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5화 뜻밖의 전개 (2)
‘휴, 잠깐 쉬자.’
무려 5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글을 쓰자 머리가 멍해지고 손가락이 굳어 감을 느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퀄리티 있는 소설을 쓰려면 휴식이 필요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체적인 스토리라인과 복싱 입문 계기를 나름 흥미 있게 서술했다는 점이었다.
‘오늘은 이쯤 하고 그만 자자.’
글을 못 쓸 정도로 피곤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일 오전에 복싱 체육관에 방문해야 했기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 내 머리 위로 조그만 한 창이 하나 떴다.
<필력 향상에 필요한 경험치가 증가했습니다. 현재 사용자의 필력은 LV 2이고, 다음 레벨까지 7퍼센트 남았습니다.>
미션을 수행한 것은 아니지만, 장시간 소설을 쓴 덕분에 경험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퍼센티지로 뜨던 스탯 향상이 현자의 눈을 개안한 이후로는 LV에 따른 경험치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변화로 편의성이 커졌지만, 깊게 잠이 든 터라 인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방 안에는 얕은 코골이 소리만 반복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어제 바쁜 나머지 훈련을 소화 못 한 탓에 일정이 오늘 오전으로 미뤄졌다.
늦잠을 잔 나는 약속 시각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고 얼마 있지 않아 체육관에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됐고, 얼른 준비나 해. 요즘 실력 좀 늘었다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모양인데, 오늘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네, 금방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약속 시각인 11시보다 5분 늦은 난 백성철 관장님의 꾸지람을 들으며 탈의실로 향했다.
“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하지만,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해.”
“애송이라고 하기에는 몸놀림이 너무 좋아진 것 같은데요.”
“박 코치, 훈련 방해할 거면 먼저 들어가.”
“하하, 죄송합니다 형님. 조용히 할 테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관장은 의도적으로 나를 기죽이려고 했으나 박재엽 코치가 눈치 없이 굴어 무산되자 화를 냈다.
“크흠, 아무튼 목요일 날 배웠던 패턴 먼저 복습할 거니까 스트레칭하면서 몸 풀어.”
“네, 알겠습니다.”
지시에 따라 가볍게 몸을 푼 나는 다시 관장님 앞에 섰다.
‘어째 심상치가 않은데?’
백성철 관장은 양손에 미트를 낀 채 눈을 부릅뜨고 날 노려보고 있었고 박재엽 코치는 이를 안타깝게 쳐다보며 한마디 던졌다.
“형님, 애 잡으려고 작정했수?”
“넌 조용히 하고 지켜보기나 해. 시작한다.”
이를 꽉 깨문 백성철 관장은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미트를 휘둘렀다.
현역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챔피언 출신이었던 그는 선수를 지도할 때 수준으로 패드웍을 진행했고 내가 나가떨어질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속도를 올릴수록 나의 몸놀림은 더욱 기민해져 갔고 급기야 관장이 미트를 대는 속도보다 반 박자 빠르게 펀치를 날리기에 이르렀다.
“너,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어떻게 하루 새에 실력이 이렇게 늘 수 있어?”
백성철 관장은 훈련을 잠시 중단하고 나에게 물었다.
“매일 관장님과 훈련을 해서 패드웍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예전에 비해 감이 많이 생긴 영향도 있고요.”
“야,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이틀마다 패턴을 바꿔 가면서 진행했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흠, 패턴에 변화를 주셨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모든 동작들이 기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 모든 건 아르바이트 미션 후 받은 보상 덕분이었다.
“너, 이 자식…….”
“관장님, 왜 그러세요.”
관장님은 내 설명이 납득되지 않았는지 미트를 집어 던지고 주먹을 불끈 쥐었고 난 그의 모습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와락.
“과, 관장님.”
“복덩이가 우리 체육관에 들어왔어. 그동안 너 같은 인재가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마 모를 거다. 천재라고 불린 놈들을 숱하게 봤지만, 진우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백성철 관장님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독설을 퍼부었던 것을 금세 잊고 찬사를 쏟아냈다.
“참네, 예전에 정욱이한테도 챔피언 재목이 들어왔다면서 그 난리를 피웠으면서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요. 하지만 형님 말씀대로 진우가 물건이긴 물건이에요. 저도 나름 안목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진우 같은 재능은 본 적이 없거든요.”
박재엽 코치는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야, 정욱이가 국내 챔피언을 노릴 재목이면 진우는 세계로 뻗어 나갈 놈이야. 두고 봐라. 이 녀석이 우리 정선 체육관을 국내 최고의 복싱 도장으로 키워 낼 테니까.”
김정욱은 정선 체육관 소속 에이스로 작년에 전국체전 은메달을 딴 선수였다.
백성철 관장은 그 또한 여타의 선수들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재능을 보유했다고 봤지만, 나에 비하면 훨씬 아래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대단하면 지금 당장 스파링을 붙는 건 어떨까요?”
“저 정욱아, 너 언제부터 와 있던 거야?”
나의 재능에 잔뜩 고무되어 있던 박재엽 코치는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아까부터 쭉 보고 있었어요.”
“진우가 초심자치고 잘하는 거 같아서 격려해 주려고 한 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이러나저러나 우리 체육관 기대주는 너라는 거 잘 알잖아?”
“아니요. 방금 말씀 못 들었어요? 백 관장님이 보기에는 저 자식이 저보다 훨씬 뛰어난 놈이라잖아요.”
김정욱은 내가 들어온 이후, 관장님과의 훈련이 줄어들어 가뜩이나 예민하던 참이었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듣자 신경이 곤두섰다.
“네가 올 줄 모르고 내뱉은 말이긴 하지만, 정정할 생각은 없다. 혹시 불만이라도 있는 거냐?”
“형님, 애 앞에서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정욱아 어서 옷 갈아입고 와. 오늘은 특별히 내가 코치해 줄게.”
백성철 관장은 자신이 한 말을 애써 부인할 생각은 없었고 박재엽 코치는 이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중재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김정욱은 거칠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한번 해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제 복싱 입문한 지 3주 정도 된 아이한테 이게 무슨 추태냐? 박 코치 말대로 가서 훈련 준비나 해라.”
‘이번 기회에 정욱이도 정신을 차려야 해.’
관장은 요즘 들어 김정욱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관원들의 과한 관심과 성원은 그를 자만하게 만들었고 조그만 일에도 우쭐대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그러나 속내를 모르는 김정욱은 볼멘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저 친구 들어오고 나서 제 훈련도 소홀히 하시고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면 뭐 합니까? 그냥 취미로 하는 녀석하고 체육관을 대표해서 열심히 한 저를 차별해서는 안 되잖아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아요. 제가 분명 관장님으로부터 특별 취급을 받는 건 맞지만, 복싱을 취미로 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그가 지속적으로 나를 언급함에도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던 나는 참다 참다 입을 열었다.
“넌 좀 빠져 있어 새끼야.”
“전 그저 관장님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관장님, 코치님도 계시는데, 말씀은 좀 가려서 하시죠.”
보통 때라면 상대의 위협에 위축됐을 나였지만, 오늘은 고교 정상급 선수가 씩씩대고 달려들려는 상황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했다.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 되겠어. 당장 글러브 끼고 링 위로 올라와.”
“그만들 해!!!”
이성을 잃은 김정욱이 손을 까닥거리며 올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백성철 관장은 눈을 치켜뜨고 고함을 질렀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쳇, 알겠어요.”
바로 사과의 말을 하는 나와 달리 김정욱은 불만스러운 감정이 역력해 보였다.
백성철 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진우랑 스파링을 하고 싶다고 했지? 좋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다음 주 화요일 날 해보는 건 어떻겠냐?”
탈의실로 향하던 김정욱은 관장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들어 보니까 스파링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놈이라던데 고작 3일 가지고 되겠어요?”
“그래, 네 정신 상태를 보니까 3일이 아니라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할 것 같구나.”
“관장님…….”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김정욱은 어이가 없는지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얼핏 보면 감정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부서져라 주먹을 쥐고 있는 걸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저, 3일은 조금 무리일 거 같아요. 시합은커녕 스파링 경험도 없는 제가 선배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요.”
“맞습니다, 형님. 정욱이가 무례하게 굴어서 화가 나신 건 이해하지만, 둘이 스파링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내자 박재엽 코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백성철 관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내 안목이 틀리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건 아니지만…….”
“오호, 이제 보니까 자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백성철 관장은 말끝을 흐리는 나를 보며 은근히 신경을 돋웠다.
“후, 그냥 없던 일로 하죠. 초보자를 두고 그만 추태를 부렸네요. 야, 스파링은 없던 걸로 할 테니까 일 봐라. 대신 아까처럼 또 대들면 박살을 내 버릴 거니까 조심하라고.”
김정욱은 내가 겁을 먹었다고 판단하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김준석 때도 그렇고 강한 상대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나 자신이 싫었다.
후우
어차피 관장님과 코치님이 옆에 계시면 안전상의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 한 번 해보자.
나는 이빨을 꽉 깨물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원래는 선배로서 예우를 해 드리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뭐 새끼야?”
꼬리를 말고 도망갈 줄 알았던 내가 도전적인 투로 말하자 김정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날 노려봤다.
“관장님 말씀대로 화요일 날 스파링을 하시죠.”
“와, 이 새끼 봐라. 관장님이 옆에서 칭찬 좀 해 주니까 내가 X으로 보이냐?”
“야, 김정욱 말 가려서 안 할래?”
내내 김정욱의 자존심을 헤아리던 박재엽 코치는 주변 어른들은 개의치 않고 함부로 구는 그를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코치님.”
“야 임마. 네가 기분이 나쁜 건 알겠지만, 관장님이랑 내가 있는데 어디서 욕질이야?”
“박 코치, 그냥 내버려 둬. 애들 일인데 우리가 흥분할 필요는 없잖아.”
“혀, 형님.”
박재엽 코치는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구는 백성철 관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욱아. 다음 주 화요일 날 진우랑 스파링 괜찮지?”
“네, 관장님. 저, 방금 일은 죄송했습니다.”
“됐어. 이게 다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지. 자, 스파링 일정도 잡혔으니까 다시 훈련 시작하자.”
관장은 상황을 마무리 지은 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미트를 손에 꼈다.
훈련은 재개됐고 나는 관장님께서 알려 주시는 패턴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급하게 잡힌 스파링 때문에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아까와 같은 기민한 움직임은 나오지 못했다.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아, 그게…….”
“정욱이 때문에 그러지? 걱정하지 마라. 지금까지 배웠던 것만 잘 활용해도 정욱이를 상대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네, 알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관장님의 눈빛에는 일말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이는 가슴 한 켠에 있던 두려움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관장님 말씀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을 거 같아.’
현자의 눈이 개안한 이후, 파악 능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나는 그의 말을 신뢰해도 된다는 판단이 직관적으로 들었다.
이후, 훈련은 1시간가량 더 이어졌고 난 집에 돌아와서 다시 소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