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9화 각성 (2)
[네, 말씀에 들어 보니 한 작품으로 크게 성공하여 큰 부를 얻은 작가들도 있지만, 고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작을 하는 편이 확률적으로 더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플레임을 수정하는 작업 외에도 신작을 쓰는 것을 병행하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스포츠물이 메이저 장르가 아니라는 점에서 리스크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트렌드를 따라가다 보면 판에 찍은 듯한 글이 양성되기 쉽거든요. 그리고 경험을 녹일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하는 편이 생소한 소재를 쓰는 것보다 스토리 구상에 있어서 훨씬 나을 겁니다.]
“말씀하신 것을 참고하여 오늘 밤부터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총장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여태껏 총장님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허, 의욕이 넘치시니 논의가 빠르게 진행되는군요. 그럼 다음으로 두 번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보니 아르마이스 님께서는 이미 성공한 웹소설의 특징을 모두 포착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필력과 에피소드 구성 능력이 부족하셔서 그동안 고생을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총장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대화가 길어짐에 따라 밤은 점점 깊어져 갔지만, 이야기를 듣는 내 눈빛은 더욱 열기를 띠고 있었다.
[아르마이스 님께서 알고 계시는 성공 공식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필력과 창의력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를 위한 좋은 방안이 마련되어 있고요.]
“아르마이스의 의지를 활용하자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대화를 마치면 미션을 받고 쉬지 않고 수행하세요. 아르마이스 님께서 미션 수행과 소설 쓰기를 병행하시면 저는 기존에 했던 것처럼 글에 대한 피드백을 계속 드리겠습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속도와 질을 모두 잡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겁니다.]
미르헨 총장님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저, 그리고 피드백을 하시려면 웹소설을 조금은 읽어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하, 조금 전에 들은 설명으로 감을 이미 잡은 상태라서 굳이 자료를 읽지 않아도 피드백을 하는데,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이런 벌써 오늘 하루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논의도 이만하면 끝난 것 같으니 어서 시작하세요.]
“네, 총장님. 오늘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된 것 같아서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만.]
나는 미르헨 총장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화면을 종료했다.
‘그래, 우선 미션 먼저 받자. 총장님께서 필력과 창의력을 올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미션을 수행하면 좋을까?’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사용자의 욕망에 맞춰 미션이 생성됩니다.>
<목표: 2주일 안에 카산트 대륙에서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3권을 골라 필사하십시오.>
<보상: 필력, 창의력 LV UP.>
‘컴퓨터로 워드 작업 하는 것도 상관없으려나?’
미션 창을 보며 고민을 하던 그때, 내 마음을 읽은 시스템은 어드바이저 기능을 활성화했다.
<컴퓨터로 받아 적는 것도 필사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케이, 그럼 당장 오늘부터 작업에 들어가야겠다.”
원래는 어드바이저를 통해 미션 선택 기능을 더 알아보려 했지만, 시스템이 내 욕망을 읽고 미션을 자동 생성해 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굳이 설명을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미션을 받은 나는 아르마이스의 의지를 종료하고 아카이브를 작동시켰다.
‘이중에서 고르면 되겠어.’
아카이브를 켜고 소설을 검색하자 카산트 대륙에서 시기별로 유행했던 소설 목록이 쭉 떴다.
마음 같아서는 10권 가깝게 쓰인 대하소설을 필사해서 실력을 키우고 싶었지만, 2주라는 시간적 제약을 고려해서 한 소설 당 분량이 1,000페이지가 넘지 않도록 안배했다.
‘좋아, 바로 시작하자.’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고른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작업에 돌입했다.
카산트 대륙의 소설은 현실 세계의 그것과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고 필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명작들을 필사하거나 읽으면서 영감을 얻는 것을 떠올리면 창의력을 키우는 데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기간이 2주일이라고 해서 꼭 맞춰서 할 필요는 없어. 잠을 줄이면서 일하면 1주일 안에도 끝낼 수 있을 거야.’
필사 외에도 복싱 훈련과 격기술 수업을 병행해야 해서 다소 부담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큰 목표를 세운 만큼 휴식을 최소화하고 단련에 전념하면 어떤 스케줄도 소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토요일 아침, 아침밥을 대충 때우고 집을 나섰다.
오늘 오전에 관장님과 훈련을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응? 문이 열린 것을 보면 관장님이 오신 것 같긴 한데…….’
정선 체육관에 도착한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백성철 관장님은 평소에도 아침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기에 이른 시각에 체육관을 가도 샌드백 두들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체육관은 불도 켜지지 않고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진우야, 이쪽이다.”
“사무실에 계셨어요?”
백성철 관장은 체육관 안쪽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각오는 제대로 하고 온 거냐?”
“네, 관장님.”
나는 퀭한 얼굴을 한 관장님을 보며 힘차게 대답했다.
탁상 위에는 끄적거리다 만 메모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관장님께서는 나와 통화를 한 이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내내 일을 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신 거죠? 너무 피곤해 보이시는데…….”
“하하, 어제 너랑 통화를 마치고 훈련 일정 짜느라 무리를 좀 했어. 그것보다 선수 등록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친구에게 부탁을 해 놔서 오늘 중으로 공문이 보내질 것 같아요.”
“오, 그렇게나 빨리? 그러면 나도 부회장님에게 미리 연락을 드려야겠군.”
어젯밤, 나는 채원이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도와주겠다는 그녀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꼼수를 쓴 것 같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잖아.’
윤채원네 할아버지는 성문고등학교 이사장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통해 일을 처리하면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이는 그대로 적중했다.
그녀는 교장 선생님께 따로 이야기를 드렸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장을 보냈고 공문이 보내졌다는 사실도 따로 알려 줬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수 한두 명 길러 본 것도 아닌데, 고생은 무슨.”
배성철 관장은 김정욱의 재능을 아득히 뛰어넘는 관원의 등장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작업에 임했다.
“진우야, 너 평소 체중이 어느 정도 되냐? 선발전 접수하려면 체급을 결정해야 하거든.”
“77kg에서 78kg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매력 스탯을 올린 후 내 키는 178cm가 되었다. 이 키에 적정 체중은 68~72kg 사이였지만,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근육이 붙어 체중은 증가한 상태였다.
“고등부 선발전은 총 10체급으로 이루어져 있어. 보통 너 정도 체격을 가진 선수면 감량을 해서 웰터급이나 미들급에서 활동하는데, 프로가 될 것을 생각하면 웰터급으로 시작하는 게 나쁘지 않아.”
“흠, 그럼 웰터급으로 출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등부 웰터급은 64kg 이상 69kg 이하로, 아마추어에서는 라이트 미들급으로 분류됐지만, 프로 복싱에서는 슈퍼 라이트와 웰터급에 해당하는 체급이다.
‘이왕 하는 거 대세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웰터급으로 체급을 정한 데에는 관장님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한 부분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웰터급에 스타성을 갖춘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체급과 대전료 사이에 특별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스타성을 갖춘 선수들로부터 승리를 거두면 인지도는 오르기 마련이고 이는 소득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관중들이 중량급 선수의 강한 펀치력에도 열광하기도 하지만, 화려한 테크닉과 속도감 있는 경기도 좋아한다고 판단한 것도 결정에 한몫했다.
“오케이. 그럼 앞으로 훈련 일정을 알려 주마. 내가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요즘 방학은 한 달도 안 되더라고. 따라서 새벽에 훈련하는 것으로 부족한 시간을 보충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네, 상관없습니다.”
이미 마음을 굳게 먹고 온 나로서는 아침 일찍부터 시간을 할애해 주는 관장님에게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훗, 그래 선수가 되기로 결정했으면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지. 그리고 저녁에는 고등학교나 체육관들을 돌아다니면서 스파링을 할 거야. 어제 관장들에게 연락을 돌려서 스파링 일정을 잡느라 고생 꽤 나 했으니까 우리 한번 제대로 해 보자.”
백성철 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훈련 일정을 차분히 설명했다.
“저, 관장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녀석이, 하필 이 타이밍에 화장실이냐? 어서 다녀와.”
말을 마친 나는 급하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후, 깜짝 놀랐네.’
나는 허공에 뜬 화면을 보며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목표치를 설정합니다.>
<목표: 백성철 관장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소화하십시오.>
<보상: 체력, 힘, 민첩성, 정신력 LV UP.>
평소에도 종종 뜬금없는 포인트에 미션이 주어졌기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보상 내용을 확인한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하나의 미션으로 4가지 스탯이 동시에 오르다니…… 이런 보상이라면 더 힘든 미션이라도 기꺼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상이 큰 만큼 과정은 만만치 않을 거야. 어쨌든 미션을 수락하자.’
나는 미션을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미션 창을 껐다.
“저, 왔어요.”
“자식,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김이 다 샜잖아.”
“새벽 훈련하고 스파링 모두 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크흠, 그래.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한번 열심히 해 보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백성철 관장은 어느새 다시 진지해졌다.
“월요일 새벽 4시 30분까지 체육관으로 나와라. 실내 훈련은 월수금 진행할 거고 야외 훈련은 화목토로 할 예정이다. 실내 훈련 때는 미트 훈련과 기본기를 다듬을 거고 야외 훈련 때는 체력 및 근력 향상에 집중할 거니까 참고해라.”
“네, 관장님.”
“곧 있으면 선발전이라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어. 전국체전 우승에 비하면 서울 대표 선발전이 쉬운 건 사실이지만 방심은 금물이야. 그러니까 이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해 보자. 그리고…….”
백성철 관장님은 이후에도 여러 이야기를 꺼내며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해서 말해 줬고 그렇게 토요일 오전은 흘러갔다.
* * *
점심시간이 막 지난, 이른 오후.
나는 이규석 선배님을 만나기 위해 강남의 한 커피숍에 도착했다.
“작가님, 이쪽입니다.”
“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는 나를 영입하기로 정한 뒤로는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쓰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하, 제대로 된 작품 하나 쓰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님 소리를 들으니까 조금 부끄럽네요. 그냥 학교 후배를 대하듯 편하게 대해 주세요.”
오랫동안 듣고 싶던 말이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은 상태라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선배님은 이런 나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대화를 이어 갔다.
“사람은 본인이 가진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어야 프로 의식도 생기고 작업에 대한 열정도 커지는 법입니다. 호칭이 불편하다면 정정해 드릴 수는 있지만, 저는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럼 선배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편히 불러 주세요.”
설명에 납득이 된 나는 호칭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