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21화 (21/122)

21. 5화 뜻밖의 전개 (5)

“각 라운드는 2분씩 진행하고 중간 휴식 시간은 30초니까 참고하길 바란다. 뭐 궁금하거나 질문할 게 있으면 지금 물어봐.”

링 중앙에 선 박재엽 코치는 나와 김정욱을 번갈아 보며 물었지만, 우리는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훗, 보니까 다들 준비가 끝난 거 같네. 그럼 시작해라.”

그가 팔을 위로 올림과 동시에 시합이 개시되었다.

나는 왼 주먹을 턱에 붙이고 스텝을 밟으며 탐색전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김정욱은 스파링을 빨리 끝내고 싶었는지 눈을 부릅뜨고 그대로 나에게 대쉬했다.

김정욱은 가드를 바짝 올린 뒤 어깨로 나를 링 구석까지 몰아넣었다.

퇴로를 모두 차단한 것을 확인하자 그의 손에서 훅, 잽, 스트레이트 다양한 기술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난 팔을 잽싸게 움직이며 큰 펀치를 방어하는 데 집중했고 가드가 닿지 않는 공격은 링의 반동을 이용한 스웨이 기술로 피해냈다.

“오, 초반부터 난타전인가?”

“아무리 관장님이 인정한 천재라지만, 저렇게 몰아붙이면 순식간에 끝나겠는데?”

“훗, 승부는 끝까지 지켜봐야 아는 법이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논평하는 것을 들은 백성철 관장은 코웃음을 치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반박했다.

“저 친구 얼굴 좀 봐 봐요. 공격을 막느라 여유가 없어 보이잖아요.”

“네 눈에는 진우 얼굴만 보이는 모양이구나. 너 정욱이가 저런 표정 짓는 걸 본 적 있어?”

백성철 관장은 씨익 웃으며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뭐야? 정욱이가 왜 이렇게 지쳐 보이지?”

한 관원이 관장의 이야기를 듣고 김정욱의 얼굴을 관찰한 뒤에 입을 열었다.

일방적인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던 스파링은 어느새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링 구석에 몰려 있던 나는 김정욱이 계속된 난타로 인해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눈치채고 견제 잽을 가볍게 날려 준 뒤에 사이드 스텝을 밟았다.

“헉, 헉. 새끼 잔재주가 제법인데?”

김정욱은 링 중앙에 서 있는 나를 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는 아까와 달리 급하게 경기를 풀어 나갈 생각은 버리고 체력을 다시 끌어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나로서는 쉴 틈을 줄 이유는 없었다.

상대가 트래쉬 토크를 하며 날 자극했지만, 난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안면과 복부에 잽, 스트레이트 원투를 날렸다.

“윽…….”

온 힘을 실은 강력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날라오는 견제 잽에 김정욱은 신경이 거슬렸다.

‘씨발, 어떤 펀치가 들어올지 눈에 다 보이는데, 막지를 못하겠어.’

초반 1분에 너무 많은 체력을 쏟아부은 탓에 김정욱은 잽잽 스트레이트가 반복되는 단순한 패턴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땡!

“스탑! 양 선수 모두 코너로 돌아가.”

종소리가 울리자 박재엽 코치는 붙어있던 우리 둘을 떼어내며 1라운드 종료를 알렸다.

“야, 어때 해 보니까 할 만하지?”

“후우, 정신이 없긴 하지만 생각했던 거보단 어렵지 않네요.”

백성철 코치는 코너에 서 있는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누가 가르쳤는데, 당연하지. 그래서 언제 끝낼 거야?”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3라운드까지는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네 딴에 예의를 지킨다고 하는 모양인데, 이번 시합에서 네가 봐준 걸 알면 저 녀석 성격상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다.”

“흠…….”

전국체전 은메달리스트를 두고 빨리 끝내라는 말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인간 샌드백 미션을 마친 이후 민첩성과 동체 시력이 큰 폭으로 향상된 나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일반 관원들이 볼 땐, 초반에 내가 두들겨 맞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만, 정타는 하나도 안 맞은 상태였고 간간이 결정타가 들어올 때면 복싱 스텝과 아르마이스식 회피 기술을 사용하여 모두 피해내고 있었다.

‘저 개새끼가 또 관장이랑 붙어서 놀고 있네?’

김정욱은 홀로 코너에 서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욱아, 2라운드 때부터는 전력으로 해야 할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진우가 보통 놈이 아니야.”

이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박재엽 코치는 중앙에 서 있다 말고 다가와 말을 건넸지만, 김정욱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코치님까지 절 무시하는 거예요? 설마, 저런 놈한테 제가 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후, 난 모르겠다. 시간 다 됐으니까 대기하고 있어.”

박재엽 코치는 김정욱의 태도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는 잠시 멍하니 중앙에 서 있다가 휴식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내 기량이 김정욱에게 통한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이전 라운드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예의를 갖추려고 실력을 아끼는 건 상대에 대한 모욕일 거야.’

관장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집중력을 끌어올리려던 그때, 김정욱이 스텝을 밟고 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빛에는 1라운드 때 느껴졌던 방심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고 기어를 잔뜩 올린 탓에 이전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와, 1라운드 때보다 더 빨라졌네?”

“아까는 방심해서 당했다지만, 지금부터는 조금 다르겠어.”

“신입이 이번에는 고생을 좀 하겠는데?”

관원들은 김정욱의 본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을 갖고 지켜봤다.

그러나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과 달리 백성철 관장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훅훅훅

김정욱의 동작 하나하나는 1라운드 때보다 훨씬 간결해졌고 스피드와 파워도 붙어 링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동체 시력이 크게 향상된 덕분에 그의 주먹이 어디로 날라올지 훤히 보였다.

“헉, 헉 쥐새끼 같은 새끼. 씨발 너도 남자라면 제대로 붙어 보자.”

“경기 중에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이번에는 경고를 끝나겠지만,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몰수패를 선언할 거다.”

김정욱은 혼신의 힘을 담은 공격들이 번번이 벗어나자 약이 잔뜩 오른 표정을 지으며 욕설을 내뱉었고 박재엽 코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의를 줬다.

관원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김정욱과 달리 내 마음은 잔잔한 물처럼 평온했다.

현자의 눈을 개안한 이후 통찰력이 큰 폭으로 향상된 나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경기 중에 고안한 전략을 슬슬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트.”

구두 경고를 마친 박재엽 코치는 시합을 재개했고 나는 1라운드 때 썼던 원투 스트레이트 패턴을 다시 활용했다.

‘노림수가 있는 게 분명해. 멍청한 새끼, 경력자를 상대로 뻔한 수를 준비해 오다니. 잘됐어. 이번 기회에 맛 좀 보여 줘야지.’

김정욱은 안면과 복부로 들어오는 펀치를 방어하며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2라운드가 40초밖에 안 남은 시점, 관원들은 똑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볼멘소리를 내고 있었다.

“실력은 있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거야. 설마 원투 하나만 가지고 정욱이를 이기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하, 난 모르겠고 너무 지루하다. 차라리 초반에 근접전이 훨씬 재밌었어.”

“다운! 원, 투, 쓰리, 포…….”

사람들이 내 경기 운영을 두고 설왕설래하던 그때, 박재엽 코치는 바닥에 쓰러진 김정욱을 보며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와, 수 싸움 지린다.”

잡담하지 않고 시합을 지켜보던 관원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다운까지의 과정은 이랬다.

원투로 본인을 방심시킨 다음 결정타를 날릴 거라고 생각한 김정욱은 일부로 안면을 열어 허점을 노출 시킨 후 카운터를 날리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예상대로 내가 어퍼컷을 날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운터성 훅을 날렸다.

하지만, 애당초 처음 전략을 짤 때부터 이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나는 가드를 올려 훅을 방어한 뒤 김정욱의 안면에 왼손 스트레이트를 꽂는 데 성공했다.

“일곱, 여덟, 아홉…….”

“자, 잠시만요. 할 수 있습니다.”

“정욱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박재엽 코치는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노력하는 제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김정욱은 고개를 내저으며 경기를 재개할 것을 요청했다.

“코치님 진짜 괜찮습니다.”

“박 코치, 뭐 해 괜찮다잖아! 아직 20초 남았으니까 계속해. 상태 확인은 2라운드 끝나고 해도 늦지 않아.”

“휴, 알겠어. 대신 상태 봐서 시합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바로 중단시킬 거다.”

백성철 관장의 고함을 들은 코치는 한숨을 쉬며 말했고 김정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보였다.

‘바로 끝내자.’

박재엽 코치의 수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그대로 김정욱에게 돌진했다.

“헉.”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내 모습에 당황한 김정욱은 황급히 팔을 움직이며 공격을 막아 보려 했지만, 빠르게 들어오는 주먹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2라운드 내내 원투 패턴에 익숙해지다 보니, 다양한 각도로 들어오는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관장님.”

박재엽 코치는 백성철 관장을 쳐다보며 시합을 끝낼 것을 시사했다.

“응, 내가 봐도 그러네. 오늘 스파링은 여기까지 하자.”

백성철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쓰러진 김정욱을 살피기 위해 링 안으로 들어왔다.

“정욱아, 괜찮아?”

“…….”

복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김정욱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이길 거라 확신하고 친한 관원들을 부르는 등 온갖 잡스러운 행동은 다 하고 다녔지만, 막상 스파링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후, 됐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나누자.”

관장은 넋 놓고 멍하니 있는 제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김정욱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 오늘 승부에 진 것보다 관장님이 저 녀석을 감싸고 도는 게 더 기분이 나쁩니다. 오늘 스파링도 그렇습니다. 만약 관장님께서 저를 전담하셨다면 결과는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김정욱은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에서 서운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흠,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네가 한 발짝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관원들 앞에서 신입 관원에게 개쪽당하길 바라셨단 말씀은 아니겠죠?”

“못난 놈. 가서 샤워하고 집에 들어가라.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다.”

백성철 관장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김정욱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본인의 재능을 뛰어넘는 인재를 마주쳤을 때의 환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남들보다 배 이상 뛰어난 습득 능력과 타고난 강심장을 가진 김정욱은 그의 예상대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정선 체육관의 에이스로 인정받은 순간부터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주변의 인정은 꿀과 같이 달콤하지만,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관장은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딴 이후로 힘자랑을 일삼는 애제자가 못마땅했고 나를 통해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후, 됐습니다. 내일부터 체육관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이런 스승의 마음을 모르는 김정욱은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벗으며 차갑게 말했다.

“야, 임마! 너 이렇게 옹졸한 놈이었어?”

대화를 차분하게 듣고 있던 박재엽 코치는 호통을 쳤지만, 백성철 관장은 그를 제지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오늘 패배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잘 안다. 감정 추스르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하지만 만약, 한 번만 더 나가겠다는 소리를 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다.”

관장은 오기에 가득 찬 얼굴을 한 김정욱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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