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9화 각성 (4)
“스트레칭 끝났으면, 이쪽으로 와 봐.”
백성철 관장은 체육관 구석에 놓인 펀칭볼 앞으로 나를 불렀다.
“복싱을 잘하기 위해서는 테크닉, 파워, 스피드뿐만 아니라 상대 선수의 리듬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해. 내가 지금부터 시범을 보일 테니까 잘 봐.”
“네.”
나는 관장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시범이 이어졌다.
긴 막대에 원형의 펀칭볼이 달린 기구는 약간의 충격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무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관장님은 현란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펀칭볼을 여유롭게 맞히며 능숙한 모습을 선보였다.
“대단하시네요.”
“훗, 어때 너도 할 수 있겠어?”
“흠, 일단 해 봐야 알 거 같긴 하지만 연습이 필요할 것 같네요.”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운동이라 확신이 서진 않았다.
“이게 얼핏 봤을 땐 어려워 보여도 사실은 되게 쉬운 거야. 이 펀칭볼이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원상태로 돌아오게 되어 있거든.”
“정중앙에 도착할 때에 맞춰서 펀치를 뻗으면 된다는 이야기네요.”
“오, 운동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해력도 제법인데?”
백성철 관장은 자신의 설명을 단숨에 알아듣는 제자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경험이 좀 쌓인 뒤에야 가능하겠지만, 펀치의 세기로 리듬도 조절할 수 있어.”
“세기에 따라 반동의 크기가 다를 테니까요.”
“하아, 이래서 제자가 너무 뛰어나면 피곤하다니까? 너 내 말을 듣기 싫어서 일부로 그러는 거지? 그럼 이 훈련의 진정한 의미가 뭘까? 이것도 맞히면 너를 진정한 복싱 천재로 인정하마.”
내놓는 설명마다 금세 알아듣는 내 모습에 오기가 생긴 관장은 장난스러운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다양한 리듬에 적응하여 적절한 펀치 타이밍을 잡기 위함이 아닐까요?”
“됐다, 됐어. 이젠 놀랍지도 않다.”
내가 막힘없이 대답하자 관장은 혀를 내두르며 푸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선수들은 각자 고유의 리듬을 갖고 있어. 사람들은 샌드백 치기만으로 타격 실력이 늘 것으로 생각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대를 대상으로는 효율적인 훈련이 아니야.”
백성철 관장은 말을 함과 동시에 스웨이와 더킹을 시전했다.
“어떠냐, 빠르지?”
“네, 웬만한 선수들은 스치기도 어렵겠네요.”
“더킹, 스웨이, 위빙이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불리긴 하지만, 타격점의 변화로 상대의 펀치를 피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아. 하지만 이와 같은 움직임에도 결국 패턴이 있기 마련이지. 자, 이번엔 네가 내 펀치를 한번 피해 봐라.”
“알겠습니다.”
나는 가드를 올리고 공격에 대비했다.
잠시 후, 관장님은 가볍게 잽을 날리며 포문을 열었고 난 가드와 회피 기술을 적절히 섞어 이를 방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공격은 점점 먹혀들기 시작했다.
“야, 제대로 좀 해 봐.”
“아, 네.”
이후에도 공격은 계속 이어졌고 나는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백성철 관장님은 잽과 스트레이트를 활용한 간단한 공격으로 일관했고 난 방어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하자.”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가드를 내렸다.
“해 보니까 어때?”
“제가 요리조리 피하려고 해도 펀치볼을 치듯이 간단히 맞히시네요.”
“그래, 바로 그게 핵심이야.”
백성철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떤 점이 핵심이라는 건가요?”
“펀치볼이 결국 중앙에 돌아오는 것처럼 사람의 얼굴도 기술을 쓴 뒤에는 원래 있던 곳으로 오기 마련이야. 그리고 그때가 펀치를 날려야 할 적절한 타이밍인 거지.”
그는 주먹을 쭉 뻗으며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이 훈련이 왜 필요한지 이제야 제대로 알겠네요.”
“그래, 머리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소 체험해야 훈련의 효용을 깨닫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것 외에도 여러 훈련들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기대해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장님.”
“감사 치레는 나중에 우승하고 받도록 할게. 자, 이제 펀치볼을 쳐 봐.”
관장님은 손사래를 치며 나를 펀치볼 앞으로 이끌었다.
나는 이미 시범을 본 상태였기 때문에 훈련 방식에 대해서는 숙지가 된 상태였다.
허공에 조심스럽게 잽을 뻗으며 간을 재던 나는 가볍게 펀치볼을 건드려 봤다.
휙휙.
손을 대자마자 펀치볼은 다양한 방향으로 쓰러졌다 다시 튀어 올랐다.
관장님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펀치볼을 눈으로 좇는 날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해가 빠르다고는 하지만, 경험 없이 바로 잘하는 거는 무리일 거야. 훗, 우왕좌왕 대는 게 예상대로네. 그런데 은근히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처음에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펀치볼을 맞히는 데만 급급했던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정확한 자세로 물 흐르듯 타격하는 게 가능해졌다.
‘리듬과 움직임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동체 시력만 좋으면 다 해결될 문제였어.’
인간 샌드백 알바 이후, 동체 시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바 있었다.
따라서 펀치볼과 연결된 바가 빠르게 흔들린다고 해도 내 눈에는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원리를 깨달은 이후, 나는 바의 움직임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정중앙으로 다시 돌아올 때만 정확히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앞서 백성철 관장이 보여 준 것과 같은 무브먼트를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넌 진짜 못 하는 게 뭐냐?”
“이게 다 관장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잘 가르친다고 해서 그렇게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휴, 모르겠다.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봐.”
이후 훈련은 계속 이어졌다.
관장님은 펀치볼을 치는 내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간간이 자세를 교정해 줬다.
그리고 추가로 진행된 훈련도 함께 참여하는 등 열정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헉헉, 고생하셨습니다. 저, 관장님 아까부터 저랑 같은 페이스로 운동하시던데 힘드시지 않으세요?”
“훗,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놈이 누굴 걱정해?”
관장님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핀잔했다.
“저야, 관장님이랑 같이 하면 동기 부여도 되고 좋지만, 괜히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건 아닌가 걱정돼서 한 말이에요.”
“널 챔피언으로 만들려면 내가 먼저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 네.”
백성철 관장의 말씀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냥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네가 앞으로 소화할 훈련들은 내가 현역 때 즐겨 했던 것들이야. 나중에 몸 상태 어느 정도 돌아오면 나랑 스파링을 종종 해야 하니까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청산유수네. 너 나랑 스파링한다는 것의 의미는 알고 그렇게 쉽게 알겠다는 말이 나오냐?”
“스파링이라면 저번에 해 봤잖아요. 흠…… 제가 특별히 숙지해야 할 거라도 있나요?”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저번에 애기 장난같이 한 게 무슨 스파링이라고 그래. 몸 상태 올라오면 미리 공지해 줄 테니까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
“아니, 설마 저를 상대로 진지하게 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제자가 시합도 나가기 전에 다치는 불상사를 보고 싶은 건 아니시잖아요.”
슈퍼 미들급 동양 챔피언을 했던 백성철 관장은 당대에 꽤나 유명한 복서였다. 비록 세계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국내에는 적수가 없었고 세계 랭킹 8위에서 12위를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은퇴한 지 10년이 지났다고 하나 체육관을 운영하며 틈틈이 운동을 해 왔고 시합을 통해 쌓인 센스는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풀 스파링으로 붙으면 십중팔구 깨질 게 분명했다.
“뭐, 다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힘 조절은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실전과 최대한 가깝게 임할 예정이다.”
“체급 차이도 많이 나는데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실전에 가까운 강도로 스파링을 진행할 거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진우야, 네가 정말 챔피언이 되고 싶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져야 한다. 나도 시합을 준비할 때면 나보다 위 체급에서 활동하는 선배님들과 무수히 많은 스파링을 했어. 다친다, 힘들다 이런 이야기는 일단 해 보고 나서 하는 게 어떨까?”
평소 장난스러운 태도로 날 대하던 관장님은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관장님 말씀이 옳았다.
복싱을 제대로 하기로 결심한 이상, 뭘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건 기본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훈련이든 군소리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바로 그거야. 아, 오늘 저녁에 명암고등학교에서 스파링을 하기로 했으니까 학교 끝나면 바로 체육관으로 와라.”
백성철 관장은 결의에 찬 내 얼굴에 흡족해하며 말했다.
이후에도 1시간가량 아침 운동은 더 이어졌고 그와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후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진우야, 방학 때 자율 학습 신청할 거야? 담임이 오늘까지 인원 파악을 하라고 했거든.”
반에 도착하고 짐을 풀던 나에게 반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
“흠, 그렇긴 한데 담임이 너한테는 뭐라고 할 수도 있어.”
반장은 나에게 바짝 붙어 귓속말을 했다.
‘평소에는 날 본 척도 안 하던 놈이 징그럽게 왜 이래? 그것보다 뭔가 이상한데?’
그는 김준석이 전학을 간 이후, 나에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힘의 유무에 따라 대하는 방식을 달리하는 녀석과 말을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지만, 반장의 말에 어폐가 있는 것을 간파한 나는 질문을 던졌다.
“자율 학습 여부는 선택 사항 아니었어?”
“응, 그렇긴 한데 담임에게 자율 학습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도 있나 봐.”
“뭘 근거로 학생에게 자율 학습을 권한다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담임 말로는 교칙에 의거해서 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이라서…….”
반장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모습에 움찔했다.
“담임이 뭐라 하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일단 자율 학습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해 줘.”
“으응, 알았어.”
“그리고 정보 알려 줘서 고마워.”
“아니야, 당연히 알려 줄 수 있는 건데 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내가 그래도 반에선 담임하고 가장 친한 편이라 이것저것 듣는 게 많거든.”
“그래, 앞으로도 종종 부탁할게.”
예전에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던 터라 굳이 상대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자 주눅 들어 있던 반장은 금세 표정을 펴고 쾌활한 태도를 보였다.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편하긴 하네.’
상황에 따라서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이 불편했지만, 이 또한 사회생활의 단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잠시 후, 담임이 들어와 반장으로부터 명단을 받았다.
“여기 있습니다.”
“고생했다.”
“흠, 이거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
“네? 네, 선생님. 확실히 물어보고 체크했습니다.”
담임이 눈을 치켜뜨고 묻자 반장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어, 들어가 봐.”
반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너희들한테 공지할 게 있다. 우리 학교는 옛날부터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해 줬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학교의 방침을 남용하는 학생들이 생기고 있어. 여기, 체크 안 한 사람 중에 자율 학습을 반드시 해야 하는 친구가 눈에 들어오는구나. 안 그래 진우야?”
담임은 나를 노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절 부르셨습니까?”
“여기서 진우가 너 말고 누가 있겠냐? 점심 먹고 바로 상담실로 와라.”
“흠…… 알겠습니다.”
“자식이, 대답하고는.”
담임은 나의 시원치 않은 답변에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
그는 당장 나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아이들의 이목을 고려해서 상담실에서 용건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