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8화 목표 설정 (1)
“회사를 운영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이렇게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그렇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은 제가 미래의 작가님들에게 잘 보이려고 온 거니까 편하게 식사들 즐기세요.”
이규석 사장은 굽신대는 김호준이 약간 부담스러웠는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 레스토랑은 디너 코스로 유명한 곳입니다. 간단한 음료도 시켰으니까 더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다 인사를 한 뒤, 입가심으로 나온 수프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윤채원 작가님의 글을 보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이에 비해서 표현이 원숙하고 세련된 것 같습니다. 현재 다른 출판사랑 출간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아는데, 기간이 만료되시면 우리 회사에도 기회를 주세요.”
“부족한 제 글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채원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4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우리가 식사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이규석 선배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과거 대형 언론사 간부로 활동했고 퇴사 후에는 창업을 하여 견실한 기업을 일군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겸손한 태도를 갖췄기 때문이다.
“호준 씨라고 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지아에게 듣기로 채원 작가님과 마찬가지로 작가 활동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웹소설이 유행하고 있는데, 혼자 소소하게 적었던 글이 운 좋게 호응을 얻어 작가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김호준은 나이프를 내려놓고 공손히 답했다.
“현재 저희 출판사도 전자 출판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어, 그럼 감성 출판사도 웹소설과 웹툰 같은 컨텐츠들을 다루는 겁니까?”
김지아 선배는 대화에 참여하며 관심을 드러냈다.
“사실, 우리 회사에 속한 작가들은 모두 순수 문학을 지향하고 있고 유망한 신인 작가를 매년 배출하고 있는 상태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업계 트렌드에 적응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일반 출판의 경우, 유명 작가를 섭외한 후 베스트셀러 책을 인쇄하고 해외 진출까지 도모해야 커다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웹소설과 웹툰 시장의 경우 수많은 고정 독자를 보유했기 때문에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사업을 하신 분이라 혜안이 있으십니다. 제가 아는 작가님만 해도 본인이 쓴 웹소설이 웹툰화가 되었고 드라마 제작까지 진행 중에 있어 한 해에만 10억에 가까운 소득을 올렸거든요.”
김호준은 이규석 사장을 치켜세우면서 자신이 업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어필했다.
“허허, 후배님 말씀을 들으니까 사업을 조속히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쩐지 작가님 작품이 순수 문학을 쓰는 여타의 작가님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쉼 없는 장면 전환을 통한 빠른 전개와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흥미 요소를 적절히 섞어 넣어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살리셨던데요?”
이규석 사장은 비즈니스를 많이 해 본 만큼, 상대의 호감을 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 제출한 글은 급하게 끄적거린 거라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만약, 선배님과 함께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재 쓰고 있는 야심작을 감성 출판사를 통해서 출판하고 싶네요.”
“후배님 말씀을 들으니 내일부터라도 사업 확장을 진지하게 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 다시 논의를 하도록 하죠.”
그는 대한일보에서 일하면서 대형 포털사이트 관계자들을 잘 알고 있었고 감성 출판사와는 이미 MOU까지 맺은 상태라 웹소설, 웹툰 시장에 진출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김호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지 않은 상황이라 완곡하게 거절의 표현을 했다.
“네, 선배님을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글을 열심히 써 놓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자, 식사들 하면서 이야기합시다.”
이규석 사장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김호준의 시선을 피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람 천성은 시간이 지나도 안 바뀌는구나. 재웅이랑 나한테도 저런 식으로 접근했었지.’
중학교 2학년 때, 팀을 꾸려 웹소설 작가 준비를 하고 있던 우리에게 먼저 다가왔던 김호준의 모습은 선배를 대하는 태도와 상당히 유사했다. 본인이 아쉬울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저자세를 보이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냉정하게 돌변하는 게 그의 습성이었다.
나는 김호준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쉰 뒤 식사에 집중했다.
“저쪽에 앉아 계신 후배님은 상당히 과묵한 타입이시군요.”
내내 윤채원, 김호준과 대화를 나누던 이규석 사장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얻어 가는 게 많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말을 하기에 바쁘지만, 다른 이의 견해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곤 하지요. 혹시, 대화 중에 인상 깊었던 점이 있었습니까?”
“현재 거둔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허, 정말 다 듣고 계셨군요. 식사에만 열중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오해했네요.”
이규석 사장은 내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던 식사도 멈추고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씨발, 쎄빠지게 노력한 사람한테는 무관심하면서 가만히 있는 놈한테는 엄청 잘해 주네.’
내내 친분을 쌓으려 애썼던 김호준은 이규석 사장이 자신에게는 한 번도 짓지 않던 따뜻한 눈길과 미소를 나에게 보내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문학부 동아리 때처럼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손을 책상 아래에 두고 부서질 듯 주먹을 쥐며 화를 다스렸다.
“이번 심사에서 세 분의 소설을 읽으면서 성문고등학교 문학부의 전통이 잘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 각의 작품들은 저마다 특색을 갖춰 1, 2, 3등을 고르는 게 무척 어려웠지요.”
“선배님하고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등수를 정하느라 엄청 고민했었어. 어쩔 수 없이 순서를 매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김지아 부장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후배 간의 훈훈한 분위기가 조성고 있던 그때, 이규석 사장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개중에 제 눈길을 가장 끈 글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김호준은 자신의 글을 언급할 거라는 기대에 테이블에 몸을 잔뜩 붙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다른 후배님들 글도 좋았지만, 강진우 작가님이 쓴 플레임이라는 소설이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의 입에서 내 작품이 거론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복싱 소재로 쓴 글이라 독창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네요.”
옆에서 듣던 김호준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말을 쏟아 냈다.
“물론, 스포츠 물로 작품성을 살리는 건 어렵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쓰여진 글이여서 작가의 본 실력을 판단하기 훨씬 수월했덨 거 같아.”
김지아 선배는 행여 내 마음이 상해 분위기가 어그러질까 두려워 덕담으로 수습했다.
“김지아 후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복싱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스토리는 자칫 진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사하는 입장에선 소재 외에도 문장력, 스토리 전개 방식 등 다양한 면을 검토하기 때문에 당락을 결정지을 정도는 아니지요.”
“다음에는 조금 더 참신한 소재를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김호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선배들의 조언에만 집중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후배님의 소설을 보면 훈련을 하거나 복싱 씬을 묘사하는 방식이 무척 탁월했습니다. 마치 진짜 복서가 글을 쓴 것처럼요.”
“정말 신기하네요. 실제로 진우는 복싱을 할 줄 알거든요.”
조용히 대화를 듣던 윤채원은 이규석의 통찰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쩐지 장면 하나하나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러나 후배님의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따로 있습니다.”
‘쳇, 완전히 강진우를 띄워 주기 위한 모임이네.’
김호준은 유리컵에 따라진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랬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규석 사장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촉각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김지아 후배님 말씀으로는 문학부 활동 내내 뚜렷한 결과물이 내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웹소설 몇 편을 쓰긴 했으나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였거든요.”
“오, 이것 참 놀랍네요. 그럼 불과 몇 주 사이에 실력이 이렇게 빨리 느신 겁니까?”
혹자들은 글을 쓰는 능력이 부던한 노력으로 향상될 수 있다고 하지만, 일류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타 작가들을 압도하는 재능이 필요했다.
중학교 때부터 글을 써 왔다는 건 글을 잘 쓰기 위해 투입된 노력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재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규석 사장은 플레임에서 다른 소설에서 발견하기 힘든 번뜩임을 포착했다.
그는 심사 당시 플레임을 이렇게 평했었다.
흔한 소재와 평범한 줄거리로 구성된 소설이나 사람의 이목을 끄는 매력이 있다고.
이규석 사장은 사소함을 특별함으로 바꿀 수 있는 이 능력이야말로 스타 작가가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웹소설만 쓰다가 처음으로 순수 소설을 써 봤는데, 생각보다 잘 맞더라고요.”
다른 차원의 존재로부터 지도와 첨삭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후배님의 글을 보면 초반부에는 조금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지만, 뒤로 갈수록 필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더군요. 만약, 초반부터 중후반부에 나타난 문장력과 구성 능력을 보여 주셨다면, 윤채원 양과 1등을 다퉜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과연 대한일보 논설위원다운 통찰력이었다.
나는 미르헨 총장님으로부터 작업이 거듭될수록 표현 능력이 는다는 칭찬을 들은 바가 있었다.
총장님은 내 글을 매일 점검했기에 충분히 확인 가능한 부분이었겠지만, 20개에 달하는 소설들을 심사해야 했던 선배님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전 아직 채원이를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훗, 후배님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계시군요. 기왕 이야기 나온 김에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이요?”
“후배님은 작가로 이미 데뷔한 윤채원 양이나 김호준 군과 달리 출판사들과 계약을 안 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입에서 어떤 제안이 나올지 기다렸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스카웃 제의인가?
설레발은 금물이었지만, 인지도가 높은 감성 출판사의 오너가 나에게 흥미를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우리 회사와 전속 계약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네?”
“하하,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감성 출판사는 예전부터 미래가 유망한 작가님들을 모셔 오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제가 볼 땐, 강진우 작가님이라면 우리 회사가 미래를 걸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규석 사장은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순수 문학에 자질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가 아무래도 웹소설 위주로 글을 써 와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 웹소설이든 순수 소설이든 상관없습니다. 8월부터는 우리 회사도 웹소설 시장에 뛰어들 생각이거든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즉답을 피했지만, 이규석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퇴로를 막았다.
“와, 잘됐다 진우야, 너에게 확실히 재능이 있나 봐. 선배님이 아무에게나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아.”
“그래, 감성 출판사면 웹소설 업계에서도 금방 주목을 받을 거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윤채원과 김지아 선배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김호준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