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5화 뜻밖의 전개 (3)
‘생각보다 술술 써지네.’
복싱 훈련을 마친 후 집에 돌아온 나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데 전념했다.
소설 소재와 관련된 활동을 하다 보니 스토리를 짜는 데 확실히 용이했다.
단순한 트레이닝씬부터 전투씬까지, 이전 소설들보다 더 짙은 생동감을 전달할 수 있었고 글에 대한 자신감도 점점 붙었다.
“안녕하세요, 총장님.”
글쓰기 수업 시간이 되었다. 난 화면에 보이는 미르헨 총장을 보며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글은 잘 써지고 계십니까?]
그는 안부 인사는 생략하고 곧바로 글 점검에 나섰다.
“네, 일전에 주신 조언들을 바탕으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그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미리 프린트해 둔 원고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번 해도 적응되지 않았지만, 기왕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20장 분량의 소설을 읽는 데에는 30분가량이 걸렸고 목이 탔던 나는 물을 마시며 미르헨 총장의 피드백을 기다렸다.
[아르마이스 님이 있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문서를 전송할 수 있으면 참 편하겠습니다. 매번 이렇게 수고를 하시니까요.]
“비록 목이 좀 아프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소설을 차분히 읽다 보면 쓸 때는 안 보였던 허점들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하하, 과연 그렇습니다. 글쓰기에 몰입하다 보면 시야가 좁혀지기 마련이고 때때로 실수가 나오기에 퇴고라는 과정도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아르마이스 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텍스트를 모두 옮겨 적었으니 다음부터는 낭독한 부분들은 생략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일일이 옮겨 적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네요.”
[아닙니다. 아르마이스 님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작품을 학교에 제출한다고 하셨지요?]
“네, 우리 학교에 저처럼 문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활동하는 동아리가 있는데…….”
카산트 대륙에는 회지라는 개념이 없기에 나는 쉬운 용어로 에둘러 설명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학생들의 글을 모아 소설 단편집을 출간한다는 이야기네요?]
“맞습니다. 물론 학교와 인근 동네에만 소량으로 팔릴 거라 인쇄 부수는 많지 않겠지만, 미래의 작가들과 경쟁을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없는 건 아닙니다.”
[흠, 그렇군요. 저, 작품 관련하여 솔직한 의견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총장님.”
미르헨 총장의 고민하는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을 직감했다.
나는 제발 작품을 갈아엎으라는 이야기만 하지 말라고 기도하며 초조하게 말을 기다렸다.
[제가 애당초 복싱을 소재로 소설 쓸 것을 권한 이유는 아르마이스 님께서 글을 용이하게 쓸 수 있도록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작품성을 고려해 봤을 때 주인공이 각성하여 격투를 한다는 내용은 참신함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아, 그런가요? 후,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곧 있으면 제출일이라 새로 소설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예상치 못한 혹평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미르헨 총장은 이런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르마이스 님의 나이와 학교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이번 소설이 크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성장소설로 봐도 무방하니까요. 하지만 다른 글들과 차별화를 위해선 특별한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특별한 조치요?”
[지금부터 1시간 정도만 저에게 시간을 줄 수 있습니까? 제가 직접 첨삭을 한 다음 아르마이스 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총장님께서 첨삭을 해 주시면 저로서는 고맙지요.”
이르젠 제국 최고의 학자가 첨삭해 준다는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던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아르마이스 님이 모두 짜신 만큼 전 문장들을 다듬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야기 전개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지적해 주셔도 됩니다.”
[줄거리에서는 크게 손댈 부분이 없어 보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첨삭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소설을 더 쓰기로 마음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아카이브에 느낌표 표시가 떴다.
‘첨삭을 마치셨나 보네.’
난 손으로 느낌표를 클릭한 후 수정된 글을 천천히 살펴봤다.
전체적인 스토리에서 건든 부분은 없었지만, 이전보다 글이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결한 문장을 통한 전달력 향상, 그리고 세밀한 묘사가 필요한 곳에는 감각적인 표현이 쓰여 내가 썼던 글하고 궤를 달리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르헨 총장처럼 글을 쓸 자신이 없던 난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도움을 받는 것은 좋았지만, 직접 쓰지 않았기에 부정행위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르마이스 님, 첨삭본을 읽어 보셨습니까?]
첨삭본을 두고 고민하던 그때, 미르헨 총장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 총장님. 확실히 문장들이 이전보다 깔끔하고 세련되어 글의 퀄리티가 한층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제가 수정해 준 글을 그대로 제출하기에는 마음에 걸리시는 거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속마음을 들킨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첨삭본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일 뿐, 제출해서는 안 될 겁니다. 어떤 분들이 심사를 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그 글은 아르마이스 님의 필체와 제 필체가 묘하게 섞여 있거든요.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묘안이라도 있을까요?”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항상 혜안을 주는 미르헨 총장이었기에 나는 희망 어린 시선을 보내며 답변을 기다렸다.
[첨삭본을 옆에 두고 따라 하려고 해 보십시오. 초반에는 익숙하지 않은 탓에 어색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중반부에 다다르면 어느새 아르마이스 님만의 고유 스타일로 녹아들 겁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말은 쉽지 상대의 필체를 따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었기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르마이스 님의 눈썰미라면 제가 쓴 문장과 이전의 문장 간에 차이점을 발견하셨을 겁니다. 우선 가독력과 문장력을 동시에 향상시킬 수 있는 적절한 단어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한 문장 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넣지 않음으로써 물 흐르듯이 소설을 읽을 수 있게 해야 하고요. 이외에도…….]
미르헨 총장은 문장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설명을 해 줬고 난 귀를 세우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복싱이라는 소재가 아르마이스 님의 차원에선 생소하면서도 가벼운 느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국 소설을 구성하는 건 문장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평범한 소재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를 질 좋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겁니다.]
“조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성 어린 피드백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설명을 들을수록 자신감이 점점 차올랐다.
일전에 우리나라의 한 유명 작가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이라는 소설로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던 적이 있다.
소설을 살펴보면 소위 일진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학생 하나가 학교를 어떻게 장악하는지 보여 준다. 당근과 채찍을 섞어 가며 친구들을 조련하고 못된 짓을 함에도 선생들의 신뢰를 얻는 과정은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도 바깥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이처럼 평범한 소재로 쓰인 소설도 문장력을 갖추고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면 문학성을 갖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나는 대로 이곳에 와서 아르마이스 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궁금한 사안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십시오. 그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생각에 잠긴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인사를 하고 나갔다.
‘한번 해 보자.’
화면이 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아카이브로 첨삭본을 실행한 뒤 소설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설명을 토대로 내가 쓴 글들을 분석하고 문장들을 하나하나 바꿔 갔다.
그렇게 난 작업에 몰입했고 이날도 새벽이 되도록 글을 쓰는 데 전념했다.
* *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복싱 체육관에 온 나는 테이핑을 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험이 끝난 만큼, 김준석 패거리를 주시하며 긴장된 마음으로 학교에 있었지만, 예상외로 별일은 일어나진 않았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석호가 퇴원한다고 한다. 분명 중상을 입은 줄 알았는데, 갈비뼈에 금이 간 것을 제외하면 예상보다 부상이 심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석호가 복귀하면 괴롭힘이 다시 시작될 것은 뻔했기 때문에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잡념을 털어 내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진우야, 혹시 사람을 때려 본 적 있어?”
백성철 관장은 팔짱을 낀 채, 질문을 던졌다.
“없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군.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야. 지금까지 네가 두들겼던 미트와 샌드백을 정욱이 얼굴로 바꾸기만 하면 되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경험이 아예 없으면 안 되겠지. 글러브랑 헤드기어 끼고 링 위로 올라와. 나랑 가볍게 스파링 한 번 하자.”
“관장님이랑요?”
백성철 관장은 180 중반에 달하는 키와 90kg의 몸무게를 지닌 중량급 복서였다.
20kg 가까이 차이나는 체중과 실력 차이를 감안하면 스파링을 한다는 거 자체가 어불 성설이었다.
나는 손을 흔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무리에요. 내일 스파링하기도 전에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요.”
“걱정하지 마라. 널 상대로 전력을 다할 마음은 없으니까. 뭐 해? 빨리 올라오지 않고.”
“네…….”
계속되는 채근에 난 힘없이 링 위로 올라갔다.
링에서 마주 본 백성철 관장님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스파링 중 맞기라도 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예감마저 들었다.
“야, 쫄지 말고 배운 대로 해. 어차피 오늘은 실전 감각을 올리는데 주안을 뒀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후우, 알겠습니다.”
“준비됐으면 시작해라.”
“예.”
대답과 동시에 난 스텝을 밟고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관장은 빠르게 날라오는 주먹을 피할 생각하지 않고 두 팔로 가드했다.
“어때? 미트 치기랑 크게 다르지 않지?”
“아, 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까지 배운 콤비네이션이랑 기술들 다 쏟아 내.”
“네, 관장님.”
백성철 관장이 급작스럽게 마련한 이 스파링은 사람 상대로 타격 경험이 부족한 날 위해 고안된 훈련이었다.
나는 아르마이스식 격기술과 관장으로부터 배운 복싱 기술들을 적절하게 섞으며 끊임없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관장님께서 중량급 복서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민첩한 몸놀림을 보인 탓에 한 대의 정타도 맞힐 수 없었다.
“뭐 해? 이래 가지고 내일 스파링 할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이후 스파링은 1시간 동안 계속됐고 땀으로 흠뻑 젖은 나는 녹초가 되어 링에서 내려왔다.
“역시, 스피드랑 기술은 흠잡을 데가 없어. 하지만 너에게는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백성철 관장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곧바로 피드백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