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9화 각성 (1)
“정말이냐? 한 번 말한 거 무르기 없기다.”
“네, 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성철 관장님은 내가 취미 수준을 넘어 전문적으로 복싱을 배우겠다고 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좋아, 월요일에 서울 지역 예선 접수부터 할게. 내일부터 전국체전 금메달을 목표로 훈련에 들어갈 테니까 아침이 되면 체육관으로 나와라. 그리고…….”
이후에도 통화는 10분가량 이어졌고 나는 관장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야 할 비전을 들을 수 있었다.
“깜빡하고 이야기를 못 할 뻔했구나.”
“어떤 거를요?”
“전국체전에 참가하려면 그 전에 서울 지역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해야 돼. 그러려면 복싱협회에 선수 등록을 해야 하는데, 네 협조가 필요하다.”
“그렇군요.”
그의 요지는 이랬다.
선수 등록을 위해서는 신청과 함께 소정의 등록금만 내면 됐다. 하지만 선발전 접수 기간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라 일을 빠르게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관장님은 협회에 아는 사람이 많아 관계자에게 빠른 처리를 부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이 직접 나서 등록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네가 다니는 학교는 체중이나 체고가 아니라서 교장 선생님의 추천서를 받아야 해. 어떻게 가능하겠어? 이전에 복싱을 한 적도 없어서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을 거야.”
“일단 시도는 해 봐야죠.”
추천서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 감도 서지 않았지만, 당장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도리가 없었다.
‘이 부분은 내일부터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선배님께 전화를 드리자.’
관장님과 통화를 마친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낸 뒤 선배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일전에 인사드렸던 강진우입니다.”
“오, 작가님. 이 시각에 웬일이십니까?”
“늦은 시간에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감성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하하, 마침 웹소설 사업부 론칭을 논의하고 오는 길인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선배님은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터뜨렸다.
“계약 체결은 어떻게 진행하면 좋겠습니까?”
“내일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커피 한잔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죠.”
“오전 이후에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서 장소와 편하신 때를 알려 주시면 맞춰서 가겠습니다.”
대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선배님과의 통화도 얼마 있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이런, 계약만 신경쓰느라 세부적인 사안은 논의를 못 했네. 아니다 어차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면 되니까 상관 없어.’
늦은 시각에 전화를 드린 상황이라 통화를 길게 하는 건 무리었다.
나는 원고를 제출할 플랫폼과 연재 일정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은 나중에 직접 만나 논의하기로 했다.
[아르마이스 님, 계십니까?]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던 그때, 미르헨 총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기 있습니다. 총장님, 안녕하세요.”
[방금 브루스 단장과 이야기를 막 마쳤습니다. 큰 결심을 하셨다면서요?]
“큰 결심이라고 하긴 부끄럽고 그냥 열심히 살아 볼까 해서 급히 연락을 드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아르마이스 님께 일러줄 게 있었거든요.]
미르헨 총장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단장님 말씀으로는 총장님께서 제가 갖은 힘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곳 카산트 대륙에는 아르마이스 님에 대한 방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왕과의 혈투를 함께했던 동료분들 대부분이 이르젠 제국에 정착하신 덕분에 거의 모든 자료를 검토할 수 있었습니다. 아르마이스 님, 혹시 이름 모를 존재가 가끔 말을 걸거나 그러지 않습니까?]
‘아르마이스의 의지를 물어보시는 건가?’
나는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금방 눈치챘다.
“사실 이제까지 여러분들에게 말씀 못 드린 사안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르마이스 님께서 말을 아끼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장님 말씀을 들으니 최근 저에게 일어났던 현상이 생각납니다. 혹시, 아르마이스의 의지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럴 수가……. 전설 속 이야기가 사실이었군요.]
내 말을 들은 미르헨 총장의 얼굴은 설렘으로 빨갛게 상기되었다.
“설마, 카산트 대륙의 후손들도 아르마이스의 의지를 알고 있는 겁니까?”
[명칭 자체는 처음 들어 보지만, 아르마이스 님이 남기신 기록 중에 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묘한 존재가 언급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 그런데 아르마이스의 의지에 관해 물어보신 이유가 뭡니까?”
아르마이스의 전설이 사실로 확인된 기쁨에 넋이 나가 있던 미르헨 총장은 내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대화를 이어 갔다.
[저는 최근에 제국 도서관에서 아르마이스 님에 관한 자료를 샅샅이 뒤져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르마이스 님이 어떻게 카산트 대륙 최강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발견했지요.]
“아르마이스의 의지와 관련된 정보를 찾으신 거군요.”
[역시, 대충 말해도 척하고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아르마이스 님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특별한 성장 체계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아르마이스 님께서는 타인의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도 뛰어나셨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능력을 올리는 데에도 특출난 재능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가 올리고 싶은 스탯이 있으면 의식적으로 선택해서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겁니까?”
[훗, 이해력이 좋으시니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로 들어가도록 하죠.]
미르헨 총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문헌 자료에 따르면 아르마이스 님은 남들이 갖지 못한 특수 능력들을 지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이 활성화되면서 능력이 점진적으로 개안 되시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총장님은 일전에 나와 영혼 동기화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능력이 발현되는 메커니즘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아르마이스 님이 쓰신 몇몇 일지를 보면 경험이 쌓임에 따라 고유 능력이 발현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구가 발견됩니다. 카산트 대륙의 스테디셀러인 ‘나의 다짐’이라는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아르마이스는 종종 자신의 능력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곤 했다. 처음에는 어설프고 쓰임이 까다로워 보였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경험이 쌓인 어른처럼 숙련되고 현명해진다고 말이다.’ 이처럼…….]
‘나의 다짐’은 전생의 동료였던 사라 페이트가 썼던 책이다. 그녀는 카산트 대륙 전체에 명성이 퍼져있는 유명한 음유 시인이었는데, 몬스터와 대화가 가능하여 포로를 심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특기를 지니고 있었다.
미르헨 총장은 기록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사라 페이트의 자료를 탐독했고 그곳에서 발견한 전생에 관한 단서를 차분히 알려주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올리고 싶은 스탯이 있으면 선택하여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능력들도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저는 아르마이스 님이라면 카산트 대륙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응?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미르헨 총장과 대화를 나누던 그때, 낯익은 푸른 화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용자께서 전생의 기억 중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전생과의 인연이 강화됐습니다. 전생의 능력을 일부 되찾습니다.>
<동기화율이 충분히 향상됨에 따라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강화됩니다.>
<보상: 사용자께서 올리고 싶은 스탯에 따라 자의적인 미션 생성이 가능해집니다. 사용법은 어드바이저를 통해 공지할 테니 추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설마, 총장님이 말씀하신 능력이 발현된 건가? 대박이다.’
나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보상에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미르헨 총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아르마이스 님, 아르마이스 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왜 갑자기 말씀이 없으십니까?]
“하하하, 방금 저에게 좋은 일이 생겨서요.”
[좋은 일이요?]
“네, 조금 전에 화면이 하나 뜨더니…….”
그동안 미르헨 총장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신뢰를 쌓은 나는 아까 있었던 일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오, 제가 준 단서가 영혼 동기화를 촉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됐나 봅니다.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군요.]
그가 찾은 자료는 전생의 기억 중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에 영혼 동기화 현상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이후에도 아르마이스의 내밀한 기억들을 찾아내는 것은 지속적인 발전에 있어 중요한 과제였다.
“총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뵐 때마다 신세를 지게 되네요.”
[훗, 그런 말씀은 이제 안 하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생은 우리가 확실히 지원을 해 드릴 테니 그저 편하게 받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자, 그럼 슬슬 소설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미르헨 총장은 자연스럽게 전생에 관한 주제를 마무리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사실, 총장님을 뵙기 전에 한 회사와 계약 논의를 했고 소속 작가로 활동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쪽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전략을 세우는 게 좋을까요?”
[이전에 말씀하신 웹소설을 쓰실 겁니까, 아니면 순수 소설을 쓸 계획이십니까?]
“자세한 건 내일 대화를 나눠 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장르를 가르지 않고 제 작품을 받아 줄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선배님과의 통화를 상기하며 말했다.
[흠, 웹소설과 소설은 일견 비슷한 듯 보이지만, 독자의 취향과 형식에서 작지 않은 차이가 보였습니다. 그러니 우선 둘 중 하나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건 어떻습니까?]
“흠,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둘 중에 먼저 해 보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웹소설을 먼저 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웹소설로 성공하는 게 오랜 꿈이기도 했고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소설보다 더 수월한 측면이 있거든요.”
[혹시, 웹소설의 특징과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총장님은 내가 틈틈이 알려 드린 덕분에 웹소설에 관하여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략을 짜는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네, 알겠습니다. 우선 인기 있는 웹소설의 특징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직 듣지 않아서 모르지만, 말씀만 들어보면 웹소설 판에서 성공하기 위한 공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네요.]
“똑같은 소재로 비슷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도 독자들의 반응이 천양지차라 공식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상 독자님들에게 먹히는 요소나 코드는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메이저 장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메이저 장르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무협, 로맨스, 판타지 등…….”
성공한 작가는 아니었지만, 웹소설 판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던 나였다.
나는 미르헨 총장님께 주요 장르에 대해 소개 한 다음, 보편적인 서사 구조와 웹소설 업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자세히 설명드렸다.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상세한 설명 잘 들었습니다. 덕분에 어떤 식으로 전략을 짜야 할지 감이 오는군요.]
40분가량 긴 시간이 소요됐음에도 불구하고 미르헨 총장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는 설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아르마이스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공모전에 제출한 소설을 웹소설 형식에 맞춰 리뉴얼할 것을 추천합니다.]
“플레임을 웹소설화 하자고요?”
총장님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