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26화 (26/122)

26. 7화 소설 공모전 (1)

긴 꿈을 꾸었다.

아르마이스로 활동하던 전생의 삶은 치열했지만, 현실과 여러모로 달랐다.

압도적인 능력과 빼어난 외모.

어느 마을을 가든 뭇 이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나였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조금이라도 타락한 삶을 추구했다면 엄청난 바람둥이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전생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부족했다.

달콤함에 취한 것도 잠시, 시야는 점점 흐려졌고 꿈은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지? 뭐야, 아직 시간이 이거밖에 안 됐어?’

눈을 뜬 나는 벽에 달린 시계를 먼저 확인했다.

시침은 다행히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수업을 못 들을 뻔했어.’

오늘 9시에는 미르헨 총장과의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르마이스 님, 쉬고 계셨습니까?]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일까,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미르헨 총장님이 등장했다.

“아닙니다. 지금 막 일어나던 참이었습니다.”

[오, 그렇군요. 그런데 뭔가 오늘따라 아르마이스 님의 외모가 더욱 빛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그냥 의례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마이스 님의 얼굴이 변한 듯 보입니다.]

“네? 진짜요?”

미르헨 총장의 말에 난 전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짧아진 바지를 보며 경악했다.

불과 1시간 남짓을 잔 것뿐인데, 키가 적어도 5cm 이상은 자란 것처럼 보였다.

신체의 변화는 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에는 이전에 없었던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볼과 턱 밑에 있던 여드름 자국이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게다가 이목구비도 전보다 또렷해져 한눈에 봐도 외모가 변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혹시, 영약이라도 섭취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냥 훈련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근육도 붙고 피부도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오늘 마지막 점검이 있는 날이죠?”

6일간 꾸준히 소설을 쓴 덕분에 회지에 제출할 분량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나는 미리 뽑아 둔 원고를 손에 들고 내용을 읽어 주었다.

[본격적으로 복싱을 배우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되는군요.]

“네, 아무래도 단편 소설이다 보니까 배경과 동기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분량을 많이 채워지더라고요. 후, 그래서 걱정입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복싱 재능을 발견하는 과정을 최대한 짧게 표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아까 소설을 읽어봤는데, 초두부터 마무리까지 내용이 너무 잔잔하더라고요. 이런 식이라면 내부 평가에서 3등 이내에 들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글 전개나 문장 구성 방식이 비슷해지면서 발전 속도도 더뎌진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카산트 대륙의 최고 작가로부터 개인 글쓰기 수업을 받은 덕분에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지만, 이마저도 어느 순간 멈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이 더디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아르마이스 님의 필력이 완숙한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최고의 작가에게도 정체 구간은 있기 마련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땐, 아르마이스 님께서 쓰신 이번 소설은 학교에서 충분히 통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문장을 다듬고 서사 구조를 살피지 않았습니까? 원래 본인이 쓴 글일수록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법입니다. 자신의 글을 거리를 두고 보는 게 쉽지 않거든요.]

미르헨 총장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총장님을 믿고 글을 제출해 보겠습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실력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아르마이스 님의 필력은 현재도 상당한 편이거든요. 자, 어쨌든 이제 슬슬 피드백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반적인 글의 느낌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결말은…….]

이후, 미르헨 총장은 글에 관한 총체적인 점검에 나섰고 난 귀를 기울이며 그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모두 받아 적었다.

피드백은 2시간 가까이 이루어졌고 밤 11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이상으로 소설 플레임에 관한 모든 작업을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총장님.”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제출하기 전에 아르마이스 님께서 마지막으로 검토를 철저히 해 보시길 바랍니다. 바쁜 와중에도 제 지도를 잘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미르헨 총장은 맞인사를 한 뒤 화면에서 사라졌다.

‘아까 잤으니까 쉬지 말고 글을 쓰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책상에 앉은 나는 메모지에 적은 피드백 내용을 토대로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이 완료될 때마다 피드백 목록은 하나씩 줄어들었고 소설은 구색을 갖춰 갔다.

뜨거운 여름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방금 교무실에 갔다 오는 길인데, 준석이네 아버지가 계시더라고.”

“준석이네 아버지 국회의원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우리 지역구에서 선출된 김호섭 의원 말이야. 담임하고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길래 몰래 가서 엿들었거든…….”

‘오늘 하루는 참 시끄럽겠어.’

나는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아이들은 어제 일을 두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에 대해 재평가를 하고 있었다.

“난 어제부로 강진우를 다시 봤잖아.”

“그러게, 김준석이 그렇게 된통 깨질지 누가 알았겠어. 그런데 저렇게 싸움을 잘하면서 왜 그동안 당하기만 한 거야?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네.”

애들은 내가 괴롭힘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준석의 위세가 강할 땐, 찍소리도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였던 나를 욕하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하는 것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 몰려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 저런 애가 있었던가?”

“어? 그러게. 저기는 강진우 자리인데 어떻게 된 거지?”

여자애들은 김준석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갑자기 왜 그러지?

야한 소설을 쓴다고 평소에 짐승 취급을 하던 애들이 나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내자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처음엔 못 알아봤는데, 자세히 보니까 강진우더라고.”

“이제 보니까, 진우 쟤 꽤 잘생긴 거 같지 않아?”

“선입견이 참 무섭다. 예전에는 그냥 변태로 보였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훈남으로 보이네?”

피부가 좋아지고 이목구비가 조금 뚜렷해졌다고 이렇게 호평을 받을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여동생이 외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스타일에 신경을 쓰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나였다.

매력 레벨이 1등급 높아졌을 뿐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앞으로 매력 수치를 더 올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기대가 됐다.

“그리고 진우가 야한 소설을 썼던 것도 다 김준석 때문이잖아.”

“맞아, 김준석이랑 이석호가 진우에게 글 쓰라고 했던 걸 들은 적이 있어.”

“듣고 보니까 우리가 너무했던 거 같아. 억지로 썼던 글 때문에 학교생활 내내 변태로 몰렸었잖아.”

‘훗,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주네.’

훈남 취급을 받는 것을 넘어 변태 누명까지 모두 벗게 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르륵

“다들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아라.”

문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담임이 교실로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 있던 교무회의에서 준석이의 전학이 결정됐다. 사유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불량한 행동으로 반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우리 반 학우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는 사실이 이번에 적발됐어. 후, 개인적인 용무로 바빠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여 일을 크게 만들었구나.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마.”

‘끝까지 변명만 늘어놓으시네.’

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담임을 지긋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본인이 말하면서도 창피한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원래는 준석이 아버지께서 반에 들려 사과의 뜻을 전하려고 했지만, 교장 선생님과 내가 만류하여 반에 들리지는 못했다. 당사자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한게 된 부분은 나도 아쉽게 생각해. 하지만 상처받은 부분이 있다면 빨리 잊어라. 지나간 일로 괴로워해봤자 자기만 손해니 말이다.”

담임의 계속되는 궤변을 듣기 싫었던 나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보통 때라면 나를 일으켜 세운 뒤 한마디 했을 그였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조회가 끝날 때까지 날 건들지 않았다.

‘상황이 잘 정리된 것 같으니까 그만 잊자.’

김준석 패거리와 담임은 더 이상 내 삶의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난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불끈 쥐며 오늘의 승리를 만끽했다.

* * *

금요일 아침.

어젯밤에 문학부에 제출할 원고를 봉투에 밀봉한 뒤, 가방에 잘 넣어 두었다.

혹시 몰라 원고를 꺼내 제대로 프린트가 됐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려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진우야! 잠시만.”

안방에서 나갈 채비를 하던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무슨 일이신데요?”

“어제 뉴스에 김호섭 의원이 나온 거 알고 있니?”

“네, 인터넷에서 잠깐 본 것 같아요.”

어제저녁, 김호섭 의원은 국회 언론관에서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앞뒤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김호섭 의원 아들이 너희 학교 다닌다면서? 나이도 보니까 너랑 동갑이던데?”

“맞아요, 학교에서 몇 번 본 적 있어요.”

“걔가 글쎄 학우 하나를 엄청 괴롭힌 모양이더라고. 혹시, 별일 있는 건 아니지?”

엄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하, 난 또 뭐라고. 제가 어디 가서 괴롭힘당할 사람처럼 보이세요? 출근 잘하시고 좀 이따 밤에 봬요.”

“그래, 잘 다녀와라.”

시원한 답변을 들은 엄마의 얼굴은 금세 환해졌다.

‘그래도 약속 하나는 잘 지키네. 하긴, 정치 인생이 끝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말이야. 후, 그건 그렇고 김준석을 더 이상 안 봐도 되니까 너무 좋다.’

성문고등학교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맑은 공기와 뜨거운 여름 햇살은 밝은 내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재웅이랑 채원이는 어떤 소설을 썼을까? 빨리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오전 수업을 마친 나는 문학부 활동을 하기 위해 다른 교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진우야, 같이 가!”

“어, 재웅아.”

1층에 있는 문학부 교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중, 엄재웅을 만났다.

“소설은 잘 썼어?”

“하아, 무료 연재란에 올린 웹소설을 각색해서 쓰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

엄재웅은 나의 물음에 힘없이 대답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웹소설 사이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독자들의 반응은 미미한 편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노력한 게 있으니까 잘될 거야.”

“난 그냥 제출에 의의를 두기로 했어. 어차피 요행으로 쓴 거라 큰 기대를 안 하고 있거든. 아, 맞다! 진우야, 김준석이 그동안 널 힘들게 했다면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냥, 어차피 이야기해 봤자 네 근심만 늘어나지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잖아.”

난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도…….”

“괜찮아, 재웅아. 우리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문학 공모전 이야기나 하자. 들어 보니까 문학부 선배들 외에도 특별 심사위원이 한 분 더 계신다면서?”

“응, 우리 학교 선배 중에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분이 심사를 도와주기로 하셨대. 내가 알기로 신문사에서 오랜 기간 재직하시다가…….”

“진우야, 재웅아. 뭔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한참 대화를 즐겁게 하고 있는데, 불청객 하나가 우리 곁에 불쑥 나타났다.

“후우, 또 너냐?”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엄재웅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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