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35화 (35/122)

35. 9화 각성 (5)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똑똑

식사를 마친 나는 상담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네.”

“앉아라.”

명령조로 말하는 담임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럴수록 더 태연하게 굴어야 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너 이번 기말고사 성적은 확인해 봤어?”

“네, 그런데요?”

“그런데요? 지 성적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텐데, 뭐가 이렇게 당당해?”

그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당당한 게 아니라 이상한 점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저보다 성적이 낮은데도 자율 학습 안 하는 친구들도 있던데요? 설마, 이전 김준석 때처럼 학생들을 차별적으로 대하시는 건 아니죠?”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사람은 저마다 적합한 훈육법이라는 게 있다. 중간고사 때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애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어? 공부에 소질이 있는 학생을 방치하는 건 담임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

얼핏 들으면 나를 위하는 말 같았지만, 학교생활 내내 나에게 무관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신뢰가 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뭐라 하시든 저는 자율 학습을 안 하겠습니다.”

“이 자식이, 계속 그런 식으로 할 거야?”

“준석이가 전학 간 이후, 저에게 잘해 주는 친구들이 제법 생겼습니다.”

“그래서?”

담임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애들한테 한번 물어보려고요. 누구는 자율 학습을 빠져도 되고 누구는 왜 안 되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저에게 아직 파일이 있다는 건 잊지 않으셨죠?”

“…….”

말문이 막힌 그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선생님, 저는 그저 조용히 학교를 다니고 싶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나는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말귀가 어두운 사람은 아니니까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야. 당분간 피곤할 일은 없겠어.’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담임처럼 교활하고 악한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방식이 잘 통했다.

나는 아무 일이 없던 사람 마냥 홀가분한 기분으로 반으로 돌아왔다.

* * *

문학부 활동이 이루어지는 교실.

“애들아, 곧 있으면 방학인데 글들은 잘 쓰고 있어?”

최근에 동아리 내에서 소란을 피웠던 김호준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뻔뻔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냥 그렇지 뭐.”

엄재웅은 넉살 좋게 다가오는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진우야, 넌 요즘 글 안 써? 무료 연재란 가 보니까 새로운 에피소드가 안 올라오더라고.”

중학교 때부터 썼던 필명을 알고 있던 김호준은 우리가 올리는 글을 틈틈이 확인하고 있었다.

연재 성적이 좋지 않은 우리의 글로부터 위안을 얻는 악취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님들 반응이 안 좋아서 다 엎고 새로 써 보려고.”

“오, 어쩐 일로 그런 과감한 선택을 했데? 예전에는 작품이 망해도 애착을 갖고 열심히 썼잖아.”

“내가 할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대화는 나중에 하자.”

나는 김호준을 무시하고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쓰는 데 집중했다.

‘무료 연재란에서도 고전하는 애가 새로 써 봤자지. 쯧쯧.’

그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규석 선배님이랑 연락은 자주 해?”

“후, 알아서 뭐 하게.”

김호준의 질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나는 살짝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내가 선배랑 연락을 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말하는 걸 보니까 만난 게 분명하네.”

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래, 맞아. 최근에 만나서 커피 한잔하면서 대화를 나눴어.”

“와, 진짜? 이규석 선배님이면 출판업계에서 상당히 거물로 알려진 분이시잖아. 무명의 작가들 중에 재능있는 사람들을 발굴해서 회사를 빠르게 키워 냈다고 들었어.”

옆에서 듣던 엄재웅은 흥미를 드러내며 대화에 참여했다.

“둘이 어떻게 따로 보게 된 거야?”

“일전에 공모전 입상자들끼리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눈에 띄게 돼서 선배님과 연을 맺게 됐어. 아마 운이 좋으면 함께 일하게 될지도 몰라.”

질투심이 강한 김호준을 자극하면 피곤해질 것을 염려하여 계약 사실을 숨겼다

“분명 네가 쓴 글에서 뭔가를 발견하신 걸 거야. 그동안 열심히 해도 성과를 못 봤는데, 드디어 빛을 발하나 봐.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너한테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웅이는 나를 격려해 주었다.

“선배님께서 사업적 수완은 대단하실지는 몰라도 사람 보는 안목은 부족하신 것 같아.”

“후, 또 시작이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호준은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훼방을 놓으려 했고 난 그런 녀석을 바라보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너보다는 나를 스카웃하는 게 맞는 거잖아.”

“야, 공모전에서 진우한테 진 주제에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엄재웅은 김호준의 가시 돋친 말에 대신 발끈하고 나섰다.

“공모전에 제출한 글은 단기간에 대충 쓴 거라 진정한 승부라고 볼 수 없어. 나랑 진우의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건 다름 아닌 웹소설 성적이야. 소수의 심사 위원보단 많은 독자들의 판단이 더 공신력이 있지 않겠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건 네가…….”

“재웅아, 난 괜찮으니까 그냥 우리 할 일 하자.”

어차피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게 뻔했기에 김호준의 말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그의 말이 내 관심을 끌었다.

“무료 연재란에서도 실패한 작품이면 말 다 한 거 아니야? 너희들이 재수 없다고 할까 봐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10월부터 푸른닷컴에서 차기작을 연재하기로 했어. 그것도 무려 독점으로 말이지.”

“푸른닷컴에 연재를 한다는 것보다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말하는 네가 더 대단하다.”

엄재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내 눈앞에 미션 창이 하나 떴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추가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목표치가 설정됩니다.>

<보상이 설정됩니다.>

<목표: 김호준과의 승부에서 승리합니다.>

<보상: 매력: LV UP, 필력 경험치 +50%>

추가 미션이 달갑긴 했지만, 현재 진행하고 있는 미션들도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생각했다.

‘승부라는 건 아마 연재 성적을 말하는 거겠지? 그건 그렇고 보상으로 매력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명성이나 인기가 매력과 연동되어 있나 봐.’

나는 화면에 뜬 문구를 보며 나름의 분석을 했다.

“이렇게까지 설명해 줘도 날 인정하지 않는 너희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 하냐?”

“잘됐다. 나도 마침 푸른닷컴에서 연재를 할 참이었는데, 너한테 정보라도 좀 들어야겠다.”

“오, 그런 배우려는 자세 아주 좋아. 그런데 잠깐,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김호준은 우쭐하는 표정을 짓다가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조만간 푸른닷컴에서 데뷔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심사 과정이 남아 있긴 해서 너처럼 연재 확정이 된 건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너랑 비슷한 시기에 연재에 들어갈 수도 있어.”

“와, 그럼 정식으로 웹소설 작가가 되는 거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까?”

나는 기뻐하는 재웅이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감성 출판사하고 계약이라도 한 거야?”

우리를 눈꼴사납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김호준은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선선히 계약 사실을 인정했다.

“감성 출판사에서 밀어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연재만 한다고 다 같은 작가가 아니야. 일단 심사나 먼저 통과하고 이야기하자.”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던 김호준은 계약이 체결됐다는 말에 태도가 돌변했다.

“1년 빨리 데뷔했다고 되게 유난 떠네.”

“나는 이미 두 작품을 완결한 2질 작가야. 너 같은 놈이랑 차원이 다르다고.”

“하긴, 네 눈에는 내가 작가가 아니라 초보자로밖에 안 보이겠지.”

“난 너희랑 애당초 재능부터가 다른 사람이야. 중학교 때 그렇게 겪고도 모르겠어?”

김호준은 나와 재웅이를 벌레 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네. 하지만 네가 우리보다 나은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풋, 두고 볼 게 뭐 있어? 무료 연재란에서도 외면받는 너 같은 놈이랑 비교되는 거 자체가 모욕이야. 이규석 선배님께서 뭐라도 씌었나 봐. 운 좋게 교내 공모전 하나 당선된 애를 뭘 믿고 지원하신다고 쯧쯧.”

“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그는 계속되는 모욕에도 불구하고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기가 생겼고 급기야 이규석 선배를 거들먹거리며 조롱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하지만 녀석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김준석을 쓰러뜨린 이후로 적어도 학교 내에선 나를 건드릴 수 있는 놈은 없다는 거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김호준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했냐고.”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천지 분간 못하고 말을 쏟아 내던 녀석은 내가 주는 위압감에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언제 이렇게 몸집이 커진 거지? 괜히 붙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어. 강진우가 김준석을 쓰러뜨리고 전학 보냈다는 소문이 설마 진짜였나?’

김호준은 아이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한테 욕하는 건 그렇다 쳐도 내 주변 분들에게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 미안해 진우야…….”

“휴, 아니다. 그것보다 9월에 작품 연재를 시작할 것 같은데 서로 승부를 보는 게 어떨까?”

아무리 얄밉다고 해도 어렸을 적 추억을 잠깐 보냈던 놈이라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화를 가라앉히고 미션 수행에 필요한 대화를 꺼냈다.

“승부?”

김호준은 승부라는 말에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그래, 들어 보니까 연재 시기가 겹치는 것 같은데 누구의 작품이 더 인기가 많은지로 승부를 보자.”

“지금 나랑 작품으로 대결을 하자는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하아, 같이 겸상 좀 해 줬다고 이젠 아예 맞먹으려 드네?”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나를 두려워했던 사람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 정확히 네가 말한 그대로야. 설마 질까 봐 두려운 거야?”

“개소리하지 마. 그래, 어디 한번 붙어 보자.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말해 봐.”

나는 의자에 앉아 느긋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이기면 선배님께 작가 활동을 포기한다고 하고 출판사에서 나와라. 분수에 맞지 않게 호사를 누리는 것은 다른 작가들에게도 민폐라고.”

“야, 김호준 너 말 다 했어?”

김호준의 말에 화가 난 엄재웅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난 그와 달리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좋아, 그럼 만약 네가 진다면?”

“풋,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지면 현재 일하고 있는 출판사랑 계약을 해지하고 1년 동안 절필할게.”

“오케이, 그렇게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야기가 다 된 것 같으니까 네 자리로 가는 게 어때?”

“어, 어. 그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고 판단한 나는 녀석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웬만한 것으로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김호준만큼은 한 공간에 오래 있는 게 힘들었다.

그는 나의 싸늘한 말에 민망함을 느끼며 돌아가려다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진우야, 안녕.”

“응, 채원아.”

윤채원은 여느 때처럼 이미나와 함께 우리 옆으로 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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