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6화 전면전 (3)
집에 도착한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바탕 화면에 있는 폴더를 클릭했다.
‘학교에서 보낸 파일을 포함해서 한꺼번에 보내자.’
난 포스트잇에다 써 놓은 메일 주소에 김준석의 만행이 들어있는 파일들을 업로드한 다음 곧바로 전송했다.
작업을 마친 나는 김준석네 아버지인 김호섭 의원 사무실 연락처를 검색했다.
그가 학교에 손을 쓰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뜨르릉-뜨르릉
“전화 받았습니다.”
국회 의원 사무실이라고 해서 통화 중이거나 연락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전화를 받았다.
“혹시, 김호섭 의원님 사무실인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실까요?”
“의원님과 상의할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현재 의원님은 의회 활동으로 바쁘셔서 직접 통화는 불가능합니다. 민원 사항의 경우, 의원님 블로그에 있는 민원란에 의견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은 나를 지역구 주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의원님의 자제분과 관련된 거라 글로 남기기 조금 곤란할 것 같은데요.”
“어떤 걸 말씀하고 싶은 겁니까?”
“오늘 김준석한테 무슨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 누구야? 누구길래 의원님 아드님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있는 거지?”
내가 김준석의 이름을 언급하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남자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는 김준석과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강진우라고 합니다.”
“강진우? 설마 네가 준석이를 폭행한 놈이냐? 너 때문에 준석이가 얼마나 크게 다쳤는지 알아? 의원님께서 조만간 변호사를 선임해서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신다고 하셨어. 그리고 사모님께서 지금 교장 선생님과 학폭위를 논의 중이라고 하니까 꼼짝 말고 기다려라.”
남자는 김호섭 의원과 오랫동안 일한 측근 중 하나로 김준석과 그 가족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피해를 당한 것처럼 분개하며 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메일은 확인해 보셨어요?”
“메일? 무슨 메일?”
그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이메일이 쏟아지기에 내가 보낸 파일을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제 이름으로 파일들을 보내 뒀으니까 살펴보세요. 만약에 제 말을 무시한다면 언론사들과 인터넷 커뮤니티에 모든 자료를 유포할 생각이니까 빨리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흠, 알겠다.”
고등학생밖에 안 된 어린 녀석의 말을 듣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내 목소리에서 묘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는 것을 느낀 남자는 전화기 옆에 있는 컴퓨터를 켠 뒤 메일을 열어 보았다.
“이것들은…….”
“양이 워낙 많아서 다 듣지는 못하시겠지만,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이 가실 겁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잠깐만 기다려라. 의원님께 보고하고 다시 연락하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자는 짤막하게 말을 내뱉은 뒤 전화를 끊었다.
의정 활동으로 바쁜 사람인 만큼, 다시 연락이 오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파일의 효과는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우웅- 우웅-
직원과 통화한 지 채 10분이 안 지난 시점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김호섭 의원임을 직감한 나는 지체하지 않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호섭 의원입니다. 보좌관한테 보고를 듣고 급하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오랜 정치인 활동으로 예의가 몸에 밴 김호섭 의원은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아드님 일과 관련해서 의논할 게 있어서요.”
“하하, 이거 참. 당혹스럽군요. 강진우 군께서 우리 아들을 폭행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당돌하게 나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준석이가 다친 건 크게 유감입니다. 하지만 의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의 일방적인 폭행으로 인해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조사를 더 진행해 봐야 알 수 있는 문제겠지요. 그래서 저에게 용건이 무엇입니까? 설마, 불법 수집한 파일들로 절 협박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김호섭 의원은 내 말을 일축한 뒤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전 의원님을 협박하려는 게 아니라 아드님께 당한 피해를 호소하려고 연락을 드린 겁니다.”
“……휴우, 제 아들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너무 당당하시군요.”
능청스러운 답변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내가 녹음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정을 다스리려 애를 썼다.
“녹음 파일을 들으시면 알겠지만, 이번 싸움도 김준석이 먼저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작가를 지망하고 있는 저에게 야한 소설을 쓰게 하고 금품을 갈취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으니 참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날 오전, 김준석 패거리가 싸움을 걸어오는 과정을 모두 녹음, 녹화했기에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파일을 보시면 담임 선생님께서 준석이를 티 나게 보호하는 것도 나와 있습니다.”
“주제와 관련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그 부분은 우리와 상관없습니다.”
김호섭 의원은 대화가 계속될수록 인내심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난 그의 감정과 상관없이 냉정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생님의 개인 발언을 의원님과 결부시키는 건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어떻게 볼까요?”
“음…….”
추가 설명을 들은 김호섭 의원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전전긍긍했다.
국회 의원 아들을 우선적으로 비호하는 선생의 모습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다.
비록 김준석네 집안과 담임의 연결 고리가 구체적으로 밝혀진 건 없지만, 이와 같은 녹취록이 세상에 공개되면 검증은 뒷전으로 밀리기 쉬웠다.
“후우, 원하는 게 뭡니까?”
한동안 입을 다물고 고민하던 의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굳이 의원님 가족의 치부를 밝혀 정치 생활을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자꾸 받아 주니까 끝도 없이 지껄이는구나. 파일이 공개되면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겠지만, 아들의 실수 정도로 내 정치 생활이 끝나는 일은 없다. 이 바닥에 내가 다져 놓은 게 얼만데 감히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던 김호섭 의원은 내가 정치 생활을 운운하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당장은 의원직을 유지할 순 있겠지만, 다음 총선에서 공천받을 기회는 물 건너가겠지요. 어떻게 대화를 계속하시겠습니까?”
“아주 영악한 놈이구나……. 준석이가 이번에 아주 제대로 걸렸어. 그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계속해 봐라.”
김호섭 의원은 마음 같아서는 모든 인맥과 권력을 동원하여 나를 짓누르고 싶었지만, 요즘같이 매체가 발달된 시대에는 역풍을 맞기 십상이었다.
“우선, 제 학교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요구할 건 그게 전부야?”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끄응, 그리고 또 뭐냐?”
“준석이를 우리 학교에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피해를 본 학우들에게 적절한 사과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뭐 하나만 묻자. 네 말을 들어줘서 나한테 이로울 게 뭐가 있지? 솔직히 요구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은 안 하나?”
김호섭 의원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 아예 없던 일로 넘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의원님께 아예 이득이 없는 건 아닙니다. 문제를 타인이 아닌 본인이 선제적으로 밝히고 진심 어린 사과가 동반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식의 학교 폭력 문제는 분명 정치인에게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이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터놓으면 재기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김호섭 의원은 다각도로 내 제안을 검토한 다음 입을 열었다.
“대신, 일 처리하는 부분과 사과의 방식은 전적으로 나에게 맡겨라.”
“알겠습니다.”
“파일들은 되도록 지웠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렵겠지?”
“네, 어렵습니다.”
나는 김호섭 의원의 요구를 단숨에 거절했다.
이후, 사태 수습에 관한 몇 가지 사안들을 논의했고 통화를 종료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으니까 나머지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겠어.’
전화 통화 외에 특별히 한 일은 없었지만,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훈련을 통해 심신이 강해졌다곤 하지만, 상대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국회 의원이었고 난 고작 열일곱의 청소년에 불과했다.
애당초 말수도 적고 소심한 성격을 가진 나였다.
그런 내가 담임이나 국회 의원같이 윗사람들을 상대로 협상을 진행한 것은 막대한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작 이것 가지고 이렇게 지치는 걸 보면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지네. 어? 설마 미션이 완료된 건가?’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고 있는데, 눈앞에 푸른 화면이 떴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사용자의 미션 완료를 알려 드립니다.>
<보상: 매력과 정신력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Y/N>
문구를 확인함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환한 빛이 나에게 쏟아졌다.
20%…… 40%…… 70%……
여느 때처럼 진행률은 실시간으로 표시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작업이 완료되었다.
상쾌했다.
하루 내내 압박감에 시달렸던 내 심신은 평화로움을 되찾았고 긴장감으로 인해 두근거리던 가슴이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스탯 확인.’
마음속으로 스탯을 확인하려 하자 현자의 눈은 자동으로 발동되었다.
[정신력: LV 3, 매력: LV 2]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약속한 대로 정신력과 매력은 각각 1씩 레벨 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동안의 보상들이 미션 수행과 큰 연관성을 띄었다면 이번 보상은 이해가 안 되는 측면이 있었다.
김준석 패거리를 처리했다고 정신력과 매력이 향상된다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다.
<사용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드바이저가 발동됩니다.>
‘어드바이저’
<어드바이저는 아르마이스의 의지 안에 포함된 기능입니다.>
한참을 궁리하고 있던 그때,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자동으로 실행됐다.
<김준석은 사용자의 삶을 제한하는 암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동안 사용자께서는 그에게 괴롭힘과 억압을 당하여 원래 가진 능력치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니까 자세히 설명해 줘.’
<김준석은 사용자님께 음해와 모욕을 서슴지 않았고 이는 평판의 훼손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학우들 사이에서 그동안 평가 절하된 상태셨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야한 소설을 쓰고 빵셔틀을 하는 내 모습이 학우들에게 못난이처럼 비춰졌다는 건 설명할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즉, 어드바이저는 나한테 씌워져 있던 못난이 이미지를 스스로 깨부숨으로써 정신력과 매력이 향상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트라우마의 원인이었던 김준석을 이겨 낸 게 정신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는 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으로 보입니다.>
‘설명해 줘서 고마워. 아, 그런데 매력 스탯이 상승하면 이점이 뭐야?’
정신력이 향상된 것은 여실히 느껴지는 데 반해, 매력 스탯의 상승은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곧 변화가 시작될 겁니다.>
‘아, 그래?’
<매력 보정에 따른 변화에는 특별한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특별한 과정? 어, 갑자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이야기를 듣던 중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푹, 자고 일어나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흐아암, 나도 모르겠다. 일단 자자…….’
나는 어드바이저의 답변을 읽음과 동시에 잠이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