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22화 (22/122)

22. 5화 뜻밖의 전개 (6)

“훗, 솔직히 저 아니었으면 다른 관장들 앞에서 얼굴도 못 들으셨을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참 웃기네요.”

백성철 관장이 말을 번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욱은 끝까지 버릇없게 굴었다.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듣던 박재엽 코치가 그의 멱살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너 일로 와.”

“이, 이거 놓으세요.”

코치는 김정욱을 질질 끌어서 링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백성철 관장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재엽아, 그냥 보내 줘라.”

“저도 이놈을 체육관에서 계속 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버르장머리는 꼭 고쳐 줘야겠어요.”

이전부터 계속된 무례한 발언에도 화를 참아 왔던 박재엽 코치는 체육관을 나가겠다는 말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됐어. 떡잎부터 틀려먹은 놈이야. 손 놓고 다른 관원들 지도에나 신경 써.”

“형님, 이번만큼은 저도 양보 못 하겠습니다.”

“재엽아!”

“하아, 알겠습니다. 야.”

“네, 코치님…….”

손에서 느껴지는 완력에 기가 죽은 김정욱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형님과 난 너를 챔피언으로 키우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진우한테 관심을 뺏겨 기분이 상한 건 이해하지만, 작년 전국체전 이후 복싱에 대해 진지하게 임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크윽…… 저보고 어쩌란 말이에요! 씨발, 됐어. 관두면 그만이야.”

김정욱은 멱살이 풀리자마자 소리를 냅다 지르고 짐을 챙겼다. 코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뒤 그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김정욱은 이미 체육관을 빠져나간 뒤였고 시끌벅적하던 체육관엔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짝짝!

“잠깐 소란이 있었는데, 신경 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5분 휴식 후에 정상적으로 운동을 진행할 테니까 다들 몸 좀 풀고 계세요.”

백성철 관장은 손뼉을 치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켰고 관원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스트레칭을 하며 운동할 준비를 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챔피언을 길러내는 것이 꿈이었던 관장의 입장에선 전국체전 은메달리스트인 김정욱을 잃은 건 뼈아픈 손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관장님…….”

“어, 진우야. 몸은 좀 괜찮아?”

“아까 보셨잖아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합니다.”

“자식 센 척은, 아까 보니까 코너에 몰려서 두들겨 맞더만. 내일부터 다시 특훈이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

염려했던 것과 달리 관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괜히 저 때문에 김정욱 선배가 체육관을 그만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네요.”

“아깝긴 하지. 이번 전국체전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인 놈이었는데. 후…… 열심히만 하면 국내 챔피언은 너끈했을 거야.”

“죄송합니다, 적당히 한다는 게, 힘 조절을 못 했습니다.”

오락가락하는 관장의 태도에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어찌 됐든 나 때문에 유망주를 잃은 건 사실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체육관으로서는 큰 손실을 입은 건 사실이었고 나와 간접적으로 연관이 됐기에 고개를 연신 숙이며 미안한 감정을 표현했다.

“풋, 힘 조절은 무슨. 이번 기회에 저 녀석 정신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는데, 다 헛수고였지 뭐야. 그것보다 훈련의 성과를 느낀 소감이 어때?”

“단순 미트 훈련으로 선배를 이길 수 있을까, 의심했던 적도 있지만, 막상 해보니까 관장님의 지도가 얼마나 훌륭한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하하, 정욱이한테 욕먹으면서 키운 보람이 있구나. 어때 앞으로도 나랑 쭉 함께해 볼 테냐?”

장난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던 백성철 관장은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대답을 신중히 해야겠는데?’

그가 농담과 진담을 넘나들며 이야기한다는 것을 아는 난 섣불리 답변을 내놓을 수 없었다. 만약 제안을 수락하면, 김정욱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수로 데뷔하기를 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조금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렇구나…….”

“관장님. 앞으로 훈련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너무 급작스러워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관장이 턱에 손을 올리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난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해명했다.

귀찮은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일상과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단호히 거절해야 했기에 애매모호한 답변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말하는 걸 보니까 짐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솔직히 이야기하마. 난 네가 복싱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절대 정욱이 빈자리를 채우라는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고.”

“아, 네.”

“믿거나 말거나지만, 정욱이는 내가 조만간 내보낼 생각이었어.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스타병에 걸려서 주변 관원들에게도 해로웠거든. 말이 길어져 봤자 너에게 부담만 될 거 같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감사합니다, 관장님.”

나는 꾸벅 인사를 한 후 샤워실로 향했다.

스파링이 끝난 지 꽤 됐음에도 전신의 근육은 여전히 긴장된 상태였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주먹을 섞었고 심지어 승리했다.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강자를 상대로 말이다.

난 관장님의 제안은 어느새 잊어버린 채 인생 첫 승리의 달콤함을 즐기고 있었다.

* * *

수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학교에 일찍 도착한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김준석은 내일까지 야한 소설을 써서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난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1도 없었고 더 나아가 다시는 날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할 작정이었다.

이 말은 즉, 내일이 그토록 기다렸던 d-day라는 이야기였다.

패거리들과 어떤 식으로 맞붙게 될지 다양한 시나리오를 떠올리던 나는 눈앞에 뜬 창을 보고 크게 놀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목표를 설정합니다.>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김준석의 괴롭힘에서 벗어나십시오.>

<보상: 매력 레벨 상승, 정신력 레벨 상승>

‘아니 이 시점에 미션이 생성된다고?’

예상치 못한 시점에 뜬 미션 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상대를 쓰러뜨리고 보상까지 함께 얻으면 일거양득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잠시 후, 김준석과 이석호를 포함한 패거리들이 줄지어 등장했고 교실은 여느 때처럼 저들의 음담패설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제, 만난 여자애들 죽이지 않았어?”

“야, 죽긴 뭘 죽어. 나랑 둘이 있을 때 어찌나 비싼 척하던지, 폰 번호도 못 물어봤다니까.”

“새끼야, 그건 네가 못생겨서 그런 거야. 준석이는 어제 가만히 있었는데 여자애들이 먼저 번호 따 갔다드라.”

박준태는 쌍둥이 동생 박준용을 보며 타박했다.

“미친놈, 너랑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누굴 보고 못생겼다고 하는 거야.”

“스타일이 다르잖아. 스타일이~ 나중에 내가 코치해 줄 테니까 잘 보고 배워. 그건 그렇고 준석이는 진짜 대단해. 인물도 좋지, 공부도 잘하지.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니까.”

“훗,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해. 혹시 알아? 계속 따라다니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지 말이야.”

김준석은 박준태의 아부가 마음에 드는지 씨익 웃으며 거만을 떨었다.

그렇게 한참을 미팅에 관한 이야기로 설왕설래하던 이들은 교실밖에 서 있는 한 여자애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진우야, 잠깐만 나와줄 수 있어?”

‘아, 맞다. 채원이가 이번 주에 우리 반에 놀러 온다고 했지.’

약간의 시끄러움을 제하면 나름 편안했던 내 마음은 연속된 돌발 사건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다.

‘아까 미션이 왜 떴는지 알겠네. 시스템은 채원이가 교실에 올 것을 알고 있던 거야.’

우리 학교 최고 미녀이자 스타 작가인 윤채원은 모든 남학생들의 로망이었고 김준석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보러 교실에 온 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내가 윤채원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시비를 걸 거라는 것은 자명했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진우야.”

“어, 어 미안. 잠깐 뭣 좀 하고 있어서 금방 갈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왁자지껄 떠들던 녀석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윤채원이 강진우 저 찐따를 만나러 직접 여길 온 거야?”

“씨발, 이게 말이 돼? 내가 볼 땐 윤채원이 다른 사람하고 착각한 게 분명해.”

일진 무리 중 하나가 눈을 비비며 현실을 애써 부정했다.

‘오호,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는데?’

김준석은 자신은 말도 붙이지 못한 그녀가 강진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해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들었다. 그는 훼방을 놓기보단 상황을 우선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풋, 내가 와서 많이 놀랐어?”

윤채원은 허둥지둥 대는 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아, 아니야. 저번에 가볍게 이야기해서 진짜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난 했던 말은 지키는 사람이야. 이틀 후면 소설 제출해야 하는데, 잘 쓰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어.”

“너랑 이야기한 뒤로 틈틈이 쓴 덕분에 곧 완성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녀가 소설 이야기를 꺼내자 긴장했던 마음은 서서히 풀렸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와, 확실히 재능이 있나 보네. 금요일까지만 해도 초안 잡는 중이었잖아.”

“나한테 익숙한 소재로 글을 쓰다 보니까 생각보다 빨리 써지더라고.”

“혹시 제목은 정했어?”

“응, 며칠 고심하다가 플레임으로 정했어.”

“플레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불꽃이라는 뜻인데, 한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운동을 찾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거든. 그 과정이 불꽃처럼 치열하고 찬란하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어.”

나와 윤채원은 각자가 쓴 소설을 두고 서로 피드백을 해 주는 등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곁으로 김준석이 불쑥 다가오더니 말을 걸어왔다.

“진우야, 채원이랑 소설 이야기하고 있나 보네.”

“어…….”

불청객의 등장에 내 얼굴은 금세 굳어 버렸다. 그러자 김준석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어 갔다.

“이야, 어쩐지 소설 쓰는 솜씨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 재능을 채원이도 눈치챘나 봐?”

“진우야, 너 따로 쓰는 소설 있어?”

“…….”

윤채원은 김준석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고 나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친해진 그녀에게 야한 소설을 쓴다는 걸 들키면 정말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김준석을 보면 긴장되긴 했지만,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난 어깨에 걸쳐진 그의 팔을 밀어내며 말했다.

“준석이가 하도 써 달라고 애원해서 어쩔 수 없이 쓴 게 있긴 한데 별로 중요하진 않아.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왔어?”

“하아…… 그래. 별로 중요하진 않지.”

김준석은 순간적으로 살기 어린 눈빛을 나에게 보냈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따지고 보면 시답지 않은 소설이지만, 우리 남자의 가슴을 뜨겁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지. 안 그래 진우야?”

“뭘 썼길래 저렇게 호들갑이야 진우야?”

“아 그게…….”

화가 났다.

처음으로 김준석에게 두려움보다 분노의 감정이 앞서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와 한판 붙고 싶었지만, 채원이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야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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