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37화 (37/122)

37. 10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2)

“네, 스승님. 저 여기 있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격기술 교본을 아카이브에 넣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산트 대륙 최고의 무술인 아르마이스식 격기술은 복싱 훈련보다 더 나은 교습법으로 판단되었지만, 전국체전과 미션 수행을 생각하여 당분간 수업을 듣지 않기로 했다.

대신 틈틈이 교본을 읽어 이론적인 부분을 익히고 집에서 자율적으로 연습을 하는 것으로 수업을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혹시 읽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절 호출해 주십시오.]

“기사들을 훈련시키느라 바쁘시지 않습니까, 어지간하면 저 스스로 익히도록 노력할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나이트 아린은 황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비 대장직과 훈련 조교를 겸하고 있어 개인 생활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르마이스 님 지원 업무를 맨 첫 번째로 놓으라는 세이라 황녀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전 괜찮으니 이해가 잘 가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편하게 부르십시오.]

“스승님께서 항상 물심양면 도와주시니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머리를 숙이고 정중히 감사의 뜻을 전하자 나이트 아린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황녀님과 총장님께서 신경 써 주시는 것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왜 저렇게 당황을 하시는 거지?”

나는 빈 화면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르마이스에 대한 존경심이 유난히 컸던 그녀는 초라했던 내 첫인상에 깊은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거듭하자 나이트 아린은 나를 다시 보게 되었고 자신의 마음을 뼈저리게 반성하는 중이었다.

“아, 모르겠다. 할 일이나 하자.”

그녀의 속내를 모르기에 생각을 그만 떨치기로 했다.

나는 아카이브에서 격기술 교본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빨리 써지네.’

지난 주말 동안 플레임 원고를 모두 웹소설화 했고 지금은 새로운 에피소드를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애당초 단편 소설 분량으로 구상을 했기에 전개 방향에 대한 깊은 사유가 없었던 상태였다. 따라서 중반부와 후반부에 쓸 스토리를 고민하느라 시간이 조금씩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탯이 오른 이후로 여러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쏙쏙 떠올랐고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좋아 이대로만 쓴다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야.’

이전에는 5,000자 이상을 쓰기 위해서 적게는 3시간 많게는 5시간이 소요됐다.

그러나 현재는 2시간이면 너끈히 한 편을 쓸 수 있게 됐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에피소드 생성이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었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모두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어 있었다.

훈련과 스파링 등 다양한 스케줄을 소화했던 나는 몸 이곳저곳이 쑤시고 피곤했다.

‘또 새벽에 나가려면 눈을 붙이긴 해야겠지?’

마음 같아서는 한 편을 더 쓰고 잠을 자고 싶었지만, 새벽 훈련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작업을 더 진행하기는 어려웠다.

‘긴장감이 약간 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다음 화에는 라이벌을 등장시켜야겠어. 그리고…….’

나는 잠들기 직전까지도 새로운 에피소드를 고민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7월 말의 어느 날, 우리는 3주간의 방학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나에게는 귀중한 시간이 될 예정이었다.

“방학이라고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돼. 특히, 자율 학습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은 스스로 알아서 할 거라고 믿는다. 아직 고3까지 멀었다고 해도 고1 때 기초를 다져 놔야…….”

담임은 방학에 앞서 잔소리를 잔뜩 늘어놨다.

“아무튼 다들 헛짓거리들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라. 이상.”

지루했던 훈화 말씀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이날 학교에서는 방학식 외에 다른 일정이 없었기에 학생들은 가방을 짊어지고 교실을 빠져나가느라 바빴다.

“오랜만에 PC방이나 가자.”

“좋아, 지는 쪽은 오늘 점심 내기다.”

“야, 그러지 말고 시내나 놀러 가자.”

아이들은 간만에 찾아온 자유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 떠들고 있었다.

‘휴, 나도 재웅이, 채원이랑 오늘 하루만 어디 놀러 갈까?’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난 마음이 살짝 흔들림을 느꼈다. 그러나 이윽고 머리를 흔들고 학교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문고등학교 도서관에는 문학부 선배들이 기증한 소설 전집들이 잔뜩 있었다.

나는 시간 관계상 소설 필사 미션을 수행하진 않았지만, 간간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미션 완료 때 받는 보상만큼은 아니지만, 특정 작업을 반복하면 관련된 스탯이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이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찾는 건 단편 소설들이 한데 묶여 있는 문학 잡지였다.

단편 소설은 짧은 분량임에도 그 안에 발단부터 결말까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공부에도 도움이 됐다.

그리고 미션은 시간제한이 있어 압박감이 컸지만, 이건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하면 됐기 때문에 부담이 없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진우야, 여기서 뭐 해.”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모여 있는 문학 잡지들을 구경하던 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안녕. 그냥 읽을 만한 소설이 있나 찾고 있었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채원이었다.

“요즘 보면 소설에 완전히 푹 빠진 것 같네? 학교에서도 맨날 스마트폰으로 글만 쓰잖아.”

“자리 잡기 전까지는 열심히 해야지. 선배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허투루 쓰면 안 되잖아.”

며칠 전, 김호준과의 대화 이후 내 실력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자극하기 위해 지나가는 말로 했다지만, 제대로 된 작품 하나 없이 감성 출판사와 계약을 맺게 된 것에 대해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작가들처럼 대회에 입상하거나 수작을 쓴 케이스가 아닌 만큼, 성과로 증명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필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푸른닷컴에 웹소설을 연재하기로 했다면서? 나도 최근에 한 출판사로부터 웹소설 출간 제의를 받고 집필 중이야.”

“오, 잘됐다. 역시, 성공한 작가라서 그런가 관계자들이 가만두지 않는구나.”

나는 내 일처럼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소설 장르는 정했어?”

“응,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쓰기로 했어. 들어 보니까 현재 이 장르가 대세인 것 같더라고.”

“맞아, 여성 작가님들 중에 현대 판타지 쓰시는 분들도 적지 않지만, 대박 난 분들은 대부분 로맨스물을 많이 쓰더라고.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예전에 네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감정선 표현이나 스토리 전개 방식이 확실히 남다르더라.”

“나도 이번에 네가 쓴 소설 읽으면서 왜 이제까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나 의아했어. 무슨 소설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엔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거듭되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윤채원은 미소를 지으며 덕담을 했다.

“휴, 난 아직 더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

“노력은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지금처럼만 해. 그리고 아까 선배님이 준 기회라고 했지?”

“어? 응. 그랬지.”

“좋은 기회가 너에게 온 건 사실이지만, 그건 선배님께서 주셨다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거야.”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힘이 난다.”

그녀의 사려 깊은 말에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그저 의례적인 말로 치부하고 가볍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윤채원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갔다.

“선배님네하고 우리 가족하고 친하다고 이야기한 적 있었지?”

“응.”

“내가 아는 선배님은 혈연, 학연으로 사람을 스카웃하지 않아. 일전에 식사 자리에서 들었는데, 친척 중에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나 봐. 하지만 선배님은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가 아니라면 단호하게 거절하셨다고 그러셨어.”

“아, 그런 일이 있었어?”

나는 어느새 그녀의 이야기 빠져들고 있었다.

“선배님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뽑지 않아. 식사 중에 너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네 글 안에서 미미하지만 대가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셨어.”

“대가는 무슨…… 칭찬이 조금 과하셨네.”

‘플레임’은 미르헨 총장님의 검수가 들어갔던 작품이었기에 선배님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미르헨 총장은 카산트 대륙에서 명성이 높은 학자로 글쓰기에 일가견이 있어 문장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즉, 선배님은 내가 쓴 소설 속에서 미르헨 총장이라는 거장의 솜씨를 발견한 것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에게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이미 연재하기로 결정된 거, 주변에서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너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어.”

“고마워 채원아.”

“훗,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하는 것 같네.”

알게 모르게 김호준의 말을 신경 쓰느라 예민해졌던 나는 윤채원의 조언에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다.

“아, 그리고 네가 도와준 덕분에 선수 등록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어.”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다. 그럼 저번에 말한 복싱 대회는 나갈 수 있는 거야?”

“응, 별일이 없으면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예전에 길거리에서 봤을 때처럼만 하면 우승은 문제없을 거야.”

그녀는 인간 샌드백 알바를 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중에 은혜는 꼭 갚을게.”

“당연하지. 이자까지 꽉꽉 채워서 돌려받을 테니까 열심히 해야 해.”

“하하, 그래.”

윤채원의 농담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후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래, 내가 가진 기회에 대해서 굳이 타인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다른 웹소설 작가들도 결국은 출판사들 눈에 띄어서 발탁된 거잖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를 구속하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지워 가며 길을 걷고 있었다.

채원이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들과 내가 작가로 데뷔하는 방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계약한 감성 출판사가 웬만한 웹소설 출판사보다 더 좋은 인프라를 갖췄다는 점이랄까?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온 행운에 의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쓸데없는 데에 감정을 소모하는 것보다 눈앞에 주어진 과제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이로웠기 때문이다.

* * *

서울 강북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

나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스파링을 하기 위해 관장님과 함께 학교에 와 있었다.

“예전에 네가 말했을 땐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확실히 물건이긴 물건이다.”

“크흠, 뭐 두고 봐야겠지만, 아직까지는 순조롭네요. 하지만 자만은 금물입니다. 우리 진우는 챔피언이 될 재목이거든요.”

나는 최근에 진행된 수차례의 스파링에서 단 한 번의 패배를 허용하지 않았다.

체급을 가리지 않고 지역 내 실력자들을 제압한 덕분에 서울 부근에서 점점 이름이 알려지는 중이었다.

이날도 관장님의 선배가 코치로 있는 학교에서 라이트 헤비급 선수와 스파링을 소화했고 평소와 같이 여유롭게 승리를 거둔 상태였다.

라이트 헤비급이 얼핏 들었을 땐, 체급 차이가 크게 나는 것처럼 들리지만, 고등부에서는 81kg 언저리의 체중이었기 때문에 상대하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볼 땐 고등부가 아니라 전국체전 일반부에 출전해도 되겠어. 고등학생이라고 딱히 참가가 제한된 것도 아니잖아.”

관장님의 선배이자 복싱부 코치를 맡고 있는 조성규는 붕대를 풀고 있는 날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은 고교 대회 먼저 평정하려고요. 일반부는 아시다시피 고인물들이 많아서 바로 우승하기는 어렵잖아요.”

백성철 관장은 나를 키울 모종의 계획이 있었지만, 그걸 굳이 선배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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