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4화 전생의 나를 찾아서 (2)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을 익힘으로써 제 영혼의 기억이 깨어났고 그 후에 전생의 능력이 현생에서도 발현되는 거였네요.”
[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그것보다 영혼 동기화는 전생에 공을 많이 쌓고 깨달음을 얻은 분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인 것을 보면 역시 아르마이스 님이십니다!]
세이라 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여러분들을 만난 것도 저에게 큰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음…… 저희 선조이신 아미라 이르젠 님이 아르마이스 님의 동료였던 것을 생각하면 전생의 인연이 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충분히 영혼 동기화 작업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군요.”
설명을 들을수록 나에게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제껏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다른 차원의 존재들을 만난 후 발동됐던 것을 생각하면 동기화 여부에 따라 다른 능력이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황녀님, 혹시 제 전생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카산트 대륙의 사람이라면 아르마이스 님에 관한 위인전을 한 번쯤은 읽어 봤을 테니까요.]
내내 조용히 있던 나이트 아린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오호, 그 말씀은 나이트 아린께서 아르마이스 님의 위인전을 읽으셨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아, 그 그게…….]
“정말 제 위인전이 따로 있나요?”
[대륙 최고의 영웅이신데, 위인전은 기본이지요. 그것보다 나이트 아린께서 아르마이스 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무척 각별했나 봅니다. 자존심이 강하셔서 누구를 좋아하거나 존경한다는 게 상상이 안 됐거든요.]
[어렸을 적에 잠깐 봤던 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꼭 위인전이 아니더라도 아르마이스 님은 카산트 대륙의 기사들에게는 우상 같은 존재이시니까요.]
갑작스럽게 사생활이 들춰진 나이트 아린은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그녀는 나에게 엄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사실 나에 대한 존경심은 세이라 씨나 브루스 단장 못지않게 컸다.
[어쨌든,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전 공무가 있어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의치 않게 속마음을 이야기한 나이트 아린은 도망치듯이 화면을 빠져나갔다.
[훗, 나이트 아린께서 많이 부끄럽나 봅니다. 아, 그리고 아까 전에 아르마이스 님의 전생을 잘 아시는 분을 찾는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마침 미르헨 총장님께서 우리 이르젠 제국에서 아르마이스학으로는 최고 권위자이십니다. 조금 있다가 글쓰기 수업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때 여쭤보면 어떻겠습니까?]
아르마이스학?
대륙의 영웅이라고는 하지만, 내 이름을 딴 학문이 따로 있다는 사실에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한편으론 호기심도 들어서 세이라 씨에게 아르마이스학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낯이 뜨거워질 것 같아 참기로 했다.
“매번 황녀님께 신세만 지내요. 정말 감사합니다.”
[신세라니요! 거듭 말씀드리는 거지만, 카산트 대륙의 사람들이 아르마이스 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수업 잘 들으시고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대화를 마친 나는 글쓰기 수업 전까지 이전에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미르헨 총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마이스 님,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예고한 대로 훌륭한 글을 쓰기 위한 조건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넵, 총장님.”
수업에 앞서 내 전생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르헨 총장의 수업이 우선이었기에 질문은 뒤로 밀어 두기로했다.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서는 문장력, 탄탄한 서사 구조, 긴장감 있는 전개 방식, 독창성 등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우선, 문장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 작가들은 롤 모델이 되는 작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미르헨 총장은 한 시간에 걸쳐 수업을 진행했고 나는 여느 때처럼 열심히 필기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오늘까지 많은 이론을 아르마이스 님께 알려 드렸고 간간이 문장들을 살펴보며 연습을 했습니다. 이만하면 기초 수업은 끝난 듯한데, 이제는 실제로 글을 써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싶긴 한데,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아서요……. 흠, 다음 주 화요일나 수요일부터 글쓰기를 하는 건 어떨까요?”
주말이 지나면, 김준석 패거리의 괴롭힘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기에 글쓰기에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르헨 총장은 이전의 자상한 모습과 달리 단호한 태도로 글쓰기에 돌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제가 알기로 앞으로 10일 후에는 단편 소설을 제출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르마이스 님의 재능이라면 소설을 빨리 쓰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퇴고 작업을 여러 번 거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소설 쓰기를 시작하셔야 됩니다.]
이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미션에 의하면 회지에 넣을 단편 소설로 문학부 내부 평가에서 3등 안에 들어야 했다.
격기술과 복싱 훈련에 매진한 탓에 소설 미션을 소홀히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수업이 끝나는 대로 작품 구상에 들어가겠습니다.”
[허허, 이거 제가 괜히 아르마이스 님께 부담을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곧 있을 평가를 고려하면 서둘러 글을 쓰는 게 여러모로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미르헨 총장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후, 시간은 촉박한데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큰일입니다.”
[평소에 쓰던 소설은 따로 없으십니까? 새로운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이전에 썼던 소설을 두고 저와 상의해 가며 수정하는 편이 시간도 아끼고 질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방책을 제시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평소 쓰던 소설이라고는 학교에서 쓰던 야한 소설과 웹소설밖에 없던 나는 문학부에 제출할 만한 글이 딱히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제가 쓰고 있는 거하고 제출해야 할 소설이 형식이 약간 달라서요.”
[흠, 그렇군요. 그럼 최근 일상 중에 아르마이스 님께서 가장 관심 있게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관심 있게 하는 일이라……. 뭐 특별한 건 없지만, 격기술과 복싱 수련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시는 이유는요?]
대화의 내용이 이야기하고 있던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르헨 총장님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진지한 태도로 질문에 응했다.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이쪽 세상에서 저를 괴롭히는 녀석들이 있거든요. 훈련의 이유를 물으신다면 그 녀석들로부터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거 외에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까?]
“굳이 다른 이유를 생각하자면 약골이었던 제가 점점 강해진다는 사실이 무척 매력적이라고나 할까요?”
나름 고민하고 내놓은 답변이었지만, 조금 유치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방금 한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세계 사람들의 서포트와 미션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내 모습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훈련에 매진했던 나였다.
[지금까지 아르마이스 님께서 말씀하신 걸 요약하면 괴롭힘을 당하던 한 소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술을 연마했고 그 과정에서 희열을 느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자, 어떻습니까?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소설 소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렇군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전문 소설가라고 하기에 변변한 작품 하나 없는 게 현실이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글을 써 오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소설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을 소재로 삼을 때 가장 잘 써진다는 점이었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알고 있는 것들을 소설에 녹여 낼 수만 있다면 빠른 시간에 양질의 소설을 쓰는 게 불가능은 아닐 겁니다.]
“총장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글을 쓰려면 아르바이트와 복싱 훈련에 들어가는 시간을 확 줄여야 하는데,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상황이 쉽지가 않습니다.”
단편 소설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초고 작성을 마무리해야 해서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김준석 패거리와 언제 붙을지 몰랐기에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훈련을 중단하는 것보단 계속하는 편이 글 쓰는 데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독자들에게 생생한 경험을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활동을 서술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차라리 잠을 줄이시고 두 가지 모두를 대비하는 게 나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훈련도 하고 글도 쓰라니…….
아니야,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야.
그래, 해 보자.
처음에는 빡빡한 일정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김준석 패거리를 처리하는 것과 글쓰기 모두 중요했기에 미르헨 총장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 제출일까지 이 악물고 해 보겠습니다.”
[아르마이스 님이라면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저 미르헨, 아르마이스 님을 위해선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테니 필요한 게 있을 때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결의에 찬 내 모습에 감명을 받은 미르헨 총장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나는 미르헨 총장에게 내 전생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총장님, 마지막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넵, 말씀하십시오.]
“혹시, 천 년 전 아르마이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을까요?”
[영혼 동기화 현상 때문에 그러시군요.]
미르헨 총장은 내가 이 질문을 할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 제가 총장님께 이미 말씀드렸었나요?”
[세이라 황녀님께서 수업 전에 미리 언질을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아르마이스 님이 필요한 자료들을 몇 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보이십니까?]
그는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설마 그것들을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르마이스 님께서 전생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모두 읽으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신 듯 보여 이들 중 몇 권만 추천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우, 감사합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미르헨 총장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날 보며 미소를 짓더니 대화를 이어 갔다.
[아르마이스 님에 관해 서술한 책들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영혼 동기화를 촉진시킬 만한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1,000년의 세월은 왜곡이 발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거든요. 자, 우선 이것들을 중심으로 읽어 보시면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겁니다.]
“미르헨 총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카산트 대륙하고 이 세상의 언어는 다르지 않나? 그리고 차원 연결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책을 어떻게 읽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난 깊은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미르헨 총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이곳에 있는 책들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미 방책을 다 마련해 두었으니까요.]
그는 대답을 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짓으로 누군가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