간은 말을 들어야 하나?’

나는 예상을 뛰어넘는 김준석의 실력에 깜짝 놀랐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고민에 빠졌다.

* * *

[아르마이스 님, 아르마이스 님!]

“아, 네. 말씀하세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길래 제가 불러도 듣지 못하시는 겁니까?]

한동안 인간 샌드백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나이트 아린과의 수업을 제꼈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호출했다.

막상 나이트 아린을 불러 수업을 들었지만, 내 마음은 딴 데 있었고, 보다 못한 그녀는 내막을 직접 묻기로 했다.

[혹시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수업에 집중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의 사명은 아르마이스 님의 고민을 덜어 드리고 원하시는 것을 얻도록 도와드리는 겁니다. 괜찮으니,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수업이 거듭됨에 따라 냉랭했던 나이트 아린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그래, 어차피 혼자 생각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으니 물어보자.

나이는 20대 후반에 불과하나 수많은 전투를 겪은 그녀의 지혜라면 단서라도 제시할 수 있을 거다.

“사실, 오늘 학교에서…….”

마음을 정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쌍둥이 형제를 이겨 자신감을 얻은 것부터 김준석의 실력을 확인한 후 다시 위축된 일까지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흐음, 이해가 되지 않네요.]

“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르마이스 님께서는 격기술에 있어서만큼은 엄청난 성장을 이룬 상태이십니다. 물론 경험이 아직 부족하셔서 확신이 없을 수는 있지만, 김준석이라는 자는 일개 학생이지 않습니까.]

“저도 제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는 것은 실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놈은 어렸을 때부터 각종 격투기를 배웠고 경험도 풍부해서 이길 수 있는 각이 잘 안 보입니다.”

애써 가르쳐 준 스승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숨길 때가 아니었다.

대답을 들은 나이트 아린은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대화를 이어 갔다.

[아르마이스 님이 살고 계신 차원이 얼마나 발달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르마이식 격기술은 카산트 대륙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무술입니다. 마왕으로부터 평화를 찾은 후 1,0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대인 격투술이 창안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아르마이스 님이 만든 격기술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나이트 아린님의 말씀을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는 복싱 외에도 유도, 레슬링 등 다양한 투기 종목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애당초 격기술을 제대로 익혔는지도 의문이고요.”

그녀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2주가 좀 넘는 훈련 기간으로 김준석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이트 아린은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다소 냉정한 투로 직언했다.

[스스로 겁을 집어먹으면 본인이 가진 역량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르쳐 드린 격기술에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저희 이르젠 제국의 군대가 최강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이니까요. 이야기하다 보니 사설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초식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점검이요?”

[네, 이미 초식 수련은 충분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실전 활용 방안을 중심으로 수업이 이루어질 겁니다. 스트레칭하시고 준비되시면 시작해 주시길 바랍니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자세를 잡고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의 초식들을 정성껏 시연했다.

1형부터 12형까지 순서대로 초식이 펼쳐졌고 나는 차분히 그녀의 평을 기다렸다.

[이런 말씀 드리면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자세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으십니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 수정구로 아르마이스 님의 격기술을 녹화하여 훈련 교본으로 삼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하, 부족하지만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트 아린의 발언은 단순히 띄워 주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아르마이스 님, 방금 보여 주신 초식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 세이라 황녀님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는 세이라 씨를 오랜만에 본 기쁨에 반가운 감정을 드러냈다.

[저야, 항상 아르마이스 님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답니다. 앗, 제가 그만 주책을 떨었네요.]

세이라 씨는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나와 그녀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보기 민망했던 나이트 아린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현재 아르마이스 님의 격기술이 완성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이르지만, 이전에 비해서 동작이 훨씬 자연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솔직히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입니다만…….”

[초식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이전과 다르게 가상의 적을 염두에 두고 동작을 수행하시는 게 한눈에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동작 자체에만 치중하셨다면 이제는 경험이 쌓인 기사들 못지않게 실전성을 갖추셨더군요.]

‘그동안의 고생이 헛된 게 아니었어.’

인간 샌드백 아르바이트와 복싱 체육관에서의 미트 치기가 효과를 본 게 틀림없었다.

이전에는 나이트 아린의 가르침만을 염두에 두고 초식을 행했다면, 지금은 훈련을 통해 체득된 실전적인 움직임이 자동으로 가능해졌다.

“이게 다 스승님이 잘 가르쳐준 덕분입니다.”

[이론적인 가르침만으로는 그런 움직임을 보이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그사이에 전투라도 경험하신 건 아니신지요.]

“따로 추가 훈련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간의 사정들을 상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아직 싸움은커녕 스파링도 해 보지 않은 상태라 거짓말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흠, 말씀 못 하시는 이유가 있으신 것 같네요. 자 그럼 수업을 마무리하도록 하죠. 일단, 4형과 7형에서 약간의 미스가 있었습니다. 조금 더 완벽한 초식이 되기 위해서는…….]

나이트 아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훈련을 재개했다. 이후 30분 간의 교정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것으로 초식 수업은 막을 내렸다.

[아르마이스 님, 정말 훌륭합니다. 만약 실전에서도 이렇게만 동작을 행하실 수 있다면 어떤 강적에게도 쉽게 지지 않을 거예요.]

[흐흠, 황녀님 말씀에 동의하지만, 남은 수업도 성실히 들으셔야 할 겁니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 이만큼 성장하실리라고는 저도 상상하지 못했지만요.]

“…….”

세이라 씨와 나이트 아린이 내가 거둔 성과를 칭찬하고 있는 사이, 난 갑자기 뜬 문구를 읽으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전생과의 인연이 강화되었습니다. 전생의 능력이 점점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게 뭐지?

이 문구는 과거에 이미 뜬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난 잠이 든 상태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기에 사실상 처음 겪는 상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르마이스 님! 아르마이스 님!]

“아, 아 네. 황녀님. 부르셨어요?”

[나이트 아린과 제가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고 있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시니까 민망합니다.]

세이라 씨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삐진 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에게 신기한 일이 일어나서요.”

[신기한 일이요?]

“네, 갑자기 전생과의 인연이 강화되었다는 알람이 뜨는 바람에 황녀님이 말씀하시는 걸 듣지 못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세이라 씨는 이 현상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질문했다.

[아르마이스 님, 인연이 강화됐다는 말 외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나요?]

“이후에 전생의 능력이 점점 회복되고 있다는 표시가 떴습니다.”

[정확한 건 좀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아르마이스 님께 영혼 동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혼 동기화요?”

설명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네, 영혼 동기화는 아미라 이르젠 님의 책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특정 행동이나 사건을 계기로 전생의 기억과 능력들이 현생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한 무언가가 전생의 영혼을 자극해서 능력이 돌아온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오, 역시 아르마이스 님이십니다. 격기술뿐만 아니라 이해력도 이렇게 좋으시다니!]

그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날 찬양했다.

하지만 궁금했던 게 많았던 나는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최근에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딱히 없었습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아, 그렇습니까? 하, 이상하다. 분명 아르마이스 님을 자극할 만한 사건이 있었을 텐데…….]

내 말을 들은 세이라 씨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때, 나이트 아린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

[혹시, 아르마이스식 격기술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요?]

[맞아요! 아르마이스 님이 직접 만드시고 평생을 수련한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이라면 지금의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세이라 씨는 목소리를 높이며 나이트 아린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격기술 훈련이라면 2주 전부터 계속하던 건데, 왜 하필 오늘일까요?”

[확신할 순 없지만, 초식을 완성한 부분이 동기화 작업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유는요?]

세이라 씨는 어느새 자신의 일처럼 나이트 아린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었다.

[초식의 완성도가 지난 2주와 오늘의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도 훌륭히 초식을 소화하셨지만, 조금 전처럼 완벽하진 않았으니까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전생의 능력을 구현할 때마다 영혼 동기화 작업이 일어난다는 구절을 책에서 본 적이 있거든요.]

이들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영혼 동기화에 대한 이해는 점점 깊어졌다.

‘정확한 건 더 들어봐야겠지만, 전생의 능력을 찾을 수만 있다면 김준석을 처리하는 건 문제도 아닐 거야.’

어쩌면 나에게 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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