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7화 (17/122)

17. 5화 뜻밖의 전개 (1)

금요일 밤이라 그런가, 거리에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북적댔다.

지난 1주일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한 결과 4명만 더하면 미션 할당량을 모두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마스크맨 도착했다.”

“오늘은 누가 나설까?”

“아서라, 괜히 나갔다가 개망신만 당하지. 저 사람이 제대로 하면 우리는 옷깃도 못 건드릴 거야.”

한 곳에서만 영업을 한 덕분에 나에 대한 입소문은 금방 돌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오기 전부터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때도 있었다.

체육관에서의 훈련과 아르바이트로 인해 회피 기술은 나날이 발전했고 이제는 일반인 정도는 마음을 먹으면 한 대도 안 맞을 자신도 생겼다.

“저 친구랑 해서 둘이 하려는데, 괜찮으세요?”

“네, 글러브 끼시고 준비해 주세요.”

여느 때처럼 전봇대 옆에 짐을 풀은 난 곧바로 영업을 개시했다.

“다음 손님, 앞으로 나와 주세요.”

인산인해를 이룬 탓에 미션 할당량은 금방 채워졌고 곧이어 미션 창이 스르르 나타났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사용자의 미션 완료를 알려 드립니다.>

<보상: 민첩력, 동체 시력 +30%>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Y/N>

미션이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환한 빛이 내 몸을 감싸 안았고 이전처럼 진행률이 표시되었다.

20%…… 50%…… 80%……

잠시 후, 작업이 완료됐다는 표시와 함께 몸에서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깃털처럼 가볍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이제껏 거대한 쇠를 몸에 짊어지고 살았다는 착각이 들었다.

살짝 과장하면 가만히 있어도 몸이 살짝 떠 있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장 몸을 움직이고 싶다. 누구랑 한 번 더 붙어 보고 싶은데, 조금만 더 해 볼까?’

할당량을 채우면 집에 돌아가 글을 쓰기로 생각을 했었지만, 스탯이 오른 효과를 당장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었다.

귀가와 영업 사이에서 고민을 한참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봐요,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까부터 멍하니 계속 서 계시기만 하잖아.”

한 커플이 묵묵부답인 나를 이상하듯이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미처 못 들었습니다. 어떻게 바로 해 보시겠어요?”

“네? 아까 보니까 짐을 정리하시는 것 같던데 괜찮으세요?”

방금까지만 해도 글러브와 호구를 짐 속에 넣고 있었던 터라 남자 입장에선 충분히 의아할 수 있었다.

“원래는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자, 두 분 다 하시겠어요?”

“아, 아니요. 저만 하겠습니다.”

남자는 돌변한 나의 태도에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며 손에 글러브를 꼈다.

‘마지막 날이니까 지금부터는 봐줄 필요가 없겠어.’

나는 글러브를 낀 채 서서히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헉, 헉…….”

“오빠, 잘 좀 해 봐.”

“아, 알았으니까 기다려.”

여자 친구 앞에서 호기롭게 임한 남자는 자신 있게 날린 주먹이 한 대도 적중하지 않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극적인 반전은 나오지 않았고 허무하게 2분은 지나갔다.

“옛날에 한 가닥 했다면서 이게 뭐야.”

“하, 하…… 아까 봤던 몸놀림이랑 완전히 달라.”

여자 친구의 푸념에 남자는 헉헉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전에는 손님을 유인하기 위해 몇 대 맞아 줬다면 지금은 상승한 능력치를 시험하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마지막 손님 이후, 사람들은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여럿이 보는 자리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바꿔야겠다.

“야, 저 조건이면 한번 해 볼 만한 거 같은데?”

“정타를 한 대만 맞혀도 만 원을 준다고? 자신감이 너무 과하네.”

“그럼 가서 해 봐. 솔직히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 대를 못 맞히겠어?”

하드보드지에 새로운 조건을 걸고 영업을 재개하자 사람들은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부푼 희망을 안고 도전했지만, 신체 능력이 각성한 나에게는 모두 역부족이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나도 해 보고 싶은데…….”

“사람들 하는 거 못 봤어?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자.”

사람들은 영업 종료 선언에 자리를 빠져나갔고 난 짐들을 챙기며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낯익은 얼굴을 한 여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성문고등학교 다니지 않으세요?”

“네 그렇긴 한데…… 네?!! 아, 아닌데요. 전 여기 말고 다른 동네에서 왔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답변한 나는 급하게 말을 지어내며 신분을 숨기려고 했다.

나에게 말을 건 여자의 정체는 중학교 때 신춘문예에 등단하고 기성작가들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은 윤채원이었다.

“너, 강진우 맞지?”

“사람을 잘못 보신 거 같네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보니까 넌데.”

변명을 해 봤지만, 의심을 거두지 않자 가면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 쪽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난히 날이 더웠던 터라, 마지막 손님을 상대한 후 무의식적으로 가면을 벗었던 것이다.

“하하, 들켜 버렸네. 안녕, 채원아…….”

거짓말이 들통나 버린 것을 깨달은 난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응, 안녕.”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회지에 낼 소설을 쓰다가 머리 좀 식히려고 산책하던 중이었어. 그것보다 의외네 조용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다하고.”

윤채원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용돈도 벌고 머리 식힐 겸 잠깐 한 거야.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고.”

“그건 그렇고 글은 잘 써져? 다음 주 금요일까지 제출이던데?”

“집에 들어가면 바로 써야지.”

스탯이 오른 기쁨에 취해 있던 나는 회지에 제출할 소설을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밤에 나와 알바할 수 있는 걸 보면 미리 많이 써 놨나 보네? 하긴, 예전에 썼던 글도 있을 거 아니야.”

그녀는 내 속은 모른 채 말을 던졌다.

“따로 써 놓은 건 없지만, 아르바이트나 운동을 하면서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면 마감 시한 안에 간신히 쓸 수 있을 것 같아.”

“대단하다. 그럼, 아르바이트를 했던 게 글을 잘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거야?”

윤채원은 손을 턱에 갖다 댄 채,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탄했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글을 쓰며 세상일에는 무관심해 보였던 그녀가 칭찬을 던지자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아무래도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글에 녹여 낼 때, 독자들에게 생생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맞아. 나도 예전에 명인이라는 단편 소설을 쓸 때, 도자기 장인을 찾아가서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있거든. 비록 짧은 시간이라 선생님처럼 숙달된 실력을 갖추는 데는 실패했지만, 소설 속 인물의 심정이나 동기를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어. 옛날에는 기성 작가님들의 작품을 흉내 내는 데 치중했지만, 좋은 작품을 쓰려면 내 경험을 특색있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말이 없던 그녀는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주제가 나오자 봇물 터지듯이 말을 쏟아 냈다.

단편 소설 명인은 윤채원의 대표작 중 하나로 중학교 3학년 때 집필되었던 작품이다.

난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자세와 삶에 대한 태도에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까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듣느라 힘들었지?”

윤채원은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덕분에 글을 쓰기 위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어. 고마워 채원아. 그것보다 너 말도 되게 잘한다. 항상 글만 쓰고 있어서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나는 손사래를 치며 덕담을 건넸다.

“오랜만에 통하는 사람을 만나니까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 것 같아. 그리고 나 원래 이야기하는 거 좋아해. 학교에 친한 애가 거의 없어서 그러지…….”

충격이었다.

뛰어난 외모와 천재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녀가 친구가 거의 없다니.

하지만 윤채원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문학부 회원들을 비롯한 우리 학교 학생들은 그녀를 동년배 친구가 아닌 연예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사람들은 항상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동경만 할 뿐, 가까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차가우면서도 도도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외모의 영향도 있었다.

심지어 김준석조차도 학교에서 윤채원을 보면 패거리들과 예쁘다고 언급만 하지 말을 걸지 못할 정도였다.

“나도 재웅이 말고는 학교에서 조용히 지내는 데 뭘. 그래도 너랑 통한다니까 기분이 좋다.”

“훗, 맞아. 누군가랑 이렇게 마음 편히 대화하는 건 중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인 거 같아. 혹시 앞으로도 학교에서 종종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응? 나랑?”

마음 같아선 고개를 힘차게 흔들면 당연하지를 외치고 싶었지만, 우리 학교 최고 스타로부터 말동무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무래도 조금 어렵겠지?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이도 아니고, 애들 시선도 있으니까…….”

윤채원은 초조한지 눈을 살짝 치켜뜬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여웠다.

도도하고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그녀의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짐짓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나야 좋지. 앞으로 글 쓰다가 막히는 부분 있으면 너한테 물어봐야겠다.”

“언제든지 환영이야. 회지에 넣을 단편 소설 외에 웹소설도 괜찮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

“어? 웹소설에도 관심이 있는 거야?”

“당연하지. 김호준이 매일 그렇게 자랑을 하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하하, 맞아. 호준이 녀석이…….”

중학 시절 나에게 쓰라린 기억을 남긴 김호준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대화는 물 흐르듯이 이어졌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만 집에 들어가야겠어. 벌써 10시다.”

윤채원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응, 나도 얼른 들어가서 글 써야겠어.”

“그래, 파이팅해 진우야. 너 3반이지?”

“어?”

“나중에 시간 될 때 놀러 갈게. 집에 조심히 들어가.”

난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점점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채원이가 우리 반에 오게 되면 김준석 패거리들이 날 건들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원래라면 준비 시간을 더 갖고 김준석을 처리하려 했지만, 시간을 앞당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해 보자. 김준석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계속 피할 수는 없어.’

나는 김준석을 상대하기 위한 대비책을 궁리하며 천천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후, 드디어 시작이다. 미르헨 총장님이 알려 주신 대로 차분히 써 보자.’

집에 도착한 나는 부모님께 대충 인사를 드린 뒤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책상 한구석에는 미르헨 총장이 준 가이드라인이 적혀져 있었고 이를 참고하여 차분히 글을 써 내려갔다.

‘복싱 소재로 단편 소설을 쓰려면 재미를 뛰어넘는 작품성을 가져야 돼. 먼저 주인공이 복싱을 하게 된 계기와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을 짜 보자. 그러려면…….’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집필의 재미를 느끼며 순식간에 글을 써 내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