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24화 (24/122)

24. 6화 전면전 (2)

‘김정욱 선배랑 미리 스파링 해 보길 잘했어.’

김준석은 힘과 속도 면에서 김정욱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김준석 쪽의 공격 옵션이 더 다양하달까? 전문 선수로 활동하지 않는 일반인이 전국체전 메달리스트와 같은 운동 능력을 가졌다는 건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이 있다.

두 주먹으로 카산트 대륙을 평정했던 최강의 격투술.

과거 이세계 사람들은 현존하는 무술 간에 교류 및 비교 분석을 진행한 바가 있었다.

카산트 대륙의 격투가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무술이 최고라며 주장을 펼쳤지만, 오랜 결론 끝에 으뜸으로 꼽힌 무술이 바로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이었다.

“복싱이 일반인을 상대로는 제법 효과적이긴 하지만, 킥이 허용되는 무술에는 쥐약이지.”

“그래서?”

김준석의 여유만만한 태도에 난 시큰둥한 태도로 맞받아쳤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어. 그럼, 단순 타박상으로 끝내 줄게. 하지만 만약에 끝까지 한다면 온몸의 뼈를 분리시킬 거야. 내가 이래 봐도 주짓수 퍼플 벨트거든.”

“죽어도 네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없을 거야. 개소리 그만하고 어서 덤벼.”

나는 손가락을 까닥대며 그를 도발했다.

“그래, 네가 순순히 무릎을 꿇을 애는 아니지. 안 그래도 이렇게 끝나 버리면 너무 시시하다는 생각이든 참이었어.”

말을 마친 김준석은 다시 무에타이 자세를 취하며 나를 노려봤다.

‘속도를 올리자.’

한 번의 공방으로 상대의 기량을 완전히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내 민첩성과 동체 시력이면 김준석을 상대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읍

호흡을 크게 들여 마신 나는 스텝을 밟으며 잽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림없지.”

김준석은 내가 팔을 뻗는 순간 로우킥을 시전했다.

퍼억!

뼈와 뼈끼리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엄청 아프겠다. 강진우도 이제 끝이네, 끝이야.”

“야, 근데 왜 준석이가 쩔뚝거리냐?”

“뭐? 진짜?”

애들의 예상과 달리 충돌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김준석이었다.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 그의 공격을 훤히 볼 수 있었던 나는 허벅지를 향하여 날라오는 김준석의 정강이에 무릎을 갖다 댔다.

하지만 정강이도 엄연한 뼈였고 숙련된 무에타이 수련자의 다리는 단련이 되어 있어서 그대로 부딪치는 건 리스크가 있었다. 따라서 난 뼈 바로 옆에 있는 정강이 근육을 겨냥하여 무릎을 갖다 댔고 김준석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데 성공했다.

“후우, 복싱에 이런 기술도 있었나?”

“네 발차기가 느리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이젠 내 쪽에서 갈 테니까 잘 방어해 봐.”

부상으로 인해 오른 다리가 봉쇄된 김준석이 이번 싸움에서 킥을 활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자신감이 생긴 난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서서히 그에게 다가갔다.

“너 같은 놈은 주먹만 사용해도 이길 수 있어.”

복싱을 배운 경험이 있는 김준석은 능숙하게 가드를 올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나 킥이라는 무기를 뺏긴 녀석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가드 사이로 훅을 날렸다.

퍼억!

“으윽…….”

김준석은 타고난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훅을 방어해 냈지만, 충격으로 인해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견제타를 날렸지만, 속도 면에서 우위를 확인한 나는 위빙으로 간단히 피해 냈다.

“씨, 씨발!”

힘껏 손을 뻗어 봤지만, 공격은 모두 무위에 그쳤고 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오른 다리에 부상을 입어 스텝을 밟을 수 없는 데다가 복싱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자 겁이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왜, 무섭냐?”

“닥쳐, 새끼야. 내가 너 따위한테…….”

퍽!

나는 김준석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앞 손 페인트를 준 뒤 어퍼컷을 날렸다.

턱을 정통으로 맞은 녀석은 얼굴이 젖혀졌고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헉, 헉. 날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 우리 부모님 알지? 만약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악!”

내 고교 시절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놈이 부모님을 운운하며 비겁한 모습을 보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느낀 나는 5분가량 구타를 이어 갔고, 녀석의 얼굴은 처참하게 변했다.

이석호와 박준용의 경우 부상이 생기지 않게 손속에 정을 뒀다면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든 김준석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팰 생각이었다.

“미, 미안하다. 제발 그만해.”

“뭐가 미안한데?”

“그동안 널 괴롭히고 힘들게 한 거 다 사과할게. 제발, 그만 때려…….”

쉴새 없이 맞은 김준석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고 있었다.

“너도 딱하다. 네가 이렇게 맞는데 친구들 중 나서는 애는 아무도 없네?”

“…….”

내 이야기를 들은 일진 무리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김준석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친구들을 보며 절망했다. 그러나 평소 사람을 힘으로 다루려 했던 그의 행실을 고려하면 어떤 불만도 제기할 수 없었다.

“김준석.”

“어, 어.”

기가 잔뜩 죽은 김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대답했다.

“엄마한테 이르든지 말든지 그런 건 상관 안 할게. 대신 앞으로 학교에서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 알았어?”

“아, 알겠어.”

두려움에 말을 더듬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런 놈한테 그동안 시달렸던가?

후련함과 허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구경 끝났으면 다들 들어가. 김준석은 챙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패거리들 중 몇몇이 쓰러져 있는 김준석을 부축이기 위해 움직였다. 난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싸움은 이겼지만, 사태가 모두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담임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이 나에게 책임을 물으려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기에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나는 착잡한 감정을 다스리며 향후 대책을 고민했다.

* * *

이후 모든 일은 내 예상대로 흘러갔다.

담임은 한쪽 다리를 절며 교실로 들어온 김준석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준석아. 이게 무슨 일이냐?”

“…….”

“너희들이라도 이야기해 봐. 누가 준석이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는 언성을 높이며 일진들을 추궁했다.

국회 의원 아버지와 운영 위원 어머니를 둔 김준석이 폭행을 당한 게 알려지면 책임자인 본인도 책임을 면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 강진우가 그랬습니다.”

김준석은 내 눈치를 보며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녀석이 여태껏 나한테 한 행동을 생각하면 괘씸했지만,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감 같은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진우, 어딨어? 강진우!”

“네, 저 여기 있어요.”

담임의 부름에 난 손을 들고 대답했다.

“이 자식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같은 반 친구를 이렇게 때려? 당장 상담실로 따라와.”

“네.”

거리낄 게 없던 나는 자연스럽게 담임과 함께 상담실로 들어갔다.

“너, 준석이 부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라? 네가 한 행동은 퇴학감이야 퇴학감!”

“김준석을 때린 게 잘못된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너, 반에서 부적절한 글을 쓰고 있다면서? 내가 오늘 당장 네 잘못을 샅샅이 적어 윗선에 보고하고 학폭위를 건의할 거다.”

‘후우, 학교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씁쓸했다.

고교 생활 내내 피해자로 살았던 내가 어느새 가해자로 둔갑되어 있었고 담임은 남은 여죄를 밝히기에 급급했다.

“그렇군요.”

“오, 끝까지 잘했다 이거지? 부모님한테 내일 당장 학교로 오시라고 해. 개망신 좀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담임은 오기가 가득한 눈빛을 쏘아 내며 악랄하게 굴었다.

사실 그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준석의 엄마는 남들 몰래 촌지를 제공하고 있었고 담임은 돈값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오버를 하는 것이었다.

“싫습니다.”

“하아, 이제 아주 막 가자는 거냐?”

“진상 조사도 없이 절 죄인 취급하시는 것도 모자라 바쁜 우리 부모님을 오라 가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이 씨, 자꾸 조사조사 그러는데, 네가 그럼 준석이를 폭행할 만한 정당한 사유라도 있다는 거냐?”

내가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말문이 막힌 담임은 역으로 질문했다.

“김준석은 그동안 저에게 야한 소설을 쓰도록 강요했고 빵과 음료수를 먹기 위해 부당한 심부름을 시키곤 했습니다. 제 돈을 갈취한 것은 물론이고요.”

“준석이 같은 부잣집 애가 삥을 뜯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내가 교직 생활을 17년 차라서 잘 아는데, 준석이처럼 모범적인 학생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반면에 넌 어떠냐? 이번 기말시험 채점해 보니까 아주 개판이던데?”

담임은 애당초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떨어진 내 성적을 비난하며 화제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풋, 성적 이야기를 하니까 입을 다무는구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너처럼 기본적인 부분이 부족한 아이는 말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법이야.”

“공부 좀 잘한다고 김준석이 모범생입니까? 한 학기 동안 지켜보셨으면 그런 말씀 못 하실 텐데요?”

“크흠, 야 임마. 어디서 건방지게 선생을 가르치러 들어!”

그는 양심이 찔렸는지 헛기침을 하며 궤변을 이어 갔다.

“준석이의 평소 언행을 떠올리면 선생님 말씀에 오류가 있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후우, 그래 네 말이 옳다고 치자. 근데 증거는 있어? 준석이는 너에게 폭행당한 흔적으로 가득한데, 넌 네 진술 외에 어떤 물증도 없잖아.”

“증거라면 차고 넘칩니다. 반에서 목격한 친구들도 있고…….”

“그런 애매한 거 말고 확실한 증거가 있냐고!”

담임은 이야기를 주도하기 위해 내 말을 끊고 계속 몰아붙였다.

“네,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번 보실래요.”

나는 대답과 동시에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핸드폰은 갑자기 왜?”

“들어 보세요.”

일진들과 싸우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김준석이 행패를 부릴 때면 몰래 녹음을 하거나 녹화를 해 왔다.

“강진우, 매점 가서 빵이랑 음료수 좀 사 와. 5분 줄 테니까 빨리 다녀와. 그리고…….”

핸드폰에서 김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담임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녹음 파일을 듣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됐으니까, 그만 꺼라.”

“네,”

“뭘 말 하고 싶은지는 잘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폭력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리고 상대의 동의 없이 촬영 및 녹화를 하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건 알고 있니?”

“휴, 선생님과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네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계속되는 궤변에 지친 나는 의자를 박차고 상담실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담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쯧쯧, 이렇게 해 봤자 너만 손해야, 진우야. 현명하게 행동해라.”

“현명하게 행동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선생님 같은데요?”

“뭐야?”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들 모두 녹음되었습니다. 파일은 메일로 막 보내는 중이라 핸드폰을 뺏어도 소용없을 거고요.”

“아, 아니 이놈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순진하게만 여겼던 나한테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파일을 인터넷에 올리면 꽤나 시끄럽겠는데요? 전 개인적으로 선생님이 난처해지시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현명하게 행동하세요.”

나는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담임을 잠깐 쳐다보다가 상담실을 빠져나갔다.

‘미션 창이 뜨지 않은 걸 보니, 해야 할 일이 남은 것 같네.’

싸움에서도 이기고 담임의 횡포를 벗어나는 데도 성공했지만, 미션이 완료됐다는 표시는 뜨지 않았다.

그러나 차후 계획이 모두 세워졌기에 마음은 물처럼 고요했다.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