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10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3)
“그래, 차근차근하는 게 장기적으로 볼 때 더 좋을 수도 있지.”
“그것보다 요즘 들어 스파링 잡기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백성철 관장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너도 알다시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지역 선발전이 시작되잖아.”
“음, 다들 몸을 사리는 거군요.”
선배의 설명을 들은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자식, 그러니까 살살 좀 하래도.’
코치들이 스파링을 거부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시합을 앞둔 상황에서 부상을 입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나는 스파링을 할 때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진지하게 임하는 바람에 약속한 라운드를 채우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곧 선수의 사기 하락으로 이어졌기에 코치들 입장에서도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밥만 먹고 운동한 선수들 입장에서는 체급도 낮은 데다가 복싱에 입문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초심자에게 졌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어쨌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진우야, 가자.”
“그래, 잘 들어가고 나중에 소주 한잔하자.”
“네, 알겠습니다. 자, 코치님께 인사하고.”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조성규 코치에게 인사를 한 뒤 관장님과 함께 차에 탔다.
“어제 웰터급에 출전하는 선수들 명단이 나왔어. 살펴보니까 일정이 제법 빡빡할 것 같더라. 그래도 훈련을 열심히 했으니까 체력에 문제는 없겠지?”
“네, 관장님.”
복싱은 체급에 따라서 선수들 인프라 상태가 달랐다.
선수가 많은 체급의 경우 대부분 16강부터 진행이 됐지만, 인재가 별로 없는 슈퍼 헤비급 같은 곳은 4강부터 시작되는 곳도 있었다.
참고로 웰터급은 출전 선수가 16명으로 일정에 부담이 있는 편이었다.
“보고 참고해라.”
백성철 관장은 미리 뽑아 둔 명단을 나에게 건네줬다.
‘이건 뭐지?’
명단을 읽던 나는 이강호라는 이름에 동그라미 표시가 된 것을 발견했다.
“관장님, 이강호가 누구길래 표시를 하신 거예요?”
“네가 결승전에 올라가면 보게 될 확률이 매우 높은 놈이야. 서울체육고등학교 소속인데, 작년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땄고 올해는 본선 우승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어.”
“그렇군요.”
나에 대한 신뢰가 굳건했던 관장은 지역 예선 결승까지는 당연히 올라갈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하루에 경기를 몰아서 해도 되는 거예요? 다른 격투 시합이나 프로 경기 보면 시합 하나를 위해서 몇 달을 준비하잖아요.”
“야, 기껏해야 3분 3라운드인데 못 할 건 뭐냐? 내가 동양 챔피언 결정전 할 때는 12라운드씩 뛰어도 거뜬했어. 그리고 첫날만 2경기고 나머지는 다 1경기잖아.”
백성철 관장은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서울 대표 선발전은 3일간 열렸는데, 웰터급은 출전 선수가 많아 사정상 2경기를 뛰는 날도 있었다.
“내일은 오전에 가볍게 러닝만 하고 쉴 거니까 컨디션 조절 잘해.”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주말에도 강도 높은 훈련을 이어 가는 게 맞았지만, 이틀 후 열리는 대회를 생각하면 컨디션 관리를 하는 게 현명했다.
“대진표는 아마 내일 나올 거다.”
“그렇군요.”
“내일은 대진표를 보며 간단하게 분석을 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그리고…….”
이후에도 우리는 대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마 있지 않아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나는 차에서 내린 뒤 관장님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오전 러닝은 아침 11시에 할 거니까 일찍 일어날 걱정하지 말고 푹 자라.”
“네, 관장님.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관장님에게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오늘은 아예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글을 쓸 작정이었다.
기상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관장님의 차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고 나는 천천히 집 쪽으로 걸어갔다.
‘이틀 후면 복싱 첫 데뷔전이네. 시간이 참 빠르다.’
이세계의 존재들을 만난 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내 인생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치웠고 새로운 목표도 세웠다.
쉼 없이 글을 쓰고 단련하느라 몸은 고됐지만, 이전의 안이했던 삶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 * *
월요일이 되었다.
백성철 관장님과 나는 아침 8시에 만나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다음 서초동 종합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복싱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박철승이라고 합니다. 우리 서울시는 옛날부터 걸출한 복싱 선수가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페더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서울복싱협회 회장은 시합에 앞서 서울시 대표 선발전 개회를 축하하는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긴장되냐?”
“생각했던 것보다 떨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관장님의 물음에 난 덤덤하게 답했다.
보통의 선수라면 처음 출전하는 대회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했다.
‘스파링을 한 게 큰 도움이 됐어.’
지난 10일가량 스파링을 진행하면서 나보다 낮은 체급의 선수와 붙은 적은 없었다.
물론 경량급 선수의 스피드를 가진 사람과 스파링 하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 또한 훈련으로 보완이 됐다.
관장님과의 펀치볼 훈련은 민첩성과 동체 시력의 향상을 가져다줬다.
비록 스탯 레벨이 오른 건 아니었으나 50%의 경험치를 얻는 데 성공한 나는 같은 레벨이라도 경험치가 얼마나 채워졌는지에 따라 실력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페이스라면 전국체전 진출에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레벨 업을 했을 때와 같은 확연한 변화까지는 아니었지만, 관장님께서는 날이 갈수록 몸에 속도가 붙고 동체 시력도 좋아졌다며 칭찬했다.
게다가 이미 전국체전 고등부에서 은메달을 딴 김정욱을 이긴 경험이 있기에 자신감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성문고등학교? 거기에도 복싱부가 있던가?”
“복싱부는커녕 체육 특기생 한 명도 없을걸?”
출전하는 선수들 중 대부분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나 늦어도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서로 안면을 튼 상태였다.
“저 친구는 체급을 잘못 정했어. 웰터가 아니라 적어도 미들급 이상은 뛰어야 맞겠어.”
우리 근처에 서 있던 명지고등학교의 김창섭이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매력 스탯이 오른 이후에도 내 키는 조금씩 컸고 현재는 180에 달하고 있었다. 게다가 고된 훈련으로 근육이 붙은 상태라 체격도 다부져 보였다.
180cm에 71kg의 체중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동 체급에서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러나 리치가 길다는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감량을 많이 하는 선수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너 최근에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스파링을 한다는 친구 들어 본 적 있어?”
“서울에서 복싱 좀 한다는 애들 중에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김창섭은 친구를 보며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반문했다.
“내가 알기로 성문고 강진우가 소문의 주인공일 거야. 우리 코치님 말로는 복싱을 시작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기본기가 꽉 잡혀 있고 운동 능력이 엄청 좋대. 어? 생각해 보니까 네 첫 상대가 저 녀석이잖아.”
“그래 봤자 체육관에서 조금 깔짝댄 게 전부인 놈이야. 원래 처음 운동할 때는 다들 자신감이 넘치잖아.”
학교에 소속된 선수들은 엘리트 체육을 한다는 자부심이 넘쳤고 체육관 출신 선수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쨌든 조심해라. 이번에는 전국 대회에 나가 봐야 할 거 아니야.”
“쳇,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 할 거 준비나 해. 난 이강호만 신경 쓰면 돼.”
그는 작년 선발전에서 안타깝게 준우승에 머물렀기에 서울 대표 선발전 유력 우승 후보인 이강호에게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잠시 후, 웰터급 경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수들은 예정된 시간에 맞춰 시합 준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 잡담들 그만하고 몸들 풀어.”
“네, 코치님.”
시합 진행을 돕는 스탭 중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와 이야기했고 코치들은 이를 듣자마자 선수들에게 워밍업을 지시했다.
‘제깟 놈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딱 체육관 수준일 거야. 밥만 먹고 운동만 하는 우리랑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고.’
자신의 차례가 되어 링 위에 오른 김창섭은 코너 구석에 서 있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띵-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됐다.
그는 이 시합을 이기더라도 뒤에 한 경기를 더 치러야 했기에 최대한 빨리 끝내려 했다.
“야, 천천히 해 천천히!”
명지고 코치는 흥분한 제자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김창섭은 앞뒤 재지 않고 그대로 돌진하며 들어왔다.
‘단숨에 끝내려면 아무래도 복부를 공략해야겠지?’
헤드기어를 낀 상대를 14온스 글러브로 KO 시키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나는 놈과 마찬가지로 시합을 조속히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기에 다가오는 상대에게 가볍게 잽을 날리며 경기를 풀어 갔다.
‘윽, 제법 빠르잖아.’
단숨에 나를 제압하려 했던 김창섭은 예상보다 빠른 공격에 안면을 한 대 허용했다. 그러나 곧바로 가드를 올리고 고개를 흔들며 펀치를 방어했다.
‘멍청한 놈, 여기가 프로 경기인 줄 아나?’
가드 너머로 충격이 전해져 오긴 했으나 헤드기어와 단단한 가드로 인해 어느 정도 버틸 만했다. 김창섭은 가드 사이로 눈을 빛내며 나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헉.”
안면에 쏟아지는 잽, 스트레이트를 막는 데 집중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들어온 복부 공격을 막지 못하고 탄성을 토해 냈다.
‘이만 끝내야겠어.’
상대의 허리가 숙여진 것을 확인한 나는 어퍼컷을 날렸다.
김창섭은 스웨이로 펀치를 피하려고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에 그대로 얼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다운! 원, 투, 쓰리…….”
“허억, 허억…….”
코를 가격당한 김창섭은 얼굴은 선혈이 낭자했고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호흡하기 어려워했다.
“스톱, 경기 끝.”
카운트를 세던 심판은 피를 흘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김창섭을 보고 TKO를 선언했다.
코의 모양이 묘하게 어긋난 것을 보고 골절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수고했다. 다음 경기까지 좀 쉬어라.”
“네, 관장님.”
“딱히 할 게 없으면 상대 선수 경기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관장님은 나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조언했다.
“알겠습니다.”
방금 시합에서 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었기에 특별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던 나는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관람하기로 했다.
‘흠, 딱 보니까 김창섭보다 실력이 떨어지네. 자만하면 안 되겠지만, 실수만 안 하면 질 일은 없겠어.’
두 번째 경기에서 붙을 상대의 역량을 확인한 나는 결승에서 만나게 될 확률이 높은 이강호의 시합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세븐, 에잇, 나인…….”
다른 선수의 경기를 보느라 늦었던 탓일까, 이강호는 이미 상대를 KO 시킨 뒤 유유히 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실력이 상당한 것 같네.’
심판석 위에 배치된 디지털 시계는 1라운드가 아직 1분이나 남아 있음을 알려 줬다.
김창섭을 40초 만에 쓰러뜨린 나로서는 주눅 들 이유가 없었으나 이강호의 실력이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진우야, 밥 먹으러 가자.”
“네.”
오후 경기를 뛰기 위해선 밥을 든든히 먹는 것도 중요했다.
백성철 관장은 체육관 근처에 미리 봐 두었던 음식점으로 날 데려갔고 그곳에서 간단하게 국밥을 시킨 뒤 시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 붙을 애는 어떨 것 같아?”
“이렇게 말하면 자만한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훈련 때 하던 대로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확신에 찬 얼굴로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