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6화 전면전 (1)
“진우야, 이야기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 말해 줄까?”
김준석은 안절부절못하는 날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하면 나를 약 올릴 수 있을까 고민했고 윤채원은 이를 이상하게 바라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무슨 글을 썼길래 쟤가 저렇게 신이 난 거야?”
“응, 그게 사실…….”
“하아, 참 답답하네. 내가 말해 줄게.”
윤채원이 끝까지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자 화가 난 김준석은 폭로를 하기로 결심했다.
“강진우는 우리 반 남자애들을 위해 야한 소설을 쓰고 있어. 필력이 좋아서 아주 인기도 많아. 대신 반 여자애들한테는 변태 취급을 받지만 말이야. 이제까지 썼던 거 잘 모아 놨지? 나중에 기회 되면 채원이한테도 보여 줘.”
“…….”
부끄러웠다.
비록 자의로 쓴 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상대의 힘에 눌려 원치 않는 글을 썼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때, 윤채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넌 아까부터 누군데 여기 와서 이러는 거야?”
“뭐 뭐라고?”
학교에서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던 김준석은 자신을 모른다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야한 소설을 쓴 게 뭐 어때서 그래? 웹소설 사이트 가 보면 성인 웹소설 쓰는 작가들 엄청 많아. 그리고 들어 보니까 진우가 쓰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자꾸 왜 괴롭히는 거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 주는 거잖아. 난 그냥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거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자존심이 상한 김준석은 목소리를 높이며 항변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답변뿐이었다.
“난 널 알고 싶지도 않고 친해질 마음도 없으니까 그만 자리로 돌아가 줘.”
“하아, 어이가 없네.”
“진우야, 얘랑 있지 말고 저쪽 가서 이야기하자.”
“응, 알았어.”
윤채원은 한숨을 쉬며 건들거리는 김준석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강진우, 교실에 그냥 찌그러져 있어라.”
“내가 왜?”
그녀가 야한 소설 쓴 것을 개의치 않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모든 부담을 벗어 던진 상태였다. 난 이전과 달리 김준석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는 눈을 부라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깝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씨발 새끼가 계속 봐주니까 밑도 끝도 없이 개기네?”
“너야말로 헛소리 그만하고 자리로 돌아가. 그리고 이야기 나온 김에 말해야겠다. 앞으로 야한 소설 쓸 생각은 없으니까 원하면 직접 결제해서 읽어.”
“죽고 싶냐?”
계속되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자 김준석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천천히 다가오려 했다.
어제 스파링의 영향이었을까, 그가 살기를 피워 내며 날 공격하려 했지만,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탯을 직접 볼 순 없었지만, 현자의 눈으로 인해 예리해진 직감은 내가 그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단지 고민되는 게 있다면 바로 옆에 채원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앞에서 김준석과 주먹을 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너, 이제 보니까 완전 깡패구나?”
“뭐?!”
윤채원은 가까이 다가오는 김준석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나한테 깡패라고 했냐?”
“깡패라고 하니까 화나니? 그럼 양아치라고 해야 하나?”
“하아, 내가 여자라고 봐줄 줄 아냐?”
김준석은 이를 꽉 깨물며 윤채원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풀고 너스레를 떨었다.
“후우, 됐다. 대화마저 해라. 강진우, 넌 좀 이따 보자.”
“좋아.”
“풋, 끝까지 센 척하기는 이석호 때처럼 중간에 멈추는 일은 없을 테니까 기대해라.”
그는 당당한 나의 태도의 코웃음을 치고는 반으로 돌아갔다.
이상했다.
보통 때라면 윤채원이 있든 없든 나에게 바로 주먹을 날려야 정상이었지만,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윤채원, 저년만 아니었으면 바로 박살을 내는 건데.’
쾅!
자리로 돌아온 김준석은 책상을 내리치며 생각했다.
그가 우리를 함부로 건들지 못한 이유는 윤채원이 갖고 있는 배경 때문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성문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 하나뿐인 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아무리 아버지가 국회 의원이더라도 그녀를 건들면 수습하기 어려웠기에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진우야, 혹시 쟤가 널 많이 괴롭혀? 내가 도와줄까?”
윤채원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가진 배경이라면 김준석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발생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열심히 훈련 이유도 모두 그걸 위해서였으니까.
“하하, 괜찮아.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채원아, 곧 아침 조회 시간이다. 오늘 이렇게 와 줘서 고맙고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흠, 그래 알겠어. 그럼 잠깐 핸드폰 좀 줄래?”
“응.”
대답과 동시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윤채원은 자연스럽게 이를 낚아챘다.
“번호 저장해 뒀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넌 모르겠지만, 쟤네 엄마가 극성스럽기로 유명하거든.”
그녀는 김준석과 말을 섞기 싫어서 모르는 척했을 뿐, 사실 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고마워 채원아.”
“고맙긴, 어서 들어가. 나중에 또 보자.”
윤채원은 손을 흔들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떴고, 난 곧바로 반으로 돌아왔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반으로 들어가자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1학년이지만, 3학년 선배들도 건들지 못하는 김준석과 맞서고 성문고등학교 최고 미녀인 윤채원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에 학우들은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뭐가 이렇게 조용해?’
조회까지 아직 3분 정도 남았기에 교실은 시끄러워야 정상이었지만, 김준석의 심기가 불편했기에 다들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강진우. 오늘 수업 끝나면 따라와라.”
이석호는 손으로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나? 그냥 좀 있다 점심시간에 보자. 나도 마침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거든.”
“푸핫, 이 찐따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야, 일어나 봐. 어? 이것 봐라?”
망설임 없이 벌떡 일어나는 내 모습에 이석호는 순간 당황했다. 그런데 그때, 담임이 반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다. 애들아. 거기 둘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쳇, 좀 이따 보자.”
이석호는 자리에 앉는 그 순간까지 날 노려보며 살기등등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이들과 붙기로 마음을 먹은 나는 거리낄 게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사이사이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녀석들은 날 건드리지 않았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있는데, 박준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야, 준석이가 10분 뒤에 강당 뒤로 오래.”
“후, 그냥 지금 바로 가자.”
“어, 어. 그래. 쓰읍, 제가 갑자기 왜 저러지?”
박준태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 *
강당 뒤에는 화단을 따라 조성된 길쭉한 공터가 있었다.
일진 무리는 한쪽에 모여 있었고 난 이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와 저 새끼,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진짜 왔네?”
“내 말이 맞지? 며칠 전부터 저놈 눈빛이 이상했다니까? 역시, 내 촉이 맞았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이석호와 달리 김준석은 내가 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바쁜데, 왜 불렀어?”
“아나, 이 새끼가 미쳤나.”
쌍둥이 형제 중 동생인 박준용은 퉁명스러운 내 태도에 화가 났는지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걸어왔다.
“김준석, 그냥 나랑 1대1로 붙자. 나한테 용건 있는 건 너 아니었어?”
“훗, 네깟 놈 상대하는데 왜 내가 나서냐? 조금만 기다려. 네가 말 안 해도 제대로 만져 줄 테니까.”
김준석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너 같은 X밥은 나로도 충분해.”
박준용은 김준석과 대화를 하고 있는 나에게 기습적으로 펀치를 날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살짝 놀라긴 했지만, 눈에 보이는 뻔한 주먹을 맞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펀치를 퍼부어 댔지만, 내 옷깃도 스치지 못했고 급기야 날 붙잡기 위해 하단 태클을 시도했다.
퍼억!
나는 허리를 숙여 두 다리로 팔을 뻗는 박준용에게 카운터 훅을 날렸고 잠시 후, 커다란 타격음이 공터 주변에 울려 퍼졌다.
“어, 씨발. 저게 뭐야?”
박준태는 동생의 허우적대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난 충격으로 인해 비틀거리는 박준용의 어깨를 잡은 뒤 오른발로 그의 발목을 쓸어내렸다.
쿠웅!
“김준석, 그냥 네가 바로 오라니까? 이석호는 어차피 부상 때문에 싸우지도 못하잖아.”
나는 발목 후리기로 박준용을 엎어뜨린 뒤 김준석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으윽…….”
“박준태, 와서 네 동생 데려가라.”
내 말을 들은 박준태는 급히 동생을 부추겼다.
이 광경을 본 이석호는 안타까운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싸움에 진 것도 쪽팔리는데 찐따가 시킨다고 그대로 하네. 준석아 그냥 내가 나설게.”
“괜찮겠어? 완쾌된 것도 아니잖아.”
“상관없어. 저놈 정도는 팔 한 짝 없어도 가뿐하다고.”
이석호는 팔을 빙빙 돌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신중하게 행동해. 부상자라고 봐줄 생각 없으니까.”
“씨발, 어이가 없어서. 복싱 좀 한 것 같은데 어디 유도 선수 앞에서 허세를 부려.”
“헛소리 그만하고 할 거면 앞으로 나와라.”
운동을 해 본 경험 때문에 확실히 다른 애들보다는 눈썰미가 있었다.
180을 훌쩍 넘는 키에 유도로 다져진 신체는 위압감이 흘러넘쳤지만,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잠시 후, 이석호는 팔을 걷어붙이고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난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차분히 상대를 응시했다.
“깔딱대지만 말고 들어와 봐, 새끼야!”
내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고 판단한 이석호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복싱을 베이스로 유도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건 많이 불리했지만,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없던 나는 그대로 대시했다.
“넌 죽었어. 헉, 으윽…….”
가벼운 잽을 안면으로 받아 낸 이석호는 내 옷깃을 잡고 그대로 엎어뜨리려 했지만, 복부에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김준석, 그만 재고 빨리 나와라.”
아무리 맷집이 좋은 이석호라고 하지만, 갈비뼈 부상이 있는 상태에서 날 상대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퍼억!
난 배를 움켜잡고 신음하는 이석호의 얼굴을 걷어찬 뒤, 김준석을 쳐다봤다.
“오,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자세만큼은 칭찬할 만한데?”
김준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이유 있는 객기였어. 오랜만에 제대로 몸 좀 풀어 보겠네.”
그는 왼발을 지면에 붙였다 뗐다 하며 무에타이 자세를 취했다.
복싱을 베이스로 한 상대에게 킥 공격과 클린치 싸움이 훌륭한 대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준석이도 여기서 털리면 어떻게 하지?”
“야, 너 못 들었어? 준석이는 운동 천재야. 복싱, 태권도부터 무에타이까지 못 하는 무술이 없다고.”
계속되는 패배로 불안감을 느끼는 놈도 있었지만, 이들이 김준석의 실력에 갖는 신뢰감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전 애들하고는 확실히 다르다.’
나는 떠들고 있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싸움에 돌입했다.
김준석은 가볍게 주먹을 날리다가 선제 로우킥을 날렸다.
부웅, 부웅.
그가 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묵직한 바람 소리가 발생했고 패거리들은 환호성을 질러 댔다.
“와, 씨발 저건 막아도 뼈가 다 부서지겠어.”
“내가 강진우였으면 바로 도망간다. 저 킥을 어떻게 막아.”
김준석 패거리들은 힘겹게 공격을 피해 내는 내 모습에 다시 기세가 올라왔다.
하지만 저들의 바람과 달리 내 마음은 평온했고, 눈앞에 서 있는 상대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