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20화 (20/122)

20. 5화 뜻밖의 전개 (4)

백성철 관장은 종이컵에 물을 따른 뒤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스피드, 기술만 살펴보면 정욱이와 당장 붙어도 손색이 없어. 하지만 상대를 압도하려는 기백이 부족해.”

“기백이요?”

“그래,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 강한 의지 말이야. 너가 예전에 그랬던가? 살면서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다고.”

“예, 맞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스파링에 임하기 전에 네 나름의 동기를 찾는 편이 좋을 거야. 정욱이는 나처럼 널 봐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여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야.”

“감사합니다, 관장님.”

약식이었지만, 첫 스파링을 마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글러브를 벗은 뒤 샤워를 하러 탈의실로 향했다.

“관장님, 잘하면 내일 일 내겠는데요?”

스파링을 묵묵히 지켜보던 박재엽 코치가 백성철 관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결과는 까 봐야겠지만, 오늘같이만 한다면 승산이 없다고 볼 순 없겠지.”

“기본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우니 힘만 더 키우면 전국체전에 보내도 되겠어요. 솔직히 지금 상태로 대회에 나가도 입상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박재엽 코치는 조금 전의 스파링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그 부분은 내일 스파링 결과를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야. 정욱이는 어때? 준비 잘하고 있어?”

“후, 말도 마요. 작년 전국체전 결승전 때보다 더 열심히 훈련하고 있어요. 이게 다 형님 때문이에요. 뭐 하러 애들끼리 싸움을 붙여서 이 사단을 만들어요.”

“훗, 나름대로 생각한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넌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

백성철 관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 * *

화요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 학교에 도착한 나는 오늘 있을 스파링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장님 말씀대로 무언가 동기가 필요했다.

그의 건방진 말투를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었지만, 감정에 몸을 맡길 순 없는 노릇.

상대는 전국체전 은메달리스트로서 말할 필요가 없는 강자였다. 두려움과 초조한 감정이 올라왔지만, 열심히 훈련한 성과를 시험해 볼 수 있다는 묘한 설렘도 공존했다.

이렇게 첫 스파링에 필요한 태도를 고민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교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벌컥.

“하, 씨발. 며칠 안 나왔다고 학교가 그립긴 처음이네.”

“어, 석호야. 벌써 퇴원했어?”

“금방 나와서 다행이다.”

“나 이석호야. 이깟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석호는 거칠게 교실 문을 열어젖힌 뒤 자신의 등장을 알렸고 그와 어울리던 무리들 중 몇몇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왔어? 간 김에 좀 더 쉬지. 뭐하러 빨리 왔어.”

“하하, 아니야 준석아. 덕분에 여태껏 잘 쉬었는데 뭘.”

그는 김준석이 말을 던지자 이전에 싸운 적이 없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지난주에 싸움이 있은 후, 이석호는 병원에 바로 입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준석이 입을 막기 위해 특실을 잡아 주고 비용까지 모두 다 대 줌으로써 이들 사이에 있던 불편한 일들을 모두 무마시켰다.

‘이해가 안 되네. 그렇게 두들겨 맞아 놓고선 다시 친구처럼 지내는 거야?’

내막을 모르는 나는 저들의 대화를 들으며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힘으로 유지되는 관계니까 자기들끼리의 속사정이 있겠지.

그런데 왜 나한테 오는 거지?

이석호는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다 날 발견하고 천천히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뭘 그렇게 쳐다봐.”

“…….”

어이가 없었다.

이석호가 아니라 누구라도 저렇게 호들갑을 떨며 반에 들어오면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괜시리 시비를 거는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꾹 참고 차분하게 대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번에 크게 다친 줄 알았는데, 건강하게 돌아온 것 같아서 다행이야.”

“참네, 이젠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누굴 걱정해? 하, 야 너 내가 X으로 보이냐?”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김준석을 비롯한 일진 무리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낀 나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너 좀 변했다?”

“응?”

“예전에는 눈도 못 쳐다보고 어버버했던 새끼가 갑자기 왜 이렇게 당당해? 너 뭘 잘못 먹었냐?”

이석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런 날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찐따가 변하든 말든 알 게 뭐야. 됐고, 너 소설은 쓰고 있어?”

“쓰고 있긴 한데, 시험도 막 끝나고 그래서 아직 다 못 썼어.”

애당초 쓸 생각이 없었지만,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하, 이 자식이 진짜 미쳤나. 준석이랑 애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최근에 시험 기간이라 소설은 생각도 못 했어.”

“맞네, 강진우 저 새끼가 쓴 글을 읽는 게 소소한 재미였는데,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되지.”

주변에 있던 양아치들은 나를 노려보며 이석호의 말에 동의했다.

“다들 그만하고 매점이나 가자. 저 녀석도 나름 작간데 시간을 줘야 할 거 아니야.”

김준석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 잠깐만 얘랑 이야기를 끝내고…….”

“아이 씨발, 그냥 가면 가는 거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미, 미안해 준석아.”

이석호는 나와 대화를 마저 하려 했지만, 김준석의 으름장에 금세 꼬리를 말았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굳이 이석호를 방해할 이유는 없었지만, 애들 앞에서 우열 관계를 보여 줄 필요를 느꼈기에 일부로 기를 죽인 것이었다.

“야, 강진우. 이틀 줄 테니까 애들 소설 읽을 수 있게 준비 잘해라.”

“응, 알겠어.”

김준석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 밖을 나가려다가 멈추고 나에게 말했다.

대답을 들은 그는 나를 노려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쓰읍, 저 새끼 아무래도 요즘 이상하단 말이야. 나중에 따로 봐야겠어.”

‘이틀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실을 빠져나가는 김준석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으스러질 듯이 강하게 쥐었다.

일진 무리들과 한 판 붙기 위해 그동안 준비를 열심히 해 왔다.

김준석을 상대하려면 단순히 싸움만 잘해서는 안 됐다.

국회 의원 아버지와 학교 운영 위원 활동을 하는 어머니를 둔 그를 이기려면 싸움에서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사후 처리도 잘해야 했다.

‘만약 이긴다 치더라도 학교가 분명 시끄러워질 거야.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여러모로 불리한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우의 수를 두고 철저히 대비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긴장이 되진 않았다.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와 수업은 시작됐고 교실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활기차게 학교생활에 임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내 마음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 * *

저녁 7시, 정선 체육관.

나는 김정욱과의 스파링에 앞서 관장과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팡팡!

백성철 관장은 여느 때처럼 미트 글러브를 끼고 패드웍을 진행했고 체육관에는 내가 만든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보니까 결심을 제대로 하고 왔는데?”

“그런가요?”

타격에 기백이 실리지 않았다며 걱정하던 관장은 내 태도에 변화를 느꼈는지 흡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에 특별한 일이 없던 나로서는 그의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랑 스파링 할 때랑 다르게 오늘 네 주먹에서는 상대를 부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아, 그렇군요.”

설명을 들은 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금일 오전에 김준석 패거리와 붙기로 마음을 먹은 뒤로 내 마음가짐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훈련을 통해 실력을 올리는 데만 신경 썼다면 지금은 다가올 싸움에 온 집중을 다 하고 있었다.

“오, 몸놀림이 가벼워 보이는데 기대해도 되지? 내 스파링 상대가 너무 시시하면 보러 오는 사람들한테 너무 미안하잖아.”

김정욱은 몸풀기를 막 끝낸 나에게 다가와 도발성 멘트를 날렸다. 평소라면 점잖게 대꾸하고 지나갔겠지만, 스파링을 목전에 둔 나로서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행동보단 말이 앞서시네요. 스파링을 떠나서 경력에 맞는 언행을 보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새끼가…….”

내가 받아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그는 이를 꽉 깨물며 나를 노려봤다.

“저번에 그냥 넘어갔다고 이젠 아주 맞먹으려 드네? 스파링할 때도 관장님이 널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냐?”

“관장님이 안 말리셨다면 지난 주말에 이미 붙었겠죠. 그럼 전 스파링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스트레칭을 하러 자리를 떴다.

“오늘 반드시 죽인다…….”

김정욱은 멀어져 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들어온 이후, 관장님의 관심을 빼앗긴 게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다. 녀석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관장님과 함께 스파링 전략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놈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스파링이 시작되면 바로 달려들겠군. 진우야, 너는 정욱이 페이스에 휘말리지 말고 빠르게 원투 꽂고 사이드로 빠지면서 틈을 노려 그러다 보면…….”

백성철 관장은 5분가량 스파링에 임할 때 필요한 전략을 설명했다.

그리고 시간이 임박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체육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새로운 관원이랑 정욱이랑 붙는다면서? 간도 크지.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체육관 에이스를 어떻게 이기려고.”

“야, 승부는 까 봐야 아는 거야. 너 쟤 미트 치는 거 못 봤지? 폼만 보면 웬만한 선수보다 나아 보였어.”

관장과 코치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관원들은 이번 승부에 대해 설왕설래하며 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주목해 주세요!”

백성철 관장은 왁자지껄 떠드는 관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시끄러웠던 체육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단순한 스파링이 이렇게 관심을 끌다니 참 신기하네요. 물론 우리 체육관 간판 정욱이와 복싱 경력 한 달도 안 된 초심자의 대결이니 그냥 지나치긴 어려웠을 테지만 말이에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는 스파링이라고 알려 줬지만, 상호 간에 전력으로 임할 것을 고려하면 시합으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진우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걱정이지만 스파링은 2분 3라운드로 진행하겠습니다. 심판은 여기 박재엽 코치가 맡을 거니까 참고하세요.”

보통의 스파링이라면 서로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기에 심판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욱이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심판을 배정하게 됐다.

할 말을 마친 백성철 관장은 링에서 내려 왔고 박재엽 코치는 자연스럽게 진행을 이어받았다.

“양 선수 준비됐으면 링으로 올라오세요.”

나와 김정욱은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착용한 뒤 링 위에 마주 섰다.

“사소한 다툼이 있었지만, 복싱은 싸움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마라.”

박재엽 코치는 혹시나 모를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나와 김정욱을 번갈아 보며 조언을 했다. 그러나 이미 시합 모드에 들어간 우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코너로 온 나는 코치의 수신호를 기다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와 주먹을 섞는 순간이 나에게 온 것이다.

하지만 이 두근거림은 단순히 긴장으로 보긴 어려웠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다져진 내 육체는 기량을 뽐내고 싶다는 듯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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