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10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1)
‘저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 뭐가 좋다고.’
김호준은 윤채원을 자신과 견줄 만한 유일한 라이벌이자 매력적인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호감이 있던 호준은 웹소설 시장을 평정하여 부와 명성을 얻은 뒤 커플이 되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10대 작가들 사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나가는 윤채원과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안중에도 없었던 내가 그녀와 친해졌을 뿐만 아니라 본인과 같은 웹소설 작가로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되자 속이 뒤틀릴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아주 박살을 내야겠어.’
그는 주먹을 부서질 듯이 쥐며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후, 앞으로는 더 바빠지겠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새 소설에 관한 구상을 끊임없이 했다.
“진우야, 뭘 그렇게 적고 있는 거야?”
“잠깐만, 이것만 쓰고 알려 줄게.”
한참 떠들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노트를 끄적였다.
나는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김호준과 달리 절박한 심정으로 승부에 임하고 있었다.
* * *
동아리 활동을 마친 나는 곧장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성철 관장님은 명암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차를 체육관 앞에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은 스파링이 끝나고 먹자. 배 안 고프지?”
“네, 전 괜찮아요. 관장님.”
“스파링 상대에 관해서는 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일단 타라.”
관장님과 나는 차에 탑승했다.
“명암고등학교가 명문으로 불리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간이 인재들이 배출되는 학교야. 너랑 붙을 선수는 이종호라는 앤데 작년 지역 선발전에서 준우승까지 한 놈이더라고. 진우야, 듣고 있어?”
“아, 네 듣고 있어요.”
작품 2개를 동시에 작업해야 했던 나는 촌음을 아끼며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아까부터 내내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 잠시 집중을 못 했습니다.”
“휴, 네가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방심은 금물이야. 아, 그리고 그 학교 코치가 내 후배니까 가면 인사 잘해라.”
“네, 관장님.”
백성철 관장은 첫 원정 스파링인 만큼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열심히 경청했다.
대화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명암고등학교에 도착했다.
‘관장님이 말씀하신 분인가 보다.’
차에서 내려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자 코치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성훈아, 내가 일전에 이야기한 친구가 이놈이야.”
관장님은 인사는 생략하고 곧바로 나를 소개했다.
“하하, 그렇군요. 반갑다. 형님이 네 자랑을 하도 해서 어떤 친군가 궁금했는데 오늘 이렇게 보게 되는구나.”
“안녕하세요, 강진우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 많이 배우고 가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공손히 인사했다.
“오, 네 선수는 벌써 몸을 풀고 있네?”
“네. 형님께서 인정한 사람이 궁금하다며 며칠 전부터 훈련도 열심히 하더라고요.”
동양 챔피언이자 랭커였던 백성철 관장은 국내 중량급 선수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유명했다.
이종호는 이런 관장님을 자신의 롤 모델로 여기고 있었는데, 나를 최고의 재능이라며 극찬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긴 상태였다.
“진우야, 우선 가볍게 미트 먼저 치자.”
“알겠습니다.”
관장님은 미리 준비해 온 미트 글러브를 손에 낀 뒤 몸 푸는 것을 도와줬다.
팡팡.
깔끔한 타격음이 체육관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 집중됐다.
“종호야, 긴장을 좀 해야겠는데? 기본기가 아주 꽉 잡혀 있는 놈이야.”
“실력은 좀 있는 것 같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체급이 깡패라는 말이 왜 있겠어요.”
이종호는 박정훈 코치의 조언에도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준비 다 됐으면 링 위로 올라와 주세요.”
박정훈 코치는 우리를 바라보며 스파링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연습한 대로만 해 보자.”
“네, 관장님.”
“자, 가자.”
백성철 관장은 내 어깨를 한 차례 두들긴 뒤 나를 데리고 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양 선수 모두 중앙으로”
코치의 부름에 나와 이종호는 링 가운데로 모였다. 184cm에 달하는 키와 건장한 체구를 가진 그는 나를 잠시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3라운드가 되기 전에 KO가 나오면 어떻게 되나요?”
“헤드기어를 쓰고 하는데, KO가 나오겠어? 그리고 너희 둘은 어차피 체급도 달라서 서로 실력 점검만 하면 되지 너무 빡세게 할 필요는 없어.”
박정훈 코치는 스파링이 과열되는 것을 경계했다.
“실력이 늘려면 연습도 실전처럼 해야 하는 법이죠. 안 그래?”
“네, 뭐 저는 상관없습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건들거리며 반말을 하는 상대가 그리 고깝게 보이지는 않았다.
원래는 가볍게 임할 예정이었지만 예의가 없는 놈에게 굳이 얕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괜찮으니까 선수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냅 둬.”
관장님은 손을 저으며 상관없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자 박정훈 코치는 한숨을 쉬며 나와 이종호에게 당부했다.
“휴, 형님도 참. 알겠습니다. 너희도 들었지? 원래는 매스 스파링으로 가볍게 하려고 했는데, 모두의 요청으로 풀 스파링으로 바꾸도록 할게. 대신 부상 우려가 있으면 바로 중단할 거니까 서로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자, 그럼 양 선수 모두 코너로.”
나는 코너에 서서 이종호를 차분히 지켜봤다.
가드를 올리지도 않고 양팔을 로프에 올린 채 여유를 부리는 꼴이 날 우습게 보는 게 분명했다.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하자.’
생각한 것과 달리 내 양 주먹에는 평소보다 더 강한 힘이 들어갔고 난 시작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땡!
심판의 수신호와 함께 종이 울렸다.
나는 가드를 올린 채 상대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훗, 사소한 도발에도 이렇게 쉽게 흥분하다니.’
이종호는 거리낌 없이 치고 들어오는 나를 여유 있게 바라보며 잽을 뻗었다.
미들급의 중량에서 뻗어 나오는 묵직한 잽은 파괴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눈에는 너무 느려 보였다.
난 고개를 돌려 가뿐히 잽을 피한 뒤 레프트 바디로 간장을 후려쳤다.
“윽.”
타격은 정확하게 꽂혔고 체육관에는 외마디 탄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추가 공격을 막기 위해 복부를 가드하며 백스텝을 밟았다.
그러나 도망갈 틈 따위를 줄 생각이 없던 나는 녀석을 구석에 몰아 놓고 힘껏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해라!”
얼핏 보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쏟아 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내 펀치는 나가는 족족 녀석의 급소에 적중했고 이종호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종호야, 괜찮아?”
심판을 보고 있던 박정훈 코치는 제자의 뺨을 때리며 의식을 차리게 도와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경황이 없던 이종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떻게 되긴, 끝났지 뭐.”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링 바닥에 누워 있는 이종호에게 다가가 목례를 했다.
“진우야, 왜 그렇게 급하게 경기를 운영해.”
백성철 관장은 어느새 링 위로 올라와 내 옆에 와 있었다.
“실전처럼 진지하게 하자고 주문하셔서 말씀을 따른 것뿐이에요.”
“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하면 어떻게 하냐? 지금 넌 실전 경험이 부족한 상태라 조금 천천히 경기를 진행하면서 감각을 끌어올려야 한단 말이야.”
관장은 내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핀잔을 줬다.
“형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 복싱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된 초심자라고 하셨잖아요.”
제자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박정훈 코치는 백성철 관장에게 다가가 항의 조로 이야기했다.
“진우가 복싱 경험이 한 달인 건 사실이긴 해. 하지만 내가 그 외에 다른 말도 했던 것 같은데?”
“후…… 과연 말씀대로입니다. 스파링 할 때 자세나 주먹의 궤도가 확실히 남들과는 다르더군요.”
박정훈 코치는 나를 천재라고 자랑했던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네 덕에 좋은 경험 했다. 종호라고 했나? 별일 없으면 우리랑 같이 고기나 먹으러 가지. 마무리 운동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하거든.”
“형님, 지금 종호가 밥을 먹게 생겼습니까? 아까 잠깐 대화를 나눠 봤는데 충격이 제법 커 보였다고요.”
백성철 코치는 오랜만에 후배와 회식을 하고 싶었지만, 제자가 걱정됐던 박정훈 코치는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스파링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마음에 담아 둬.”
“운동하는 애들이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너 우리 체육관에 정욱이 알지?”
“전국 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선수잖아요. 종호랑 같은 체급이라서 시합하는 것도 봤고요.”
“그럼 이야기가 쉬워지겠군. 정욱이랑 종호랑 비교해 볼 때 누가 더 훌륭한 선수냐?”
“당연히 정욱이죠. 고1이었던 작년에도 금메달을 땄던 선수와 박빙이었잖아요.”
박정훈 코치는 제자를 많이 아낌에도 실력 평가에는 냉정한 편이었다. 그는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듯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진우가 복싱 3주 차 때 정욱이를 이겼다면 믿겠어?”
“헉,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그니까 종호한테 가서 말해. 네가 진우한테 진 건 창피한 게 아니니까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고.”
관장은 헤드기어를 벗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을 찾으셨습니까?”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자기 발로 체육관에 찾아왔어.”
“그래서 정욱이가 체육관을 그만두고도 태평하셨던 거네요.”
코치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쨌든 스파링이 빨리 끝났으니까 어디 근처 가서 고기라도 구워 먹자고.”
“알겠습니다, 형님.”
박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한 뒤 이종호에게 가 앞뒤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잠시 후 모든 상황을 납득했다.
“앞으로는 페이스 조절 잘하면서 스파링 할게요.”
“뭐 그 부분은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자, 짐들 챙겨서 차에 싣고 밥 먹으러 가자.”
“네, 관장님.”
스파링을 마친 나는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화요일이 되었다.
10시가 다 된 늦은 밤.
3권의 소설을 필사하는 미션을 모두 수행한 나는 기지개를 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후, 빡세긴 했지만 그래도 다 끝냈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사용자의 미션 완료를 알려 드립니다.>
<보상: 필력, 창의력 LV 1 상승.>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Y/N>
필사 내내 켜 놓았던 아카이브를 끄고 잠시 쉬고 있는데,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나타나더니 미션이 완료됐음을 알렸다.
25%…… 58%…… 89%……
환한 빛이 나를 감쌈과 동시에 작업 진행률이 표시되었다.
‘스탯도 올랐으니까 속도를 더 높여 보자.’
이번 보상으로 창의력은 LV 3이 됐고 필력은 LV 4가 되었다.
필력이 오르면 글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좋았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다른 능력에 있었다.
창의력은 에피소드를 구상하는 능력과 큰 연관이 있었고 해당 스탯이 올랐다는 것은 앞으로 글을 더 빨리 쓸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미션을 추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아르마이스의 의지는 이전에 수행했던 필사 미션을 연장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보상은 어떻게 되는데?”
<보상: 필력, 창의력 경험치 +50%>
이전에 했던 미션이라 그런지 처음보다 보상이 적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필력과 창의력 만렙을 찍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잠깐 보류할게.”
복싱 훈련부터 소설 쓰기까지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고 10월부터 웹소설 2개를 연재할 것을 생각하면 추가 미션에 시간을 할애하기 버거운 감이 있었다. 나는 미션 창을 종료한 뒤 두 달 남짓한 시간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지 궁리했다.
[아르마이스 님, 계십니까?]
노트를 펴고 향후 계획을 빽빽하게 적고 있던 나는 나이트 아린의 목소리에 펜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