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8화 목표 설정 (2)
‘아까 내가 이야기할 때는 검토 중이라며 발을 빼더니, 강진우한테는 스카웃 제안을 해?’
김호준은 본인이 차기작을 함께해 보고 싶다고 했을 땐, 애매모호한 답변을 한 이규석 사장이 나에게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분노했다. 그는 당장 테이블을 박차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감정을 조절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들었을 때는 계획 중이셨던 것 같은데, 이렇게 갑자기 시장 진출을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는 충분히 검토를 한 뒤에 웹소설 사업부를 론칭할 계획이었지만, 강진우 작가님처럼 재능 있는 분을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겠지요.”
이규석 사장은 뼈 있는 김호준의 말을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나에게 후배님이라는 말 대신, 작가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작가님, 어떻게 우리랑 함께 해 보시겠습니까?”
“음…… 파격적인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보통의 작가 지망생이 인지도 있는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그러나 문학부 공모전 외에 제대로 된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나는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무턱대고 작가로 데뷔했다가 괜히 주변 사람에 민폐를 끼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허허, 이거 제가 너무 급하게 말을 꺼냈나 봅니다. 그럼, 천천히 고민해 보시고 연락을 주세요. 여기 제 명함이 있습니다.”
그는 곧바로 답을 받아 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마음을 정하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저, 죄송한데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나와 이규석 사장이 대화가 마무리되던 그때, 김호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호준아, 어차피 식사도 끝났으니까 후식만 먹고 가.”
“됐어요. 집에 가서 내일 연재할 소설을 써야 해요.”
김지아 선배의 만류에도 김호준은 짐을 챙겨 떠나려 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안녕히 계세요.”
이규석 사장이 손을 흔들며 말하자 김호준은 꾸벅 인사를 한 뒤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이런 제가 후배님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네요. 다들 그만 일어들 나시죠.”
“네, 선배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김호준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임은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식사가 일찍 끝났네. 그것보다 저번 주부터 계속 나에게 기회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재능을 극찬하며 복싱을 해보라는 백성철 관장님부터 출판사와의 직접 계약을 통해 작가 데뷔를 도우려는 이규석 선배까지 어느 제안 하나 끌리지 않는 것은 없었다.
이세계의 존재들과 만난 후, 급속도로 성장한 나에게 행운이 몰려오는 기분이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이기에 선택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첫발을 무엇으로 떼냐에 따라서 삶의 양태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자.’
윤채원과 김지아 선배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여러 선택지를 두고 생각에 잠겼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학교를 마친 나는 격기술 수업을 듣기 위해 집에 일찍 돌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르마이스 님. 오늘은 아르마이스식 격기술 수련에 도움이 되는 호흡법과 신체 단련법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나이트 아린은 여느 때처럼 열정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했다. 하지만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나는 멍하니 있다 지적을 받곤 했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상태에서 온몸의 나쁜 기운을 빼낸다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 내뱉어 주시는 게 아르마이스식 호흡법의 포인트입니다. 다음으로 적과의 전투를 벌일 때 호흡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펀치를 뻗을 때, 호흡에 임팩트를 줘야 한다는 걸 기억하십니까?]
“……아, 네.”
[아르마이스 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시죠.”
아르마이스식 호흡법은 복싱 호흡법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에 나이트 아린의 시범을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 시연이 가능했다.
나는 자세를 잡고 주먹을 뻗으면서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이미 내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상태였다.
[잠시만, 수업을 중단하도록 하죠.]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닙니다. 전 단지 아르마이스님께서 고민하시는 게 뭔지 궁금해서 수업을 멈춘 겁니다. 어차피 저희의 목적은 아르마이스 님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하실 수 있게 도와드리는 거니까요.]
나이트 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게 말했다.
[아르마이스 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휴, 브루스 단장님.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니 깜짝 놀랐잖아요.]
[허허, 자네는 나랑 보낸 세월이 얼만데 아직도 적응을 못 했나?]
뒤에서 몰래 격기술 훈련을 참관하고 있던 브루스 단장은 상념에 빠져 있는 날 돕기 위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브루스 단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하하, 저야 항상 즐겁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산적 떼들이 마을을 약탈한다는 소식에 소탕을 막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브루스 단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르마이스 님, 혹시 하문하실 일은 없습니까? 지원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를 활용해도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현재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과 논의하기보단 제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라서요.”
[오, 그렇군요. 그럼, 어떤 것이 아르마이스 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저, 브루스 그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카산트 대륙을 샅샅이 뒤져 해결책을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 개의치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혼자 해결할 문제라는 말에도 브루스 단장은 열정적인 태도로 도움을 줄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고 난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훗, 최근에 여러 좋은 기회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서요.”
[사람은 기회가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입니다. 다각도로 생각해 보시고 이득이 되실 것 같으면 모두 취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브루스 단장님 말씀처럼 단숨에 결정을 내리고 싶지만, 제 첫 커리어를 선택하는 거라 신중해질 수밖에 없네요.”
[허허, 아무래도 아르마이스 님께서 우리들을 너무 과소평가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소평가라니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받은 게 얼만데,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브루스 단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나는 손사래를 치며 오해라는 뜻을 밝혔다.
[제가 반대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아르마이스 님이 속해 계신 세상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자가 누구입니까?]
“흠, 글로벌 기업을 운영하는 오너일 수도 있고, 대통령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음악, 체육,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최고봉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딱 누구라고 꼬집어서 이야기하기가 힘드네요.”
질문을 받은 나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글로벌 기업이라든지, 대통령과 같은 것이 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아르마이스 님한테는 방금 언급하신 것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이 있습니다.]
“저……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 세상은 시간의 제약이 있어서 모든 분야의 달인이 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르마이스 님은 이미 누구의 도움 없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당대에 살아 보진 않았지만, 아르마이스 님은 전사, 마법사, 전략가 등 다양한 직업을 충분히 소화하셨습니다. 그것도 최고의 경지에서 말이죠.]
“그건, 전생에서의 이야기지 현실과는 조금 괴리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희망 섞인 말에도 나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내내 조용히 있던 나이트 아린이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아르마이스 님의 의견에 토를 달려는 건 아니지만, 현재 저희가 지원해 주고 있는 부분은 계획했던 것의 5분의 1도 안 됩니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계시는지 저희는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욕심을 더 많이 내셔도 무리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최근에 미르헨 총장님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르마이스학의 최고 권위자이십니다. 총장님께선 종종 아르마이스 님이 본인의 능력을 온전히 다 활용하지 못하고 계시는 걸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총장님께서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이트 아린의 말을 들은 나는 놀라워하며 되물었다.
[아르마이스 님의 능력과 우리가 있는 한 불가능은 없습니다. 오늘 당장 미르헨 총장님께 이 모든 사실을 전달하여 아르마이스 님의 성장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말씀을 들으니까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이 모두 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원하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우선 글쓰기와 복싱을 마스터하여…….”
나는 이들에게 복싱과 소설 쓰기를 통해 어떻게 성공하고 싶은지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현실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의견 잘 들었습니다.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목표를 이렇게 잡는 건 어떻습니까? 복싱과 소설을 통해서 토대를 잡은 다음 성공한 기업가가 되는 겁니다. 아르마이스 님이 사는 곳은 결국 돈과 직책이 가장 중요해 보이거든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브루스 단장의 말은 달콤하면서도 매력적이었으나 선뜻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하, 물론입니다. 그쪽 세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아르마이스 님은 전생에 카산트 대륙을 구해 내신 분입니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과 방금 제가 말한 것 중 어느 게 더 힘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거고요.]
“흠……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이야기가 나온 거 제 마음속에 있는 염원들을 모두 이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들의 조언에도 갈팡질팡하던 나는 브루스 단장의 지속적인 격려에 큰 결심을 하게 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준석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쩔쩔매던 나였다, 하지만 지난 1달 동안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삶의 새로운 막을 열 기회들이 쏟아지고 있다.
생각은 그만하고 닥치는 대로 뭐든 해 보자 그래, 할 수 있어.
결의에 가득 찬 나는 주먹을 굳게 쥐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제야 아르마이스 님 다운 표정이 나왔군요. 좋아, 이럴 게 아니지. 나이트 아린과 당장 미르헨 총장님을 만나서 사안을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단장님, 저는 수업을 마저 해야 합니다.]
[수업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브루스 단장은 곤란해하는 나이트 아린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르마이스 님의 스케줄에 맞춰 어렵게 잡은 수업입니다. 시간이 변동된다고 수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아린, 걱정하지 마 수업이야 언제든 해도 되는 거 아니겠어? 안 그렇습니까, 아르마이스 님.]
“물론입니다. 앞으로는 밤이든 새벽이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훈련에 매진할 생각이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미르헨 총장을 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루스 단장은 내 눈에 담긴 강한 결의를 읽고 미소를 지은 뒤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동안, 내가 가진 자원을 제대로 활용 못 한 감이 있어. 이제부터는 쉬지 않고 달려 보자.’
생각을 마친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꺼낸 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